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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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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우리는 여자다

30~40대 ‘전문직’ 여성 8명의 도전, 작곡·노래·녹음까지 ‘우먼 프로젝트’
등록 2009-03-27 17:11 수정 2020-05-03 04:25

30~40대 ‘전문직’ 여성 8명이 ‘통 크게’ 일을 벌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가수도 아닌 이들(꼭 가수만 하는 건 아니지만)이 모여 음반을 발표했다. 팀 이름은 와우(W.a.W) ‘우리는 여자다’(We are Women)의 줄임말이다. 직장인 밴드 수준을 넘어 프로를 꿈꾸는 여성들만의 보컬 그룹이다. 노래와 작곡은 물론 작사·편곡·녹음 등 음반 제작에 참여한 거의 모든 스태프들이 여자다. 오디션을 통해 꾸려진 여성 작곡가 6명이 곡을 만들고, 8명의 보컬이 한 곡씩 노래를 불러 3월 말 1집 음반을 발매한다. ‘아마조네스 예술그룹’의 탄생이다.

‘우먼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수영, 허민희, 신영미, 이우진, 김선민, 이선, 서옥석, 진정애(맨 위부터 시계방향). 사진 시니즈 제공

‘우먼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수영, 허민희, 신영미, 이우진, 김선민, 이선, 서옥석, 진정애(맨 위부터 시계방향). 사진 시니즈 제공

와우는 ‘여자들이 모여 작곡하고, 여자들만 노래한다’는 취지의 ‘우먼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젝트를 이끈 건 남성인 이혁준 PD다. 드라마 음악감독, 평창 동계올림픽 주제가 등을 맡았던 이 PD는 처음엔 신인 여성 작곡가를 발굴할 생각으로 소박하게 일을 벌였다. “대중음악 시장을 보면 유명 여성 작사가들은 있어도 여성 작곡가들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여성 싱어송라이터도 별로 없고요. 여성 작곡가들이 만든 곡을 여성들이 부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일이 점점 커졌어요.”

주부, ‘뽀로로’ 성우… 다양한 멤버

실제로 우리나라 음반들을 살펴보면 영화 제목처럼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인 곡들이 대부분이다. 고착화된 성역할 분담처럼 남자는 작곡을, 여자는 작사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마치 작곡은 여성들이 넘볼 수 없는 금녀의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영심·이상은 등 싱어송라이터가 있긴 하지만 소수일 뿐, 눈에 띄는 여성 작곡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여성 작곡가가 만든 곡이 음반 타이틀곡이 되는 것도 드문 일이다. 누군가 분위기를 확 바꿔야 했다.

2006년 8월, 우먼 프로젝트는 그렇게 닻을 올렸다. 여성 작곡가들이 만든 결이 다른 곡을 여성 가수들이 불러보자고 기획됐다. 우선 노래를 만드는 게 시급했다. 오디션을 거친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며 고치기를 여러 번. 3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30여 곡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2명의 작곡가는 결혼을 했고, 그중 1명은 임신을 해 출산을 앞두게 됐다. 노래가 쌓이자 이번엔 가수들을 모아 오디션을 봤다. 30대 이상 ‘전문직’ 여성이 자격 조건이었다. 이 PD는 “20대에 비해 가수가 될 기회가 적은 30대 이상 여성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며 “주부를 포함해 모두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전문가라는 뜻으로 ‘전문직’이란 단어를 썼으니 사실은 열린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꾸려진 와우의 멤버는 김선민(41·광고 PD), 진정애(40·주부), 김수영(39·메이크업 아티스트), 신영미(38·성악가), 이선(37·성우), 허민희(33·문화재 복원가), 이유진(33·웹디자이너), 서옥석(31·마케팅 컨설턴트) 등이다. 노래방에서 노래 솜씨 좀 뽐내봤다는 이들은 흔쾌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맏언니 김선민씨는 “일도 있고 결혼도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걸릴 게 너무 많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듣고 무조건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막내인 서옥석씨도 “취지를 듣고 생각해보니 여성 작곡가들의 노래가 별로 없더라”며 “굳이 여성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내 인생에서 반짝거리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봤다”고 참여 동기를 설명했다.

