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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강만수, 무엇을 할 것인가

등록 2008-0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세무 공무원으로 출발해 재경원에서 승승장구하다 외환위기로 낙마, 강력한 친재벌정책 들고 귀환</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총괄역인 강만수 기획재정부(현 재정경제부) 장관 내정자를 처음 대면한 것은 초년 기자 시절인 1995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그는 재정경제원(재경부 전신) 세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초짜’시절 세제실장 방으로 찾아가 나눈 얘기는 이제 까맣게 잊혀졌다. 다만, 좀 깐깐해 보이는 첫 인상과 ‘세제통’이라는 이미지만은 여태껏 머릿속에 남아 있다.

부가가치세 만든 주인공

그가 세제통의 평판을 얻게 된 출발점은 세무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 경남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에 행정고시 8회인 강 장관 내정자는 1970년 국세청에 배치돼 경주세무서 총무과장으로 공직의 첫발을 뗐다. 세무서 생활에서는 별 보람을 찾지 못했던 듯하다. 강 내정자는 2005년에 펴낸 회고록 에서 당시를 ‘회의감이 밀려왔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자장면이 140원인데 하루 출장비가 150원 정도였고, 전화료·우편요금·고지서 용지·사무용품 모두 담당자들이 알아서 조달했다. 사실상 조세 청부업자와 다름이 없었다.” 국정감사를 하러 내려와 불국사관광호텔에 머물고 있던 국회의원들을 위해 채홍사(採紅使) 노릇을 하다가 현장을 기자에게 들켜 홍역을 치른 일도 있었단다. 서대구세무서 법인세과장을 끝으로 길지 않은 세무 공무원 이력을 끝내고 아는 선배의 도움으로 4년 만에 재무부로 옮긴 배경이다.

재무부로 옮아온 그는 우리나라 세무 역사에 굵직한 발자취 하나를 남긴다. 국내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가가치세를 만든 실무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부가가치세 도입은 그 이전까지 영업세, 소득세, 법인세의 거래원천징수 제도로 운영되고 있던 것을 단순화하는 작업이었다. 강 내정자는 재무부 세제국 사무관으로 일하며 외국의 부가가치세 자료들을 번역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위한 토론 자료로 제공했다. 직전에 정부 차원에서 경제 개발과 방위력 증강을 위한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부가세 도입 방침을 정한 터였다.

부가가치세는 1977년 시행에 이를 때까지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너무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경제계뿐 아니라 심지어 국세청조차 반대하고 나섰다. 대구지방국세청에서 세무 공무원들을 상대로 부가가치세를 설명하던 중 과장으로 승진한 뒤 부가가치세 도입의 모든 실무작업을 떠맡았다. 반발 여론을 무마하는 것 또한 그의 주임무였다. 사미자씨가 주연으로 출연한 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돼 TV와 극장에서 방영되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부가가치세를 알아오라는 숙제가 주어질 정도로 대대적인 교육과 홍보 작전이 펼쳐졌다.

강 내정자가 세제에 이어 금융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다. 보험2과장으로 시작해 1992년 국제금융국장까지 10년 이상을 이재국에서 보냈으니 경력의 길이로만 따지만 세제통이라기보다 오히려 금융통에 가깝다.

재경원 출신의 한 인사는 강 내정자에 대해 “김진표 의원(통합민주당)과 함께 ‘세제’에서 ‘금융’ 부문으로 넘어와 성공한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원래 세제 쪽에는 인재가 별로 없다. 세제 파트는 상대적으로 아웃사이드였다.” 재경원을 오래 출입한 한 일간지 중견 기자는 강 내정자의 금융 부문 입성 배경으로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들었다. “재무부의 ‘성골’이던 이재국에는 국회의원, 장관 자녀나 사위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1980년대의 공직 숙청 바람에 밀려 관직을 떠나면서 공백이 생겼고 강 내정자가 운 좋게 그 시기에 들어가 안착했던 거다.”

7·4·7 공약의 설계자

세제에 이어 금융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경력은 나중에 다른 부처의 장관 부럽지 않은 막강 파워 재경원의 차관직에 오르는 배경이 됐다. 재경원 차관으로 승진한 때는 공교롭게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3월이었다. 그가 외환위기의 무거운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꼽힌 빌미가 여기에 있었으니 금융 이력을 쌓은 건 행운인 동시에 불운의 씨앗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의 회고록에는 외환위기의 책임자로 몰린 데 대한 강한 불만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도 증인으로 불려나간) IMF 청문회는 단군 이래 최대 국란이라는 ‘정치 공세’가 주도했다. 듣기보다는 말하기가 압도했던 ‘푸닥거리’ 한 마당 같았다. 정치는 ‘엉뚱한’ 범인과 영웅을 만들며 진실을 묻어버렸다.” 회고록에는 (그의 출신 기관인 재무부와 함께 재경원에 합쳐진) 경제기획원 출신들에 대한 불만과, 그도 주요 참여자로 가세한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행 독립’ 다툼에서 나타난 한국은행 쪽의 행태를 꼬집는 대목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관가에선 “타의나 마찬가지로 관직을 떠난 데 따른 울분이 덜 풀린 것 같다”는 걱정 어린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강 전 차관의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은 인수위 활동 초기부터 일찌감치 점쳐져왔다. 경제관료로 화려한 이력을 쌓은데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대통령과 만난 실마리는 ‘종교’였다. 그 또한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소망교회 장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수십 년 전 소망교회에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강 내정자는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초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일해 정치권 입성을 예고했다.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후반기 때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의 슬로건이었던 ‘7·4·7 전략’(연평균 경제성장률 7%를 달성해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열고 세계 7대 강국에 진입하겠다는 구상)을 만들어낸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강 내정자가 만들었다는 대표 슬로건에서 엿볼 수 있듯 그의 정책 방향은 분배보다 성장을, 자본과 노동의 대립 구도에선 자본(기업)을 중심에 놓는다. 이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한국 보수세력의 경제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강 내정자는 특히 구체적인 정책 면에서 법인세 완화 내지 폐지를 내걸어 뚜렷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에 “경쟁국이 하지 않는 일은 하지 말고, 선진국을 배우고 따라하자”고 자답한다. 그러면서 “기업의 경영 환경이 경쟁국보다 유리하게 개선되면 투자는 활성화될 수 있다”며 “재벌의 장점마저 죽이는 규제는 없애고 법인세도 가능하면 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침체 원인은 기업의 투자 정체이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려면 당연히 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거나 없애고, 출자총액제한제나 금융·산업 자본 분리 원칙 같은 기업 규제 장치를 완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새 정부 경제 정책 독주 예상

새 정부의 경제 정책에선 강 내정자의 독주가 예상된다. 정부 조직 개편으로 부총리제가 없어졌다곤 해도 기획재정부는 역시 경제 부문의 선임 부처다. 더욱이 정부 조직 개편으로 예산권을 쥐게 됐다. 강 장관을 일정하게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꼽히는 곽승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나 김중수 경제수석은 학자 출신이어서 관료 조직을 장악하는 데 한계를 띨 수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에 강 내정자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사실은 그에게 한껏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꼭 10년 만에 ‘친정’에 복귀하는 강 내정자가 쥔 ‘힘’을 어떻게 발휘할지는 관가의 관심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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