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피다.
피가 돌지 않는 생명체는 죽고, 이야기가 돌지 않는 산업은 죽는다. 한국 농촌이 이야기의 진원지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일흔이 다 된 농민(백남기·69)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100일 넘게 죽음을 맴돌아도 농업과 농촌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정치와 자본이 버린 농업을 무관심의 감옥에서 꺼내려면 이야기부터 탈옥시켜야 한다. 농업과 농촌의 ‘완벽한 멸절’을 늦추는 길은 먼저 이야기되도록 하는 것이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씨로 뿌려 글로 수확하는 어떤 소설가가 농촌에 있다.
철마산 아래서 ‘망한 농사꾼’
소설가 이시백씨와 그의 지둔리(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집. 밭엔 바짝 마른 옥수숫대가 웅크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이시백(61)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산다. 자동차를 이끌던 4차선 도로가 막다른 골목처럼 뚝 끊기는 곳에 ‘광대울’이 있다. 잔칫날 양반집 마당에서 줄 타다 떨어진 광대가 돈도 못 받고 울며 넘은 고개라고 마을 사람들은 뜻을 풀었다. 끊긴 도로 옆으로 생선 가시처럼 가늘게 달라붙은 비포장길이 광대울 아래로 쑥 꺼진다. 해 떨어지면 택시도 운행을 거부하는 좁은 흙길이 숲을 파고든다. 뱀이 배를 밀듯 울퉁불퉁한 길이 좌우로 구불거리다 상하로 오르내린다. 앞뒤는 밭이고 좌우는 산이다. ‘분명 길을 잃었다’는 확신으로 내비게이션을 후려칠 때쯤 철마산(남양주시 진접읍·진건면·수동면을 흐르는 해발 786.8m 높이의 산) 자락 밑에 웅크린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완전히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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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사자머리의 소설가가 바짝 마른 옥수숫대를 가리켰다. 지난 몇 년간 꽁지를 휘날리던 그의 머리카락은 절반의 길이로 잘린 뒤 곱슬로 꼬여 사방으로 산개했다. 그는 1997년 축령산(남양주시 수동면과 가평군 경계에 걸친 산) 아래 불당골 빈 농가로 가족을 이끌고 들어왔다. 어린 아들(당시 초등학교 4학년)은 이사 트럭에 앉아 울었다. 수도가 없어 우물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받고, 겨울이면 화장실이 얼어 장작을 태워 녹였다. 2년 만에 지둔리에 밭을 사 소박한 집을 지었다. 인가는 그의 집 한 채뿐이었다.
사람 손 안 탄 지 오래된 밭은 산에서 내려온 칡넝쿨이 점령하고 있었다. 바퀴 달린 농기계를 들일 수 없는 비탈진 땅이었다. 670평 돌밭을 삽질로만 일구다 이시백은 “무릎이 다 나가”버렸다. 고구마를 심었더니 멧돼지가 내려와 파먹었다. 집 아래 갈대밭이 ‘멧돼지 목욕탕’이었다. 콩을 심었더니 날것들이 내려앉아 쪼아먹었다. 집 뒤의 산은 꿩들의 서식지였다. 짐승들도 매워 먹지 않는 고추 농사를 오래 지었다. 삽질이 힘든 나이가 되면서 지난해 경운기가 진입하도록 비탈을 깎았다. 옥수수를 심었더니 깎인 땅에서 돌들이 튀어나왔다. 16년을 골라낸 돌멩이가 새싹 돋듯 밭을 잠식했다.
나와 그는 두 차례 통성명했다. 2000년 나는 옛 기획예산처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집회를 취재했다. 경기도 구리·남양주지회 조끼를 입은 그는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그 ‘이력’을 빌미로 그에게 말을 붙였다.
2013년 김종철 발행인과의 모임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첫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떨궜다. 13년 전엔 허리를 꺾었었다. 그는 나의 중학교 2학년(1986년) 담임교사였다. 두 살 터울인 나의 형은 초임 시절 그의 반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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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기 선생님’이었다. 입담 좋고, 스스럼없이 대하며, 열심히 가르치는 그를 학생들은 좋아했다. 그의 반은 공부는 꼴찌여도 체육대회는 1등이었다. 초·중·고 12년 동안 휴일에 교사와 시골길을 걷고 강가 자갈밭에서 밥을 지어 먹은 경험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날 그는 학생들을 밀어 물에 빠뜨렸고, 학생들은 그를 들어 물에 던져넣었다.
