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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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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3-11-05 00:00 수정 2020-05-02 04:23

고령자 고용 연장보다는 임금삭감에 초점 맞춘 ‘한국식’ 임금피크제는 독이 든 사과인가

회사마다 50대 사원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날 갑자기 노후 준비도 없이 거리로 내몰린 고령 노동자들. 최근 거론되고 있는 임금피크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일본과 달리 ‘한국식’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이 아니라 임금삭감에 초점을 둔다는데….

전선 제조회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한전선에서 지난 11월1일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체 600여명의 생산직 사원 중 300여명이 자발적으로 회사에 사표를 쓴 뒤, 임금삭감에 동의하고 재입사를 한 것이다. 사표를 쓴 사원들은 전체 사원들의 평균임금보다 임금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이미 50살이 넘은 50여명은 임금을 최대 30%까지 줄이고, 앞으로 3년 뒤 피크임금을 재조정할 때까지 더는 임금을 올려받지 않기로 했다. 아직 50살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역시 기본급을 낮추고 앞으로 임금이 일정액(피크임금)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노동자들이 그 대가로 받는 것은 단 하나,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대한전선의 임금삭감과 정년보장

대한전선 하성임 기획담당 이사는 “2년 사이에 회사 매출이 30% 가까이 떨어졌다. 그런데다 연공임금제를 오래 유지하다보니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높아져 신설 회사와 경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쪽에서 보면 임금을 줄이는 것보다 인력을 줄이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지만, 노조가 임금삭감에 동의해 합의점을 찾았다”고 말했다. 노조쪽이 임금삭감과 일정 시점 뒤 임금동결에 동의한 것은 고용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강진연 사무장은 “회사에서 명예퇴직 신청을 받겠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됐고, 고령자들이 정년까지 고용만 보장되면 임금을 낮출 용의가 있다고 해서 최종합의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회사를 떠나게 되면 과거의 임금수준을 받는 일자리를 새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고려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대한전선이 도입한 새로운 임금제도는 ‘변형된 임금피크제’로 불리고 있다. 물론 그 핵심은 ‘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일 뿐 임금피크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대한전선의 사례는 임금피크제 도입 문제를 노사간의 새로운 쟁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10월31일 국민·주택은행 통합 2주년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에서 “비용을 줄이고 효과를 더 높이는 방안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노조와 협의하면 올해 중에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4월 임금피크제 도입 검토를 거론했다가 노조의 거센 반발로 미뤄뒀던 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국내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에서의 임금피크제 논란은 금융업계뿐 아니라, 전 산업으로 임금피크제 논의를 확산시킬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정년 연장을 위해 도입

국내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거나 도입을 확정한 기업은 지금까지 3곳뿐이다. 첫 단추를 꿴 것은 공기업인 신용보증기금이었다. 지난 7월1일부터 제도를 시행한 신보의 임금피크제는 정년(58살) 3년 전부터 임금이 동결된다. 이때 6개월치 급여를 받고 명예퇴직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반직에서 업무지원직으로 신분을 바꾸는 것이 뼈대다. 직군이 바뀌면 첫해는 과거 임금의 75%, 2차연도에는 55%, 3차연도에는 35%를 받게 된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는 회사와 협의해 계약직으로 고용되고, 실적이 좋으면 최대 61살까지 일할 수 있다. 둘 다 선택하지 않아도 정년까지 고용은 되지만 보직이 업무연구역으로 바뀌면서 임금이 절반으로 줄게 된다.

