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의 최고 학부는 1929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경성제대를 그저 서울대의 전신쯤으로 생각하면 오해가 생길지 모른다. 경성제대는 비록 서울에 있었지만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철저하게 일본인이 주체가 되어 운영됐다. 조선인 학생은 기껏해야 정원의 3분의 1 정도였다. 인구 비례를 생각할 때 턱없이 적은 수였다. 더욱이 조교수 이상 전임교원에 오른 조선인은 20년 역사에서 의학부의 윤일선 오직 한 명뿐이었다.
법문학부 제2회 졸업생으로 경성제대 조수까지 한 이강국은 “젊은 학도가 그 동경의 대상인 상아탑으로부터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추방되었을 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의 모순 그리고 그 해결의 필요였다”는 회고를 남겼다. 조선인은 제국 아카데미즘의 대상일 뿐 그 주체일 수는 없었다.
조선인들은 식민기 내내 사립전문학교를 운영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들 전문학교가 학문 재생산의 거점은 될 수 없었다. 예컨대,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1930년대 중반 조선인 교수진을 살펴보면 대부분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 경성제대를 제외하고는 식민지 조선에 ‘대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어찌됐건 조선 내에서 학자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조선과 한글을 알자’는 목소리시간이 지나면서 각 전문학교의 졸업생 가운데 외국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아 모교 교수가 되는 이가 꽤 나왔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 박사를 딴 뒤 돌아와 교수가 되는 경로와 흡사하다. 후일 유진오는 당시를 가리켜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나 구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라야 훌륭한 것으로 아는 풍조가 심했다”고 회고했는데, 그저 옛날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다.
1930년대 중반 터져나온 ‘조선을 알자’는 목소리는 일본이나 서구 학문의 모방을 넘어서는 주체적인 아카데미즘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조선학 운동’이 있었다. 계기가 된 것은 1934년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 기념사업이었다. 예컨대 신조선사에서 펴낸 는 오늘날 우리가 정약용을 기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조선어·예술성·합리정신을 지키는 공동전선한글운동 또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는 등 하나의 정점을 맞게 된다. 잡지 는 1936년 6월호에 게재된 ‘문예정책회의’에서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파시즘 대두에 대항해 유럽에서 잇달아 개최된 ‘지적협력국제회의’ 등을 의식하면서 열린 좌담에선, 한글에 대한 흥미가 감퇴한 원인으로 ‘사회 정세가 변함에 따라 저절로 실용어·공용어에 끌려가는 점’을 들었다. ‘한글의 장래를 위한 대책’도 논의됐다. ‘실용어·공용어’는 물론 일본어를 가리킨다.
사회주의자도 조선 연구에 힘을 보탰다. 1933년 를 발간하고 다산기념사업에 참가한 백남운이 대표적 예이다. 조선 연구는 식민지라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극복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반제국주의 과제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민족주의자의 우리 전통과 문화에 대한 관심에 사회주의자가 함께함으로써 아카데미즘에서나마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된 셈이다. 이는 세계적인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1936년 1월1일치 에는 백낙준의 ‘학술조선의 총본영, 조선문고를 세우자’는 기사와 백남운의 ‘학술기간부대의 양성, 중앙아카데미 창설’이라는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두 사람 모두 연희전문의 교수였다. 백남운은 전문학교, 학회, 신문사 등에 산재한 조선인의 학술 역량을 결집할 중심을 구성하려 했다. 민족국가의 뒷받침이 없는 식민지 상황을 민간 역량의 결집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노력은 해방 직후 신속하게 조선학술원이 수립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이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신문사나 잡지사가 학술 역량의 한 축을 이룬 것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조선 연구가 꽃을 피운 1930년대는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발흥기’로 일컫는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즈음부터 총독부의 탄압은 심해졌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강연회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제됨에 따라 우리말로 된 학문은 설 자리가 좁아져만 갔다. 1938년 ‘연희전문 적화 사건’은 아카데미즘 탄압을 상징한다. 이 사건으로 연희전문 상과의 이순탁, 노동규, 백남운 세 교수가 투옥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해직교수가 된 것이다. 1970∼8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문과 말살, 그 지독한 기시감그럼에도 지식인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좌익 문화단체 카프(KAPF) 서기장을 맡기도 했던 임화는 1930년대 중반 조선 연구를 ‘이식성과 국제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재평가하고, 스스로 세운 출판사에서 ‘조선문고’를 기획해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정리하는 데 힘썼다. 해방 뒤 임화는 당시를 돌이키며 “조선인 사이에 ‘조선어’ ‘예술성’ ‘합리정신’을 지키기 위한 ‘공동전선’이 존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임화가 말한 ‘공동전선’의 무대가 된 것은 경성제대 영문과 출신 비평가 최재서가 꾸린 잡지 이었다.
1939년 10월 창간호에선 T. S. 엘리엇이 이끈 잡지 (Criterion)을 언급하고 있다. 1939년 1월 폐간은 유럽에서 문화옹호·인민전선의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최재서는 “ 폐간을 ‘문학적 표준의 붕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문학의 건설적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1940년 들어 창씨개명이 강요되고 우리말 신문 와 도 폐간을 당했다. 우리 이름을 달고 친일하는 이가 적지 않았고, 우리말 신문 또한 이미 이렇다 할 저항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총독부는 ‘조선’이라는 표식 자체를 지우려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은 짙어가는 시대의 어둠을 상징한다. 조선어 연구 자체가 식민 지배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나아가 1944년에는 이 땅의 학문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총독부에 의한 ‘학원 전시비상조치’다. ‘국가의 요청에 부응하여 문과계를 축소하고 이과계를 확충’한 결과 경성제대 및 각 전문학교의 정원이 조정된 것은 물론 연희전문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보성전문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간판까지 바꿔 걸게 된다. 이과계 교육의 ‘획기적 대확충’을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명문 사학으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굴욕의 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대목에서 심한 기시감을 느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선 교육부 주도로 대학 정원에서 문과를 줄이고 이과를 늘리는 ‘프라임 사업’(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단군 이래 최대 대학 개혁 사업이라는 말을 듣지만, 학교 이름까지 갈아버린 총독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흔히 식민 말기를 암흑기로 비유하는데, 인문학 부재가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으리라. 연희전문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그리고 문과 말살을 밀어붙인 일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해방과 동시에 경성제대는 국립서울대학교로 다시 태어났고, 힘겹게 버텨온 전문학교들은 우리 사회의 예지를 모아 번듯한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신태환은 해방과 동시에 대학에서 우리말과 우리글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을 놓고,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나라치고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를 자랑하기에 앞서 그렇게 되기까지 무던히 애쓴 수많은 이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대학에서 세계의 ‘실용어·공용어’인 영어의 기세에 눌려 우리말과 우리 학문이 처해 있는 초라한 상황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무엇을 축적할 것인가이라는 책이 화제다. 과학기술에 초점을 맞춰 어떻게 축적이 가능할지를 논한 역작이다. 인문학 입장에서 조금 거든다면 왜 축적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쌓아야 하는지도 같이 묻고 싶다. 경성제대의 실험실에서 얻은 성과는 과연 축적이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인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축적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학문적 고투에 대한 음미가 글로벌 사회에서 우리 주변을 건전한 공동체로 가꾸려는 노력에 작은 도움이 되길 빌 뿐이다.
홍종욱 교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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