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을 거지로 아나?”
10월13일 저녁 서울 마포 공덕동의 한 호프집. 흐릿한 불빛 아래 담배 연기 매캐한 그곳에서 한 여기자가 맥주잔을 ‘꽝’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복지로 되돌려달라고 세금을 낸 거지, 누가 이렇게 거지에게 자선하듯 세금을 되돌려달라고 했어?” 유가환급금에 관한 얘기였다. “이게 기사다”라는 생각에 졸음이 확 깼다.
홑벌이는 못 받고, 맞벌이는 다 받고
10월 들어 월급쟁이들은 유가환급금 관련 서류를 회사에 내고 있다. 하지만 세금을 돌려준다고 해도 시큰둥한 분위기다. 오히려 ‘일회성 대국민 생색내기 프로젝트’라는 비아냥거림을 사고 있다. 서민들에게 돈 10만원 쥐어주면서 부자들에게는 앞으로 매년 대대적인 감세 선물을 주는 데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다. 회사원 최아무개씨는 “나라에서 돈을 준다니 악착같이 받아야겠지만 전혀 반갑지 않다”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 주는 유가환급금도 정작 필요한 저소득층은 못 받는 경우가 있다. 유가가 올라 졸속으로 정책을 마련한 흔적이 역력하다. 부자만의 감세에 대한 비판을 돌리려 한 의도도 엿보인다.
유가환급금이란 6월8일 정부가 ‘고유가 극복 민생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기름값 고통을 덜어준다며 내놓은 것이다. 기름값이 너무 올라 정부가 세금을 돌려주겠다는 일회성 정책이다. 전 국민의 30% 정도인 1380만 명에게 1인당 최고 24만원까지 되돌려준다. 한 달에 2만원꼴이다. 24만원을 다 받는 사람은 한 해 연봉이 3천만원 이하인 월급쟁이와 연간 종합소득이 2천만원 이하인 자영업자다. 정부 부담은 3조원쯤 된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차가 있건 없건 신청하면 모두 받을 수 있다. 자영업자는 국세청 유가환급금 홈페이지(refund.hometax.go.kr)에서 직접 신청하거나 세무서를 찾아가 신청서를 쓴 뒤 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빨리 받고 어떤 이들은 늦게 받는다. 월급쟁이는 10월에 신청을 받아 11월에 지급하도록 돼 있는 반면, 자영업자들은 11월에 신청해 12월에 받는다.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인 셈이다. 기한 안에 신청하지 않으면 그나마 환급을 못 받는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유가환급금을 발표하면서 “획일적인 지원보다 고유가를 감내하기 어려운 계층을 대상으로 선별적·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당히 획일적인 방식이어서 형평성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이번 대책에서 월급쟁이와 자영업자, 저소득층에 대한 유가환급금 지급은 가족 수나 재산 정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소득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여기에 가구별이 아닌 개인별로 환급금을 지급해 홑벌이 가구는 맞벌이 가구에 견줘 상대적으로 차별을 겪는다. 연봉 4천만원인 홑벌이 가구는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연봉을 합쳐 6천만 원인 가구는 각각 24만원씩 48만원을 돌려받는다. 맞벌이 부부에 견줘 연봉 총액이 2천만원이나 적은데도 세금 환급에서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셈이다.
뒤늦게 일용직에게도 지급애초 기획재정부가 마련한 안에는 정작 생활이 어려운 임시직은 쏙 빠졌다. 정부가 세금 납부 실적이 있는 노동자와 자영업자 등 경제활동 인구만을 지원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김광림 한나라당 의원은 9월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질의에서 “실업자(78만 명)와 임시·일용근로자(735만 명) 등 저소득층 954만 명 가운데 926만 명이 유가환급금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이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자, 뒤늦게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일용직 384만 명에게도 유가환급금을 주도록 했다. 뒷북을 친 셈이다.
하지만 노점상, 실업자, 전업주부 등은 여전히 환급금을 받을 수 없다. 이들은 소득을 증빙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환급금 지원을 신청할 근거가 없다. 정작 지원해줘야 할 저소득층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빼버린 셈이다.
기름값 때문에 세금을 돌려주겠다고 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은 1999년 침체된 경기를 돌파하기 위해 저소득층 1인당 2만엔씩 상품권을 주며 소비를 늘리려 했다. 미국은 지난 5월부터 전 국민의 45%에게 1천억달러(약 100조원)를 나눠주고 있다. 미국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에 따른 경기 부양을 위해서다. 하지만 세금 환급은 반짝 효과뿐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대증적인 처방인 셈이다.
세금 환급은 찔끔, 일회성 이벤트였지만 부자들을 위한 감세는 화끈하게 지속적으로 내린다. 정부는 지난 9월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원래 예고됐던 법인세 인하는 물론 소득세·양도세·상속증여세·종합부동산세에 이르기까지 총 21조원 규모의 감세 종합세트를 내놓았다.
사회 안전망과 복지 시스템 다져야하루하루 사는 게 팍팍한 서민·중산층에게 감세는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유혹의 꺼풀을 벗기면 치명적인 독약이 나온다. 부자들만 내는 종부세가 아닌, 보통 월급쟁이들이 많이 내는 소득세로 한번 따져보자. 이종석 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회계사)이 정부의 소득세 감면을 2006년 국세청 국세통계연보로 환산한 자료를 보면, 연봉 3735만원인 사람은 달랑 5만원을 돌려받는다. 반면 연봉 1억2천만원인 사람은 354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2006년 기준으로 소득세 감면 예상액은 2조4천억원. 이 가운데 41%인 9985억원이 상위 3%인 연봉 7천만원 이상 고소득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이 위원은 “감세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게 세율인데, 이번 세제 개편안을 보면 모든 종류의 세율을 다 낮춰줬다. 세제 개편안이 매년 발표됐지만 이번처럼 강력한 감세안은 없었다. 이번 감세안에 따른 세수 부족을 부가가치세 면세 축소와 담배소비세 인상 등을 통해 메우려 한다면,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부유층 세금 감면분을 충당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서민과 중산층에게 몇 푼씩 나눠주는 식이 아니라 경기 침체의 1차 타깃이 되는 서민과 중산층, 자영업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과 복지 시스템을 다져나가는 데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를 기대하며 세금을 낸 중산층과 서민에겐 거지에게 주듯 푼돈을 찔끔 던져주고, 부유층에겐 화끈하게 세금을 내려주는 정부 때문에 국민은 자존심이 상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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