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찬욱 감독의 가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동안 경쟁부문과 인연이 없었던 한국 영화계로서는 4년 만의 희소식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만은 쉽지 않다. 박찬욱 감독은 최근 과의 인터뷰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우려를 표하며 “해외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인들과 헤어질 때 ‘조만간 부산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는데, 이제 그런 인사를 다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부산시가 한국 영화인들을 국제 미아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박찬욱 감독은 부산시가 신규 위촉 자문위원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그 효력을 잃어버린 부산영화제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필자 또한 그와 함께 자문위원이다. 하지만 칸국제영화제에서 (2003)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대표적 감독 중 하나인 박찬욱이나, 부산영화제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방문해 매일 밤을 새우면서 공식 데일리를 발행해온 의 편집장인 나나 졸지에 ‘무자격자’가 됐다. 서병수 부산시장에 따르면 우리 둘을 포함한 68인의 자문위원은 “영화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는 수도권 영화인들”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영화인들’이라 자격 박탈?사연은 이렇다. 지난 2월25일 열린 부산영화제 정기총회에서 영화단체연대회의 등 106명의 총회 회원은,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는 정관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총회 소집요구서’를 서병수 부산시장 겸 조직위원장에게 직접 제출했다. 영화제 정상화를 위해서는 정관 개정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날 신규 자문위원 68명은 정관에 명시된 이용관·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의 권한으로 위촉돼, 임시총회 요구에 참여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3월14일 부산지법에 영화제에 신규로 위촉된 68명의 자문위원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4월11일 신규 자문위원에 대한 효력정지 판단을 내렸다. 그때 필자가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받은 ‘자문위원 위촉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으로 인한 심문기일 통지서에는, 우리 68인의 자문위원들이 채무자로 등록돼 있었다. 더 기분이 나쁜 건 개인정보라고 할 만한 인적사항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졸지에 하정우, 유지태, 방은진, 박찬욱, 류승완, 최동훈 감독 등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원래 절차가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심히 불쾌했다. 사실 규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훼방’이 목적이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생각해보자. 박찬욱 감독의 경우,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든 강연자로든,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세계 영화계의 ‘거물’이다. 그를 섭외했다고 칭찬받아야 마땅한 영화제 집행위원, 프로그래머들을 포함해 이들 자문위원을 동시에 법원으로 불러들이려 하다니,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일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해온, 오랜 시간 입 밖으로 꺼내 발음할 일조차 없었던 ‘검열’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시도 때도 없이 ‘국격’을 외쳐온, 바로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서병수 부산시장의 집착증왜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느냐 하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2014년 부산영화제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이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상영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작품 선정은 프로그래머들의 고유 권한’이라며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영화제와 별다른 갈등도 없던 서병수 시장이 왜 그랬는지는 뻔하다. 바로 ‘친박’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부산시는 이용관 위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했고, 영화진흥위원회 또한 영화제 지원 예산을 무려 40%나 삭감했다. 이후 7월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이 선출되면서 사태는 적당히 봉합되는 듯했으나 감사원은 부산시에 정부 지원금 실태 감사 결과를 통보했다.
급기야 12월 부산시는 감사원 권고로 이용관 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올해 초 이용관 집행위원장 재신임 불가 입장을 전하며 사실상 해촉했다.
