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웹툰을 만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해 제작되는 드라마 중 4분의 1이 웹툰을 원작으로 하며, 초반 소재와 기획이 눈길을 끈다 싶으면 독자들은 이 웹툰이 방송사로 갈지 영화로 만들어져야 할지를 논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애초부터 드라마나 영화처럼 기획되는 많은 작품은 그림이 있는 스토리텔링일 뿐 정서적으로나 생산방식으로나 만화와 공통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 해 2700편이 새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창작생태계 웹툰은 곧 장르가 아니라 산업을 이르는 말이 되지 않을까.
웹툰 산업 속에서도 우리가 기억하던 만화다움, 새로운 더듬이로 작가 개인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찾아본다. 검색어는 청춘, 여성, 문제작이다.
나무위키에서 웹툰 <지옥>(연상호, 최규석 작가, 네이버 웹툰)에 대한 평가란엔 “보는 사람만 보는 웹툰”이라고 적혀 있다. 그도 그럴 게 <부산행> 연상호 감독과 <송곳> 최규석 작가는 그야말로 출구가 없는 아포칼립스를 그려내고 있다.
서울 길거리 한복판에 갑자기 저승사자들이 나타나 한 남자를 갈가리 찢어서 불에 태워 죽인다. 그동안 저승사자들이 죽음을 예고, 집행하고 있다는 인터넷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거대한 천사의 얼굴이 나타나 너는 몇 월 며칠에 죽게 된다고 ‘고지’하면, 고지받은 사람이 어디 있든 어김없이 그 시간에 그를 찾아내 저승사자들이 죽음을 ‘시연’한다.
테드 창의 유명한 단편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있다. 이 소설에선 천사가 수시로 지구에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사람이 죽거나 반대로 병을 고치는 기적 체험을 하게 된다.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 누가 은총을 입고 누가 지옥에 가는가? 신과 천사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당하는 것은 그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신의 저주라고 생각한다.
웹툰 <지옥>에서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신의 뜻을 어긴 죄인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라는 가설이 세워지고 고지받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몰리고 그들을 돕는 사람은 처단당한다. 이 종교단체의 이름이 화살촉인 것은 우연일까? 우리는 끔찍한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나쁜 놈인지를 묻기에 바쁘다. “화살촉처럼 날아가서 그 사람에게 박히려고” 하는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낸 <지옥>을 다시 읽게 된다. <지옥>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된다.
마영신 작가의 <아티스트>(다음 웹툰, 완결)도 다시 읽어볼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성공해도 우리는 절대 변하지 말자”던 소설가 신득녕, 화가 곽경수, 음악가 천종섭 등 방구석 아티스트 삼총사는 이름이 조금 알려지자마자 경쟁적으로 서로를 배신한다. 예술가들의 넘치는 자의식과 찌질한 수컷의 다툼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는 그렇다 쳐도 명예와 자리다툼으로 살벌한 만화 속 에피소드조차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영신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에피소드와 캐릭터들은 자신의 모습을 포함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합친 것이라고 했는데 권력 다툼 속에 성추행 사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진위가 궁금해진다.
대중문화에서 여성 서사는 미투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대표적으로 5~6년 전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보면 그땐 방송에서 여자를 저렇게 묘사하고 소비할 수 있었구나 하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러나 웹툰은 여전히 싸움에서 이긴 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트로피주의자들과 전투적인 여성 서사가 공존하는 모순과 논쟁의 도가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미리 기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흐름은 뚜렷하다.
조선의 여성 국극단을 소재로 한 <정년이>(서이레, 니몬 작가, 네이버 웹툰)나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남고 생태계를 여고 버전으로 바꾸어놓은 <이대로 멈출 순 없다>(자룡, 골왕 작가, 다음 웹툰)처럼 그 최전선에 있는 만화가 있는가 하면, <재혼황후>(글 알파타르트, 그림 숨풀, 네이버 웹툰), <하렘의 남자들>(글 알파타르트, 히어리, 그림 영빈, 네이버 웹툰)처럼 로맨스물에서 전형적인 남녀 구조를 뒤바꾸려 하는 웹툰이 있다. 시집살이를 그린 여성 생활형 웹툰 <며느라기>(신지수)는 연재처를 찾지 못해 작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연재했다가 60만 팔로어를 얻고 카카오티브이에서 드라마로 방영 중이다.
