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진성여왕의 몰락
② 나라이름 ‘대한민국’과 동북공정
③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
④ 영웅이 아니라 나라가 이겼다
⑤ 누가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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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 천수를 누리다가 죽기 원한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다. 매우 억울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 왕조의 최고 지배자로서 시해당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신라에도 비운의 주인공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제36대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정사를 잘 돌보지 않아 살해됐다고 사서에서 언급돼 후세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동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왕의 죽음보다 혜공왕 시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신라 역사가 중대(中代)에서 혼란기인 하대(下代)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혜공왕은 780년에 누군가에 의해 시해됐다. 사서에 따라 그를 시해한 인물이 달리 나온다. 에서는 김지정 일파가, 에서는 김양상(선덕왕) 일파가 혜공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됐다. 도대체 누가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혜공왕을 시해한 진범을 찾아서 과거 1200여 년 전의 신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던 왕혜공왕의 본래 이름은 건운(乾運)이다. 그는 제 35대 경덕왕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765년 6월 경덕왕이 사망했다. 그때 겨우 건운의 나이 8살이었다. 나라를 다스리기에 매우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에서는 태후의 섭정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에 따르면, “태자가 8세에 왕이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으나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라고 전한다. 의 글쓴이는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진 이유를 태후가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한 탓으로 돌린 것이다.
반면 에서는 “(혜공)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다니며 노는 데에 절도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하였다”라고 했다. 마치 혜공왕의 실정(失政)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처럼 서술한 것이다. 의 찬자는 태후의 섭정에 대한 잘못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혜공왕이 무절제한 향락을 즐겨 결국 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인식한 것이다.
사서에 혜공왕이 무절제하게 생활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실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곤란하다. 다만 에서 “어린 왕(혜공왕)은 본래 여자로 태어날 운명이었으나 남자로 태어났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였다”라고 기록돼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 젠더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언급한 점이 주목을 끈다.
오늘날 의료기술의 발달로 성전환 수술이 그리 어렵지 않다. 트랜스젠더에 점차 관대해지는 분위기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성전환 수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생물학적 성과 반대의 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혜공왕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김지정 일파가 진범?혜공왕이 여성 젠더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설화가 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본래 경덕왕은 딸만 낳을 운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상제(上帝)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상제께서 딸을 아들로 바꿔줄 수는 있으나,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인데 그래도 좋으냐고 묻자, 경덕왕이 그래도 좋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혜공왕이 여성 젠더 정체성을 지녔고 마침 혜공왕대에 나라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화를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혜공왕대에 ‘96각간의 난’을 비롯해 자주 반란이 일어나 정치가 어지러웠다. 마침내 혜공왕마저 780년(혜공왕 16년) 2월에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의 와중에 시해됐다. 그러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김양상(선덕왕)이 혜공왕 사후에 왕위를 계승했다. 일차로 그가 보위를 차지하려고 혜공왕을 시해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양상의 말과 행동을 보면, 과연 그가 보위를 차지하려고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김양상은 재위한 지 6년 만인 785년 정월에 사망했는데 그 직전에 유조(遺詔)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과인은 재주와 덕이 없어 왕위에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함을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전왕을 시해한 사람을 기꺼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784년 4월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다가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같은 김양상의 말과 행동은 그를 보위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야심가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증거다.
깊었던 여성 차별 의식김지정은 780년 2월 “혜공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고, 장성하여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다니며 노는 데에 절도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해졌다”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혜공왕을 제거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구국의 일념으로 거사를 일으켰다고 표방했음이 분명하다. 여기다가 혜공왕 측근들이 그에게 동조했다고 사료에 전한다. 물론 측근에는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등이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듯싶다.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자, 혜공왕 측근들이 왕을 시해하고 거기에 동조했다. 왕이 시해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상이 이에 분개해 김경신 등과 힘을 합쳐 임금을 시해한 반란군을 척결했다.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들이 반란군에 동조해 왕위를 계승할 마땅한 후보가 없자, 성덕왕의 외손인 김양상을 나라 사람들이 왕위에 추대했다.
하나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역사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김양상이 보위에 크게 욕심내지 않았고, 재위시에 왕위를 양보하려고 한 점, 김지정의 반란에 혜공왕 측근들이 깊이 개입했고, 반란 평정 뒤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보자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김지정 일파가 혜공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의 시나리오가 결코 사실을 크게 왜곡했던 것은 아닐 듯싶다.
에서 혜공왕대의 정치적 혼란이 단지 혜공왕의 실정에만 기인했다고 언급했으나, 에서는 태후의 섭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혜공왕이 트랜스젠더여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기술해 주목을 끈다.
옛날에 당나라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너희 나라(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라고 조롱했다. 당시 신라는 선덕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당 태종은 여자가 나라를 다스려 신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김부식은 에서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서술했다.
를 지은 일연은 남존여비 사상의 편견을 가지고 태후나 여성 젠더 정체성을 지닌 혜공왕의 ‘나약함’이 결과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어지럽게 만든 동인(動因)이라고 인식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일연뿐만 아니라 당 태종과 김부식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전통시대에 널리 퍼진 여왕 또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맥락이 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고대사회에서 군주 개인의 정치적 역량이 때로는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군주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연약한 성격을 가진 경우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사례가 적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군주가 여자이기 때문에, 또는 여성 젠더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인식하는 것은 지나친 성에 대한 편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들이 외면한, 나라가 망한 진짜 이유혜공왕대의 정치적 혼란은 태후가 섭정했기 때문에, 또는 혜공왕처럼 여성 젠더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축적된 사회·경제적 모순, 지배층 전반의 무절제하고 과도한 사적인 지배 기반의 확대, 공정한 수취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 그리고 민초를 괴롭히는 각종 자연재해와 과도한 수취, 지배층의 반목과 대립, 군주의 무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야기된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전덕재 단국대 교수·사학※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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