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4월4일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유재신(왼쪽)이 SK 와이번스와 맞붙은 인천 원정경기에서 좌완 에이스 김광현을 상대로 자신의 데뷔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터뜨린 뒤 홈인하고 있다. KIA 타이거즈 제공
2020년의 일이다. 사회인 야구를 하는 지인이 신났다. 톡 문자로도 그 흥분이 전해졌다. 데뷔 첫 ‘손맛’을 봤는데 만루홈런이란다. 지인은 궁금한 듯 물었다. 프로에서도 흔한 일이냐고.
기록을 찾아봤다. 흔하지는 않지만 더러 있었다. 총 18차례. 가장 최근에는 유재신(KIA 타이거즈)이 2018년 김광현(당시 SK 와이번스)을 상대로 데뷔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뿜어냈다. 장정석 전 키움 히어로즈 감독의 프로 첫 홈런도 그랜드슬램(주자가 꽉 찬 상황에서 치는 홈런, 1996년 6월2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1982년) 개막전에서 이종도(MBC 청룡)가 삼성 라이온즈 이선희를 상대로 기록한 끝내기 만루홈런도 그가 프로에서 친 첫 홈런이었다. 엘지(LG) 트윈스 좌완(왼팔) 투수 차우찬은 지금껏 세 차례나 상대 타자(김민성·앤드루 브라운·신성현)에게 데뷔 첫 홈런을 그랜드슬램으로 내준 기록이 있다.
데뷔 첫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 타자는 꽤 많다. 2021년 4월25일 현재 무려 93명(외국인 선수 28명)이나 된다. 올해 KBO리그에서 처음 뛰는 메이저리그 출신 추신수(SSG 랜더스) 또한 개막 뒤 4경기 동안 13타석(11타수) 무안타에 시달리다가 국내 무대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극적일 수밖에 없는 ‘한 방’이었다.
프로 데뷔 첫 타석을 홈런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례도 있다. 그야말로 ‘한 방’으로 프로 무대에 입성한 셈이다. 미국 등에서 프로 생활을 하고 KBO리그에 데뷔한 외국인 타자를 제외하고 13명(외국인 선수 포함 18명)이나 1군 무대 첫 타석에서 짜릿한 ‘손맛’을 봤다.
KBO리그 사상 가장 극적인 ‘프로 첫 홈런’은 송원국이 때려냈다. 1998년 오비(OB·현 두산) 베어스에 2차 1순위로 지명돼 팔꿈치 부상과 간염 등으로 2군에만 머물던 송원국은, 2001년 6월23일 잠실 에스케이(SK)전 9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강봉규 대신 대타로 프로 데뷔 첫 타석에 섰다. 점수는 6-6 동점인 상황. 그는 상대 투수 김원형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쳐 끝내기 만루홈런을 만들었다. 프로 첫 타석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의 진기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송원국은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이바지하며 미래 유망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송원국의 프로 생활은 길지 않았다. 끝내기 만루홈런 이후 1년여 지난 2002년 8월9일, 잠실구장으로 가던 중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왼쪽 무릎 인대를 심하게 다쳤다. 긴 재활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다시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KBO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그의 프로 삶은 너무 짧았다. 프로 통산 성적은 81경기 출전(2001~2002년), 타율 0.267(146타수 39안타) 6홈런 28타점. 남보다 이른 은퇴를 한 송원국은 외제 자동차 딜러를 거쳐 모교인 광주일고에서 코치 생활을 했고 현재 안산공고 감독으로 있다.
송원국처럼 데뷔 첫 타석 때 홈런을 때린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다. 이석규(롯데·1984년), 윤찬(LG·1992년), 조경환(롯데·1998년), 허일상(롯데·2002년), 허준(현대·2006년), 권영진(SK·2008년), 황정립(KIA·2012년), 조성우(SK·2013년), 김웅빈(넥센·2016년), 김태연(한화·2017년), 강백호(KT·2018년), 신용수(롯데·2019년). 물론 타이론 우즈(OB), 톰 퀸란(현대) 등 외국인 선수도 있다.