여성 서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네온비다. 다음에서 스토리작가로서 <지옥 사원>(그림 캐러멜, 다음 웹툰)과 <미완결>(그림 안나래, 다음 웹툰) 두 편을 동시 연재하는 작가는 여성이 서사를 쓸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악마가 사고로 인간 몸에 들어간다는 판타지 드라마 <지옥 사원>은 한 대기업 식품회사를 배경으로 한다. 경쟁에 혈안이 된 한국 대기업은 지옥에서 온 악마의 눈에도 기이하게 보인다. 게다가 여자들은 이 지옥도의 맨 아래쪽에 있기 십상이다. 정선호 이사는 회장 딸이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손발이 묶인다. 300명 임원 중 단 4명이 여성인 회사에서 일찌감치 여성들은 꿈을 거세당한다. 회사라는 현세 지옥에서도 라인을 만들어 살 궁리를 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혼자서 달려야 하지만 절대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네온비 주인공의 특징이다.
두 명의 여성 작가가 만드는 19금 성인물 <미완결>에서는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천재적인 스릴러 여자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소설가를 동경하는 잡지사 기자 원유진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밝고 다정한 성품이다. 묘한 것은 극이 진행될수록 독자들이 착한 여자뿐 아니라 악역의 매력에도 빠진다는 점이다. 일찍이 한국 만화에 이렇듯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여자 예술가 캐릭터가 있었던가.
학원물 홍수 속에 이은재 작가의 <셧업앤댄스>(다음 웹툰)와 수박양 작가의 <아홉수 우리들>(네이버 웹툰)을 보는 것은 오아시스에 견줄 만한 즐거움이다.
<셧업앤댄스>는 다음 공모전에서 좀비물인 <1호선>으로 등단한 뒤 줄곧 다음에서 <텐> <원> 등을 그렸던 이은재 작가가 처음으로 네이버에서 그린 작품이다.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던 서원준은 오디션에 실패하고 보통 학생으로 학교에 돌아온다. 거절 못하는 성격 탓에 어쩌다보니 에어로빅 동아리 주장을 맡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셧업앤댄스>를 보다보면 넘쳐나는 학원물에서 매일같이 중계되는 학교 일짱들의 격투 장면은 평면적이었지 싶다. <셧업앤댄스> 인물들은 까딱까딱, 척척, 타다닥 같은 옛날 만화에 나오는 의태어, 의성어와 함께 바쁘게 움직인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치는 데 선수가 된 윤상, 래퍼가 되고 싶지만 엄마의 소원 때문에 입 닫고 사는 정재형, 아빠의 폭력에서 엄마와 동생을 보호하고 싶은 조규찬 등은 웅크리고 있다가도 자신을 둘러싼 껍질에 부딪히곤 하는데 그 심리적 동선이 가만히 멎었다 다시 움직이는 한국 춤을 보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텐> <원> 같은 극단적인 학교폭력을 소재로 하는 만화에서조차 작가의 관심은 승부가 아니라 꺼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청춘들에게 가 있었다. 어쩌면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긴 철길을 따라가는 <1호선>부터가 청춘물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아홉수 우리들>은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의 끝자락을 지나는 세 여자의 이야기다. 봉우리, 차우리, 김우리 이름도 같은 세 친구는 29살을 맞아 아홉수에 단단히 걸렸다. 서른이 되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진로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그나마 20대를 바친 남자친구는 떠나버린다. 늘 명문대 출신 가족들의 무게에 눌려 살았는데 여전히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 취급을 받아야 하는 김우리든 철없는 엄마와 남동생 수발이 끝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 누나 팔자인 ‘케이-장녀’ 차우리든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지도 모르지. 그러나 청춘물의 아름다움은 무언가의 성취에 있지 않고 누구나 갖고 있을 불안과 고민을 기꺼이 끌어안는 태도에 있다. <아홉수 우리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가끔은 손을 놓치기도 하면서 어른 세계로 가는 깜깜한 터널을 지난다. 그곳을 지나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말을 읊조리면서.
남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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