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24일, 아마추어 야구에서 노히트노런(노히터·선발투수가 최소 9이닝을 던지면서 안타와 점수를 단 한 개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나왔다. 중앙고 3학년 우완 투수 김재현(18)이 그 주인공. 9이닝(회) 동안 동산고 타자 29명을 상대하면서 안타를 하나도 내주지 않고 삼진을 11개 잡아내면서 소속팀에 5-0 승리를 안겼다. 고교 노히터 기록은 2017년 배재고 신준혁 이후 5년 만이라고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신준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프로구단 소속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 누리집에 신준혁의 기록은 없었다. 2018년 신인 드래프트(지명 회의) 자료를 뒤져봤다. 역시 없었다. ‘혹시나’ 했다.
개인 소셜미디어(SNS)에 신준혁의 흔적에 대한 물음표를 남겼고, 지인에게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양대 진학 뒤 부상으로 야구를 관뒀다고 합니다. 지금은 방위산업체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다네요.”
짐작이 맞았다. 부상이 신준혁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놨다. 야구선수에게 부상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신준혁은 군 제대 뒤 야구 지도자 준비를 할 것이라고 한다. 노히터 투수로서의 자부심으로 앞길을 잘 헤쳐나가기 바란다.
사실 노히터 기록은 아마추어 리그에서도 흔치 않다. 해방 이후 77년 동안 김재현까지 29차례밖에 나오지 않았다. 최초의 노히터는 1946년 9월12일 우투우타이던 김성중(광주서중·현 광주일고)이 전국중등선수권대회 2회전 인천상업과의 경기에서 작성됐다. 대회 결승전에서 노히터가 나온 것도 3차례나 된다. 노장진(은퇴)은 공주고 시절 청룡기 결승전(1992년 6월10일)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노히터를 기록하며 팀에 우승을 안겼다.
한 해에 두 번이나 노히터를 한 투수도 있다. 인천 연고지 팀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임호균이다. 임호균은 1974년 화랑대기(8월2일)와 국회의장배(10월4일)에서 노히터를 했다. 두 대회 모두 전국대회였다. 가히 전국을 주름잡은 초고교급 투수였다고 하겠다.
‘컨트롤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임호균은 고 최동원과의 18이닝 완투 경기(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전)로도 유명하다. 둘은 선발로 등판해 14회까지 던지고 0-0인 상황에서 다음날 서스펜디드(일시 중지)로 열린 경기에서 4이닝을 더 던졌다. 승자는 최동원이었다. 최동원 역시 1975년 경남고 시절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터를 기록한 바 있다. 노히터 투수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18이닝 완투 경기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국보급 투수’였던 선동열은 어떨까. 선동열도 광주일고 시절인 1980년 7월24일 봉황대기 1회전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단 1개의 안타와 실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선동열의 노히터는 최동원 이후 5년 만에 나온 기록이었다.
선동열은 아마추어에 이어 프로(해태 타이거즈)에서도 노히터를 작성한 유일한 선수다. 1989년 7월6일 광주광역시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9탈삼진 3사사구로 사자 군단 방망이를 잠재웠다. 그는 공교롭게도 직전연도(1988년)에 이동석(빙그레 이글스)이 해태를 상대로 노히터를 할 때 해태 선발투수였다. 당시 이동석의 성적은 9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 7회말과 8회말, 유격수 장종훈이 1루수 강정길에게 던진 공이 뒤로 빠졌다. 7회말은 장종훈의 송구 잘못, 8회말은 강정길의 포구 잘못으로 기록됐다. 이날 선동열도 9이닝 동안 11탈삼진을 엮어냈다. 6피안타 무사사구. 그가 내준 1점은 7회초 1사 3루에서 주자 장종훈을 견제하기 위해 3루수 한대화에게 던진 공이 오른쪽으로 빠지면서 내준 비자책 점수였다.
KBO리그에서 노히터 기록은 14차례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현역 감독 중에도 ‘노히터 투수’ 출신이 있다. 김원형 에스에스지(SSG) 랜더스 감독이다. 김 감독은 KBO리그 역대 최연소 노히터 기록 보유자(20살9개월25일)이기도 하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인 1993년 4월30일 오비(OB·현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기록했는데, 타자 27명을 상대하면서 96개 공을 던져 9이닝 1볼넷 6탈삼진 무실점의 성적을 냈다. 9회 마지막 타자 박현영을 투수 앞 땅볼로 엮어내며 노히터의 대미를 장식했다.
김원형 감독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6회까지 1-0이었는데 타선이 1~2점만 뽑아주면 (노히터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7회에 2점을 뽑아줬다”고 했다. 그는 이어 “5회 이후에는 더그아웃 불펜에 있던 투수들이 모두 철수했다. 아마 노히터를 응원하기 위한 무언의 제스처였던 것 같다”며 “야수들 호수비도 있었고 밸런스도 그날은 정말 좋았다. 마지막 타자를 처리하고는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통틀어 노히터 기록은 한국 야구 역사상 지금껏 43차례(2022년 5월3일 기준) 나왔다. 현재 프로에서 뛰는 투수 중에는 최성훈(LG 트윈스), 한현희(키움 히어로즈), 김민우(한화 이글스), 신민혁(NC 다이노스) 등이 고교 시절 노히터를 작성했다. 아마추어 노히터 투수 중에는 신준혁처럼 프로 무대를 밟지 못한 이도 몇몇 있다.
KBO리그에서는 2019년 4월21일 삼성 덱 맥과이어가 한화를 상대로 기록한 노히터가 마지막이다. 국내 투수로만 한정하면 2000년 5월18일 한화 송진우가 해태를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은 뒤 22년 가까이 노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일본프로야구(NPB)에서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마린스)가 2022년 퍼펙트게임을 완성한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노히터든 퍼펙트게임이든 투수에게는 일생일대 최고의 날일 것이다. 하지만 대기록이 다음 경기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순간이지만 그 경기 또한 긴 야구 인생에서 부닥칠 수많은 경기 중 하나일 뿐이다. KBO리그 마지막 노히터 투수인 맥과이어가 4개월 뒤 방출된 것만 봐도 그렇다. 김원형 감독은 “팬들이 은퇴 뒤에도 기억해주는 것은 좋지만 노히터는 그저 그날의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어쩌면 노히터, 그 뒤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경기는 계속되니까. 야구는 이어지니까. 삶이 그러하듯.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야구가 뭐라고> 저자
*‘인생 뭐, 야구’ 시즌2를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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