광고
외국 선수들을 제외하고 한국 선수들만 놓고 보면 첫 홈런 이후 성적이 좋았던 선수가 많지 않다. 권영진, 김태연은 첫 타석 홈런이 프로 유일의 홈런이었다. 2019년 5월15일 사직 LG전 8회말 데뷔 타석 때 홈런을 쳤던 신용수는 이후 아직(2021년 4월25일 현재) 홈런이 없다.
이석규, 윤찬, 허일상, 황정립 등은 통산 홈런이 단 2개뿐이다. 데뷔 타석 때 ‘손맛’을 보고 이후 딱 한 번만 홈런을 경험한 셈이다. 허준, 조성우는 통산 홈런이 4개다. 이들 대부분은 프로선수 생활도 짧았다. 통산 타율도 2할 안팎에 머문다.
오랜 2군 생활 뒤, 혹은 주목받는 신인 타자로 처음 선 1군 타석에서 야구의 꽃, 홈런이라는 잭팟을 터뜨리며 꽤 잘 끊었던 출발 테이프. ‘꽃길’만이 예상되던 그 길에서 꽤 많은 타자가 의외로 ‘흙길’을 걸으며 조기 은퇴했다. 간절하게 서고 싶던 1군 첫 타석에서 일궈낸 엄청난 성과로 긴장감이 사라져버렸던 것일까. 어쩌면 너무 쉽게 생각했을 타격. 하지만 ‘야구의 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유재신의 경우, 2018년에 기록했던 그랜드슬램이 처음이자 마지막 프로 홈런이 됐다. 이는 2008년 프로 데뷔 뒤 3838일 만에 터뜨린 홈런이기도 했다. 대주자 전문이던 그에게 주어진 131경기 447타석에서 허락된 단 한 번의 ‘한 방’이었던 셈이다. 그는 2020년 은퇴 뒤 현재 두산 코치로 있다.
광고
물론 프로 첫 타석 홈런을 밑천으로 날개를 활짝 편 선수도 몇몇 있다. 신인으로 1998년 개막전 때 2회 축포를 쏘아 올린 조경환은 통산 131개 홈런을 기록했다. 데뷔 때부터 ‘마법사 군단’의 든든한 기둥이 된 고졸 신인 강백호도 해마다 두 자릿수 이상의 홈런을 때려내고 있다. 그 또한 프로 데뷔전(개막전)에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김웅빈은 2021년 키움의 내야를 지키면서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큰 것’만 노리는 시대다. ‘인생 한 방’을 노리며 이전에는 부동산 갭투자를 했고, 지금은 암호화폐에 몰입한다. 한번에 수십억원을 벌었다거나 수백억원의 수익을 내서 당당하게 퇴사했다는 풍문도 여기저기 떠돈다. 상대적 박탈감에 ‘벼락거지’가 됐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진짜 ‘인생은 한 방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KBO리그 40년 홈런 역사를 돌아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사실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 그 한 방을 위한 노력과 그 뒤의 지구력에 달린 게 아닐까. 아직 한 방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말 이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김양희 <한겨레> 스포츠팀장이 올림픽 취재 준비를 위해 ‘인생 뭐, 야구’ 칼럼을 잠시 쉽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봐요~.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산청 산불 잡던 대원 2명 숨진 채 발견…건조·강풍에 진화 난항
경남 산청 산불 진화대원 2명 사망…2명은 실종
풀려난 김성훈에 놀란 시민사회 “법원이 내준 영장 막았는데…”
나경원 “이재명이 대통령 되면 뼈도 못 추릴 만큼 나라 망해”
산림청,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심각’ 발령
“마지막 집회이길…” 탄핵소추 100일 앞둔 시민들 헌재 향한 호소
‘KO 머신’ 전설의 헤비급 복서 조지 포먼 타계
한동훈 얼굴 깔고 ‘밟아밟아존’…국힘도 못 믿겠단 윤 지지자들
국힘 장동혁 “윤 탄핵 물 건너가…계엄은 반국가세력 맞선 시대적 명령”
민주노총, 정년 연장 추진 공식화…“퇴직 후 재고용 절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