졸업 뒤 나는 학교를 찾아가지 않았다. 얼굴도 몰라볼 만큼 시간이 흘러 만났을 때(2000년) 그는 전교조 구리·남양주 지회장을 역임(1999년)한 뒤였다. 그는 전교조 해직 사태(1989년) 직후 비조합원으로서 “해직 교사들한테 후원금 갖다주다 물이 들었다”. 교육운동에 눈뜬 뒤 학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내 반 학생들만 열정을 다해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도 내가 배웠던 군대식 경쟁교육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는 수도권 변두리의 종교계 사립재단이었다. 그는 학교 교사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교사들의 의견을 모아 보충수업을 거부했다. 교장을 불러 청문회를 열었고 학생인권도 주장했다. 학교는 공립학교로 교사들을 전근시킬 때 껄끄러운 그를 ‘방출’(1995년)했다. 입시교육에 환멸을 느낀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옮겨다니다 2008년 전업작가(1988년 등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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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씨가 최근 펴낸 소설집 <응달 너구리>는 농촌과 한국 사회의 첨예한 현안들을 품고 있다.
그가 최근 소설집 (한겨레출판)를 펴냈다. 는 농촌 소설이다. (2008년)와 (2010년)에 이어 농촌에 집중한 세 번째 작품집이다. 걸쭉한 입말과 찐득한 사투리, 토속적 관용어, 풍부한 이야기성은 그에게 ‘제2의 이문구’란 평가를 안겼다.
그는 현재 농촌에 살면서 농업과 농민의 이야기를 꾸준히 생산하는 한국 문단의 거의 유일한 작가다. 이시백은 11개의 단편들마다 농촌과 한국 사회의 첨예한 현안들을 예외 없이 박아넣었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을 날린다.
이장 선거(‘잔설’)에 출마한 진철은 공약한다. “(이장으로 뽑아주시면) 4대강이건 대통령이건 동네분들 허락 이는 흙 한 삽도 못 퍼담게 할 터이니 염려들 놓으시구유. 뭣보담두 이서 꼬꼬치킨 뒷방에 모여 앉아 쑤군거리는 게 아니라, 대소사를 하나하나 말끔허니 털어놓고 소통하겄시유.”
경쟁자 옥근의 정견 발표는 섬뜩하다. “마을의 공공 안녕을 최우선으루다 지켜내어, 사상적으루다가 거시기헌 것들을 싸그리 뿌리째 뽑아내는 디 미력을 다허겠구만유.”
춘식(‘개도둑’)의 분노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이중성 앞에서 폭발한다. “말끝마다 북쪽에다 폭격허라구 악쓰는 것들치구 군대 갔다 온 것들 드물다는 소리두 못 들어봤댜? …막상 전쟁 나믄 젤 먼저 노스웨스트 비행기 잡아타구 미국 나가서 는 집 자식들끼리 대가리 터지두룩 싸우는 거 텔레비전으루 들이다보믄서 ‘쥑여라 쥑여라’ 손뼉칠 것들인 줄 안즉두 몰러?”
4대강(‘잔설’ ‘번지 없는 주막’)과 종북몰이(‘맨드라미 필 무렵’), 구제역(‘백중’ ‘봄 호랑이’), 천안함(‘개도둑’)과 고공농성(‘열사식당’), 세종시 개발과 땅값(‘잔설’), 무책임한 행정과 상처 난 한국 현대사(‘번지 없는 주막’), 자유무역협정과 농협 문제(‘봄 호랑이’) 등이 소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타고 발화된다.
“‘전원일기’를 쓰고 싶진 않았다. 농촌은 마음의 고향이라고 미화하고 싶지도 않다. 어떤 언론도 현안을 보도할 때 농촌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목숨처럼 취급되는 곳이 농촌 아닌가.”
이시백은 농업과 농촌이 버림받은 현실을 비판하지만 농민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는다. 엔 농민들의 분노가 넘쳐나지만 정치가 주입한 편견들도 그득하다. “내가 농촌 소설을 쓰는 이유는 농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왜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는가’를 탐구하고 싶어서다. 보수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 그룹이 농민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는데 왜 농촌 사람들은 그들 부녀를 대를 이어 지지하나. 정치가 농민들의 처지는 대변하진 않으면서 가닿을 수 없는 욕망만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그 현실을 풍자하고 싶었다.”
