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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여성 캐릭터의 빛나는 후예, 욱다정

‘영애씨’의 생명력+‘미스 김’의 정의+90년대 ‘올드미스’들의 자부심
등록 2016-04-09 16:35 수정 2020-05-03 04:28

낙원종합인쇄사 디자이너 이영애씨는 최근 사표를 썼다. 새로 부임한 사장의 ‘희망퇴직’ 강요에 분노하며 내린 결정이다. 함께 퇴직당한 동료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영애 디자인사무소’를 열고 제2의 삶을 개척하고 있다. 대기업 황금화학 마케팅 팀장 욱다정씨도 입사 이후 최단기 승진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부조리한 회사 관행을 보다 못해 끝내 사표를 던졌다.

JTBC 제공

JTBC 제공

모두 드라마 속 상황이다. 앞선 사례는 tvN 시즌14, 후자는 현재 방영 중인 JTBC (사진)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두 사례는 공통적으로 우리 시대 직장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영애(김현숙)의 창업은 네 번의 이직을 거치는 동안 일자리의 질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벼랑 끝 선택지였고, 욱다정(이요원)의 이직은 “최연소 팀장으로 시작했으나 최장기 팀장으로 커리어를 마감할 것만 같은 유리천장”이 결정적 계기였다.

30대 후반 퇴사의 길에 몰린 둘의 모습에서, 서른다섯을 기점으로 연봉과 직위가 정점에 올랐다가 그 이후부터 점차 하락한다는 한국 직장여성의 평균적 삶이 비친다. 비단 두 작품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여성직장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실을 반영하며 변화해왔다. 1990년대 드라마 속 ‘아름다운 프로’였던 여주인공들은 페미니즘의 급부상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한 현실을, 2000년대 중반까지 반짝 인기를 누렸던 ‘칙릿(Chick Lit) 드라마’ 속 자의식 강한 ‘올드미스’들은 1990년대 알파걸의 성장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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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보호법 시행과 더불어 고용불안이 가속화된 2000년대 후반 이후 드라마 속 여성들은 악화된 생존조건이 일상적 풍경으로 내재된 모습을 보인다. 2007년 (MBC)이 남성만을 채용하는 가게에 취업하기 위해 남장을 불사하는 고은찬(윤은혜)의 모습으로 여성의 고용불안을 암시했다면, 2011년 (KBS)는 나이를 속이고 취직하는 ‘노처녀’ 소영(장나라)을 통해 성차별적 고용 조건을 지적했다. 급기야 2012년 (SBS)에서는 계약직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한세경(문근영)이 목표를 ‘취집’으로 수정하며 ‘청담동 며느리 되기’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강하게 진화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3년 (KBS) 주인공 미스 김(김혜수)은 고용불안 시대가 낳은 최고의 슈퍼 히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으로 우선 해고 대상이 된 여성노동자 시위 현장의 비극적 사건 위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을 “대체 가능한 허드렛일”로 폄하하는 사회에서 미스 김은 바로 그 “잡무”를 통해 회사를 구원하며 여성노동을 향한 위계적 시선을 전복했다.

의 욱다정은 “국내 최초 자발적 비정규직”으로서 갑을 구도의 룰브레이커를 자처했던 미스 김의 저항성에, tvN 의 장점까지 끌어안았다. 이 ‘갑’의 횡포나 ‘을’의 설움에 초점을 맞춰온 직장인 드라마가 잊고 있던 가치, 일에 대한 성취감에 주목했듯 욱다정 역시 “자부심”을 중시한다. 그것은 에서 남자 동기들이 성취감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성차별과 싸워야 했던 안영이(강소라)처럼 여성들에게 요원하기에 더욱 절실한 가치다. 갈수록 주눅 들어가는 직장인 여성들에게 ‘영애씨’의 생명력과 미스 김의 정의, 그리고 1990년대 여성 드라마 선배들의 “자부심”까지 종합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욱다정 캐릭터는 지금 가장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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