와우, 우리는 여자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와우, 우리는 여자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결혼·출산… 3년간 함께 나이 들어

그러나 호기심 반, 의무 반으로 시작한 일은 1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슬슬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돈 버는 일도 아닌데 아이를 돌보고 일도 하며, 틈틈이 노래 연습을 하려니 힘들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잘못된 노래 습관을 고치는 건 더 어려웠다. 김수영씨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계속 같은 노래만 연습하면서 못한다고 깨지니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연습 중에 그만둔 이도 3명이나 된다. 가수 뺨칠 만큼 노래한다는 자부심도 상처를 받았다. 서옥석씨는 “처음엔 설렜다가 내 노래 실력을 확인하면서 걱정과 절망에 빠졌다”며 “결국 힘든 시기를 지나니 이런 기회를 만난 걸 감사하게 되더라”며 웃었다. 에서 ‘뽀로로’ 목소리를 연기하는 성우 이선씨도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우리 나이대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절망하고 깨지는 경험은 자극이 됐다”며 “삶과 나를 돌아보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우먼 프로젝트는 와우 멤버들에게 ‘드림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젊은 날 가수를 꿈꿨던 이들에겐 소원 성취의 짜릿함을,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이들에겐 일탈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가장 뒤늦게 와우에 합류한 허민희씨는 “한때 노래방을 한 달에 31번 이상 다니던 뮤지션 지망생이었다”고 했다. 그는 “서른이란 시점을 지나면서 꿈을 잊어버리게 되더라”며 “그 꿈과 열정을 버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잊었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고 말했다. 주부 진정애씨에게도 우먼 프로젝트는 소중하다. 젊은 시절 강변가요제에 출전한 적이 있는 진씨는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가정생활만 하다 보니 나만 도태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도 잘해보라고 응원해준다고 한다.

노래방에서 남의 노래만 부르다 내 노래를 갖게 된 건 와우 멤버들에게 설렘 그 자체였다. 음반 녹음을 앞두고 누구는 작업에 영향을 줄까봐 좋아하던 술을 잠시 끊었다. 시작은 “음반만 잘 만들자”였는데 어쩌다 보니 지난 3월22일에는 쇼케이스 공연도 하게 됐다. 공연 시간 총 65분 중 1인당 솔로 무대는 5분씩. 빠른 템포의 곡을 부르는 이들은 관객을 위해 댄스 연습까지 했다. 이혁준 PD는 “생각보다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많아 라디오 출연이나 콘서트 활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수익이 생기면 여성복지회 등에 기부도 할 생각이다.

콘서트 등 활동 계획, 2기 모집 중

우먼 프로젝트에 참가해 꿈을 이룬 이들은 새로운 친구와 좋은 선후배를 만들며 든든한 여성 네트워크를 얻게 된 것도 큰 소득이라고 말한다. 잊었던 꿈을 펼치니 생활엔 활력이 넘치고, 좋은 추억도 생겼다. 김선민씨는 “바쁘게 살다 보면 꿈은 멀리 있고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자기 결단과 노력에 달린 것 같다”며 “작은 꿈이라도 기회가 올 때 이뤄보라”고 조언했다.

우먼 프로젝트는 이번 1기에서 끝나지 않고 기수를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노래를 좋아하는 30대 이상의 전문직 여성이라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2기는 벌써 모집 중이다. 6월 말까지 시니즈(www.sinis.co.kr) 홈페이지에서 참가 신청을 하면 된다.



페미니스트 문화예술창작 모임
‘붉은 여신들’의 무한도전


나이와 직업이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예술’과 ‘꿈’이란 깃발 아래 뭉쳤다. 지난 연말에 결성된 ‘붉은 여신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몇 명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책 모임을 갖다 발전된 문화예술창작 모임이다. 이들을 뭉치게 한 책은 (줄리아 카메론 지음).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창조성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책이 자극이 되어 공통된 관심을 가진 여성들이 꿈을 펼치자고 모였다. 이 모임에 속한 ‘레드걸’(프리랜서 일본어 강사)은 “책을 공부하며 만든 창작물을 서로 교환하다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만들고 공연을 열기로 했다”며 “여성주의에 동의하는 이들과 재밌는 문화창작물을 만들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붉은 여신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8명으로 구성됐다. 부동산중개업자, 특수학교 교사, 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음악·시·연극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들이다. 모임을 결성한 뒤 이들은 개인적인 꿈으로만 간직했던 것들을 대중에게 풀어놓기로 하고 현재 이란 공연을 준비 중이다. 첫 공연은 3월27일 서울 상수역에 위치한 카페 ‘무대륙’에서 연다. 이번 공연의 한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세 번째 시화전을 열게 되는 ‘어지’(학생)는 때맞춰 시집도 출간해 시낭송을 들려줄 예정이다. 서울 홍익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시와’(특수학교 교사)는 ‘붉은 여신들’에 합류한 뒤 받은 영감을 노래로 들려줄 계획이다. 관객이 참여하는 퍼포먼스인 에서는 카미유 클로델, 나혜석, 사포(시인·레즈비언의 시조), 오노 요코 등 4명의 여성예술가들이 받았던 고통과 이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아마추어들이지만 프로를 꿈꾸는 이들의 공연에 여성계에서는 벌써부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레드걸은 “첫 공연 전부터 ‘이프 페스티벌’ 관계자를 포함해 여러 곳으로부터 초청공연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며 “앞으로 외부의 후원자를 모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연 안내는 붉은 여신들 블로그(http://blog.naver.com/artspot5) 참조.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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