호미를 잡고 삽을 들지 않으면 하기 힘든 묘사들이 그의 문장을 채운다. 그의 글쓰기는 “70%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농민들은 어떤 문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보다 뛰어난 구술력을 지녔다. 그들의 스토리텔링에 구조를 입혀 옮겨놓으면 훌륭한 이야기가 됐다.”
단편 ‘구사시옷생’은 농촌 지역 실업계고등학교를 무대로 전개된다. 학교 이름을 ‘유비쿼터스첨단정보고등학교’로 바꾸면서 새로 온 교감은 자신의 ‘시이오 됨’을 강조하며 성과를 독려한다. 상과 3학년 담임 노강욱 선생도 ‘취업 100% 달성’에 매진한다. 결석이 잦지만 외모가 나은 학생들은 ‘나레이터모델’로라도 일을 나가는데 ‘가장 착실한 모범생들’만 취직을 못한다.
“취업을 잘하려면 무조건 자격증”이란 노 선생의 말을 “하느님 말씀처럼 여긴” 학생들이 “불당골 부처바위처럼” 교실을 지킨다. 골재상을 운영하는 지역 동문을 설득해 마지막 미취업자인 반장을 경리로 밀어넣는다. ‘목표 완수’에 흡족해하는 그의 빈 교실로 취업 나간 지 며칠 안 된 반장이 ‘동문 사장’에게 성추행당해 되돌아온다.
“학교도 기업”이라는 교감과 학교 이미지를 고려해 쉬쉬하자는 교무부장에게 노 선생은 욕을 퍼붓는다. “에이, 시부럴놈들아.” 실업계고 재직 시절 이시백이 담임했던 반에서 실제 벌어진 이야기다. 그는 “과거 권위주의가 교육을 지배했다면 지금 학교를 지배하는 시장주의는 더 무섭다”고 했다.
마을 뒤로 뚫리던 도로가 “무슨 강을 살린다고 나랏돈을 쓸어 붓는 통”에 “정작 마을까지 이어질 길목에서 예산이 모자라다고 팽개쳐”진 이야기(‘흙에 살리라’)는 광대울 초입 ‘끊긴 도로’의 사연이다. 그 막다른 길에 “으슥해질 무렵이면 정체 모를 것들이 차를 몰고 와서” 버리고 간 개들이 마을 주위를 떠돌며 들개가 되어가는 과정(‘흙에 살리라’)도 실화다. 그 들개화된 유기견들이 그가 기르던 닭들을 물어갔다.
“이 시절이 기가 막힌다”류우종 기자
이시백은 “반성문을 쓰다 소설가가 됐다”고 했다. 집이 가난했던 그는 “꿈을 잃은 중학생”이었다. 친구들 반성문을 읽을 때마다 “이것도 반성문이냐”며 때리던 교사가 그의 글을 읽고선 “반성문 하난 잘 쓴다”며 매질을 멈췄다. “덜 얻어맞기 위해 더 잘 쓰려고 하다가” 그는 끝내 작가가 됐다.
교육운동을 하면서 글도 바뀌었다. “대학 때 등록금을 못 내 제적된 때가 있었다. 노가다와 구두닦이 등을 전전하다 군 제대 직후 전북 전주 건설 현장의 부모님 함바집에서 일을 거들었다. 그때 광주 학살을 접했다. ‘위험할 수 있으니 피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광주를 언론 보도로 파악했던 내가 진실을 접한 뒤 느꼈던 충격과 부채감이 전교조 활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교육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골방에서 낭만적인 글이나 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과거의 글과 단절했다. 실명을 버리고 필명 ‘이시백’으로 글을 썼다. 밀양 송전탑, 쌍용자동차 사태, 고공농성장, 세월호 등 한국 사회 아픔의 현장마다 작가들을 이끌고 찾아다녔다. ‘리얼리트100’(문학적 연대로 사회적 실천을 모색하는 작가단체)의 대표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느라 지둔리 외딴집에 아내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박범신 선생의 같은 이야기도 좋아한다. 보다 뛰어난 를 쓰고 싶은데 대통령이 가만두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까지 거리로 나가게 만드는 이 시절이 기막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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