또 다른 공기업인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도 신보와 비슷한 내용의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내년 1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다만 공단은 정년 이후의 고용 연장은 없다. 민간기업 가운데는 대우조선해양이 관리직 인사적체 해소 차원에서 내년 시행을 목표로 임금피크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공기업에서 임금피크제가 먼저 도입된 것은 시범사례를 만들려는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그러나 지금까지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일본에서 먼저 시작한 임금피크제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일본의 임금피크제는 고령화 사회에 맞춰 고령 노동자들의 고용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년연장은 없고, 현행 정년 아래서 임금을 삭감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일본 산요전기는 노동자들의 정년이 60살이다. 이는 일본이 법으로 노동자들의 정년을 60살 이상으로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요전기의 임금피크제는 노동자가 60살 정년에 퇴직을 할 것인지, 65살까지 더 근무를 할 것인지를 사원들이 미리 선택하도록 했다. 다만 정년을 5년 연장할 경우 55살부터 60살까지는 55살 때 임금(피크임금)의 70~75%를 받고, 60살 이후에는 별도의 임금제도를 적용한다. 미쓰비시전기의 경우 60살 정년을 기준으로 연장고용을 희망하는 기간만큼 조기 퇴직을 한 뒤 60살까지는 퇴직 때 임금의 80%를 받고, 이후에는 50%만 받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의 임금피크제는 이처럼 고용기간을 연장하면서, 이로 인한 기업의 인건비 추가부담을 최소화하도록 임금의 배분방식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공임금제도가 고용기간 연장에 주는 부담을 완화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일본의 종업원 수 5천명 이상 기업 중 77.5%, 종업원 수 99명 이하 기업 중 66%가 정년 뒤 고령자 고용확대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게 된 계기는 과거 60살이던 후생연금 지급 개시 연령이 3년마다 1년씩 늦춰져 앞으로 65살로 재조정됨에 따라 연금을 지급받을 때까지의 소득보장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아예 정년을 65살로 바꾸도록 의무화하는 입법을 추진 중이다.

절약된 인건비로 신규채용 늘린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여러 면에서 사정이 비슷하다. 연공에 바탕을 둔 임금제도, 인구의 고령화, 그리고 국민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도 똑같다. 그러나 일본이 노동자들의 정년을 연장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나라는 애초 단체협약으로 합의한 정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관계자는 “공기업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인건비를 줄이면 청년실업자를 조금이라도 구제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정부가 제도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고 말했다. 고령자의 고용 연장이 아니라, 고령자의 희생을 통한 청년실업 구제쪽에 제도 도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신보의 경우 연간 18억원가량 절감되는 인건비를 바탕으로 올해 예년보다 20명가량 신규채용 인원을 늘릴 예정이다. 물론 고용이 불안정한 고령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제도라도 위안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신보노조 남상종 위원장은 “임금이 삭감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느냐”며 “하지만 명예퇴직한 분들의 경조사에 가보면 자리가 썰렁한데, 어쨌든 회사에 남아 정년을 보장받은 사람들은 분위기가 좋다. 업무 분위기가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 도입되고 있는 임금피크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많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대한전선의 경우 임금피크제라기보다는 임금삭감 합의에 가깝다. 그나마 신보의 사례가 현행 정년이 유지됐고, 정년 뒤 재고용 제도가 도입됐으며, 임금삭감분으로 신규채용을 한다는 점에서 애초 제도 취지에 근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피크제가 도입해볼 만한 제도인 것은 맞지만, 제도 도입이 임금삭감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고령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핵심은 바로 정년의 보장이 아니라, 정년의 연장에 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지난 3월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에 제출한 ‘고령화시대에 있어 과학기술인력 활용방안’이란 보고서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 155명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와 관련한 설문조사 결과가 들어 있다. 조사결과,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년을 연장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절반을 차지했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임금피크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나이에 따른 차별을 법으로 엄격히 금하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들이 고용조정을 할 때 임금이 많고 새 업무에 재배치하기 어려운 고령자들을 먼저 내보내는 것이 일반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노조 간부들은 부정적 반응

한국식으로 변형된 임금피크제에 대한 노동조합 간부들의 반응은 극히 부정적이다. 그것이 중장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보다는 그들의 임금수준을 떨어뜨리고, 제도적으로 조기퇴직을 정착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금융노조 김득연 정책기획실장은 “중고령자의 고용불안 원인이 임금압박 때문만은 아닌 상황에서 임금삭감 대가로 정년을 보장해준다고 해서, 그 고용이 안정적일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노동계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면 고령자의 고용기간 연장이라는 애초 취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노총 이민우 정책국장은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으로 정년을 연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애 임금의 재배분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노사간에 합의돼 있는 57살 안팎의 정년조차 법과 제도가 전혀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퇴직 압박을 받는 고령 노동자들에게는 임금피크제가 은근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설령 독이 든 사과일지라도, 그들은 지금 너무 배가 고픈 것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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