‘좀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은 채다. 초월적 존재에 이끌려 이리저리 출몰한다.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선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미 금융가에선 요즘 연방정부의 구제금융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금융기관을 ‘좀비’라고 부른다. 정부의 자금 지원이 아니고선 이미 죽은 목숨이란 얘기다. ‘좀비 은행’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전까지 경제위기는 끝나지 않을 터다. 미 금융권 안팎에서 은행 국유화를 둘러싼 논쟁이 갈수록 번지고 있는 이유다.
“은행 국유화를 둘러싼 논란은 연막작전에 불과하다.” 은 2월25일 인터넷판 칼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통신은 “이미 거대은행들은 국유화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시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양대 은행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건 적절한 시점에 정부가 구제금융이나 지급보증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시장이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두 은행은 이미 사실상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국유화 논쟁의 한 축을 이루는 ‘기정사실론’이다.
부실 은행 국유화에 대한 찬성 의견은 뜻밖의 인물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시장 방임주의자’로 통해온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대표적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지난 2월18일 와 한 인터뷰에서 “신속하고 질서 있게 금융산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한시적 국유화가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100년에 한 번 정도는 이런 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시장 개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공화당 일각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된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지난 2월15일 〈ABC방송〉에 출연해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은행 국유화를 해법의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존 매케인 전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상당수 동료 의원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유화 찬성론자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미 금융시장의 절박한 현실에 기반해 있다. 상당수 대형 은행이 이미 위험한 지경까지 내몰려 있다. 크루그먼 교수의 지적처럼 정부가 추가 지원에 나설 것이란 기대감이 없었다면 이미 일부는 도산했을 수도 있다는 게다. 하지만 이들 은행이 무너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을 때 미국 금융 시스템은 사실상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보다 자산 규모가 큰데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상업은행인 시티그룹이나 뱅크오브아메리카가 파산한다면 어떤 상황이 올지는 상상을 불허한다.
경영진·주주 등 반대론 전파반대론도 만만찮다. 국유화로 은행의 자산가치가 떨어지면서, 주주들이 치명적인 손실을 볼 것이란 우려가 첫손에 꼽힌다. 국유화의 ‘전염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시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가 국유화되면, JP모건체이스나 웰스파고 같은 굵직굵직한 은행들도 비슷한 처지로 내몰릴 것이란 게다. 국유화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될 경우 자칫 정치적 역풍에 휘말릴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보다 민간이 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설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은 2월22일치에서 “무엇보다 8천여 부실 은행 모두를 국유화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결국 몇몇 대형 은행만 국유화하는 선에서 그칠 텐데, 이럴 경우 중소형 은행을 중심으로 한 잠재적 금융위기의 불씨를 제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부실 은행에 무한정 자금 지원을 해줄 순 없는 노릇이다. 미 연방정부는 이미 시티그룹에 400억달러를 지원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에도 45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두 은행의 현 자산가치 총액은 그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 때문에 제라드 카프리오 윌리엄스대 교수는 에 보낸 기고문에서 “지금처럼 금융기관 살리기에만 세금을 퍼붓는 것은 부자에겐 사회주의적 혜택을 주고, 가난한 이들에겐 자본주의의 해악만 강요하는 꼴”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해답은 하나로 모아진다. 정부가 나서 부실은행을 ‘접수’하고, 부실 자산 처리 및 부채 청산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 뒤 민간에 매각하는 절차로 ‘한시적 국유화’를 해야 한다는 게다. 이는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파산 우려가 있는 중소형 금융기관을 상대로 벌이는 회생 절차와 똑같은 방식이다. 일단 국유화가 이뤄지면 예금자 보호는 강화되고, 대출 기준은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을 은행에 내줄 처지에 몰린 이들도 국유화를 반길 만하다. 민간 은행에 비해 정부가 주택 가압류에 더 적극성을 띠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은행은 민간에 맡겨야 한다는 게 원칙”이란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국유화에 대한 시장의 거부감 탓이다.
“신속한 안정화를 위해 시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를 짧은 기간 정부가 관리할 수도 있다.” 지난 2월20일 크리스 도드 상원 금융위원장은 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도드 위원장은 “딱히 맘에 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결국 한시적으로 이들 은행을 국유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발언이 전해지면서 주가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후 들어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까지 나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목적은 민간이 소유하고 정부가 규제하는 은행“이라며 진화를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시티그룹 주가는 이날 22%나 빠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주식도 3.6% 급락했다.
이날 국제 금값은 1온스(약 31.1g)에 1천달러를 넘어서면서,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폭락 장세는 주말을 넘겨 2월23일에도 이어졌고, 결국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직접 나서야 했다. 버냉키 의장은 2월24일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은행을 국유화할 이유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시장은 소폭 반등세로 돌아서 장을 마감했다. ‘국유화’란 단어가 갖는 상징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민영화 전 단계’(Pre-Privatization)란 용어가 월스트리트를 배회하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루비니 “국유화가 실용적 대책”미 재무부는 일단 자산총액이 1천억달러를 넘는 19개 대형 은행을 상대로 자산 건전성 평가를 벌여 추가 구제금융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른바 ‘스트레스 테스트’다. 일정한 건전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은행에 대해선? 현재로선 ‘국유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금융위기를 예언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월24일 〈CNBC방송〉에 출연해 “정부가 몇조달러를 들여 금융기관을 구제하고, 이어 더 많은 돈을 퍼부어 부실 자산 처리에 쓰는 건 재정적으로 지나치게 부담이 될 것”이라며 “한시적이라도 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이 일견 ‘볼셰비키 혁명’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가장 실용적이며 시장 친화적인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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