지난 2월에는 서병수 부산시장이 ‘무늬만’ 조직위원장 사퇴 의사를 밝혔고, 앞서 얘기한 대로 신규 자문위원에게 효력정지 가처분 심문기일 통지서를 발송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본 사람 별로 없는 이 졸지에 전 국민이 아는 작품이 됐다. 그 또한 부산영화제의 힘인 걸까.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올해 가을에는 영화기자 일을 시작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부산에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인들의 최후통첩에 부산시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4월18일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부산시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계속 부정한다면 영화인들은 올해 부산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는 성명을 낭독했다. 작품 출품은 물론 행사 참여를 전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비대위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여성영화인모임, 영화마케팅사협회 등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9개 단체로 구성됐는데, 4월1일부터 각 단체별 회원들에게 보이콧 찬반 여부를 묻는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과반수의 응답자 중 90% 이상이 찬성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부산시는 이후 4월20일 서울에서 부산시 김규옥 경제부시장 참석하에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아니, 영화인들을 만나야지 왜 기자들을 만난단 말인가. 부산시는 이 자리에서 ‘억울하다’는 읍소와 더불어 ‘예정대로 영화제는 열 것’이라는 황당한 얘기만 했다. ‘보이콧’의 단어 뜻을 모르는 것일까. 이에 대해 조종국 편집위원은 “자칫하면 동네 조기축구회 불러서 월드컵 개최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산시, 영화제 기간에 ‘한류 축제’ 계획도박찬욱 감독 또한 영화제 보이콧을 결의한 한국영화감독조합 소속이다. 그래서 어쩌면 올해 가을 ‘비프 빌리지’라 불리는 부산영화제의 해운대 야외무대에서 박찬욱 감독과 배우 하정우, 김민희, 조진웅이 참가하는 무대 인사를 못 볼지도 모르겠다. 칸의 레드카펫을 밟은 그들이 정작 부산의 레드카펫을 밟지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또한 비프 빌리지를 가득 채우는 인파는 상당수 중국과 일본에서 온 영화팬들이다. 이제 ‘영화’라는 이름으로 영화인들은 물론 관광객도 부산을 찾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 또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돈벌이가 안 돼서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미움 받는 고고한 예술 축제는 봤어도, 돈 되는 흥행 축제를 마다하는 지자체는 처음 본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부산시의 행태는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바로 올해부터 ‘부산 원-아시아(One-Asia) 페스티벌’이라는 한류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 10월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되는데, 이는 부산영화제가 그보다 앞서 발표한 영화제 기간(10월6일부터 15일까지)과 딱 겹친다. 이미 홈페이지도 만들었고 홍보대사로는 씨엔블루의 정용화가 임명됐다. 딱 봐도 보복성 행사다. 말하자면 이 ‘양다리’야말로 친박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배신의 정치’ 아닌가.
다만 새누리당 출신 서병수 시장의 ‘수도권 영화인들이 부산 시민의 행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보이스피싱에 가까운 주장이 딱히 부산 시민들에게 먹혀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총선에서 부산 선거구 18곳 중 5명의 야권 주자가 국회에 대거 입성하며 1990년 YS의 3당 합당 이래 부산에서의 새누리당 독점 구도가 화끈하게 깨졌기 때문이다.
총선에서 드러난 부산 시민들의 은근한 ‘반새누리’ 정서에 최근 부산영화제를 둘러싼 일련의 잡음이 실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명쾌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태 이후 2년 가까이 이 사안을 지켜봐온, 더구나 아직은 서울에서 산 기간보다 고향 부산에서 살았던 기간이 더 긴 부산 사람이기도 한 필자가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부산 사투리 중에 ‘상그럽다’는 말이 있다. 뭔가 성가시고 불편하고 귀찮은 느낌, 멀쩡한 걸 괜히 손대서 덧나게 하는 그런 느낌쯤 될 것이다. 부산 시민이 볼 때 이유야 어떻든 서병수 부산시장이 딱 그처럼 부산의 공기를 상그럽게, 괜히 시끄럽게 만든 사람이다.
두 번째,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관계자들에게는 다소 미안한 얘기지만, 부산은 ‘부산=영화제’라는 등식이 아주 탄탄하게 자리잡힌 곳이다. 이런저런 내홍을 겪으며 버텨온 전주나 부천과 달리 부산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성공가도만 달려온 영화제다. ‘부산’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제’가 떠오른다. 부산을 대표하는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만큼이나 부산영화제 또한 부산 시민들의 자부심이다. 부산영화제를 중단시키는 것은 사직야구장에서 야구를 못 보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그래서 부산영화제가 국내외 언론에 수시로 오르내리며 지적당하는 모습은 부산 시민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영화제 독립성 보장해야지금이라도 부산시는 부산영화제의 시계를 되돌려야 한다. 서병수 시장은 조직위원장 사퇴 실행과 더불어 부산영화제의 자율성·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관 개정에 전향적 자세로 나서야 마땅하다. 일련의 사태에 대한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도 이행해야 한다. 5월에 열리는 칸국제영화제의 멋진 포스터를 보면서, 정작 포스터 디자인이든 게스트 섭외든 아무런 진도도 나가지 못하는 부산영화제의 현재가 너무나도 슬프다. 부산시는 얼마나 더 바닥을 드러내야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될 것인가.
주성철 편집장※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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