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사무실. 간장 종지만 한 정육면체 투명 유리그릇 두 개가 내 앞에 있다. 이유식이다. 두 그릇이래봐야 두 큰술이다. 4등분 한 뒤 입을 작게 벌려 오물거려봤다. 쇠고기는 고소함으로 제 역할에 충실하고, 버섯은 특유의 풍미로 혹시나 있을 비린내를 잡았다. 쌀과 감자는 제 위치에서 매끈하게 재료들을 감싸고, 당근은 그야말로 ‘아빠의 첫 이유식’이라는 듯, 별처럼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유식은 아이의 작은 뱃속이 아니라 내 앞에 있다.
그날 아침, 냉동칸에 이유식이 없다는 사실을 깜빡한 아내는 최초로 내게 이유식 만들기를 의뢰했다. 아침나절, 아이가 잠자기 전 부려놓은 장난감과 빨랫감을 정리하는 등 5분 초고속 노동에서 잠시 벗어나, 내게도 이유식 만드는 셰프 아빠가 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백주부가 아니라도, 이미 에 요리하는 남편은 많다. 지난 아빠모임에 등장했던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 요리 칼럼을 썼던 기자가 두 명이나 된다. 맛 평가 프로그램의 원형이랄 수 있는 ‘맛경찰’을 연재했던 고나무 기자, 아내를 위한 요리로 폭풍 지지를 얻은 송호균 기자가 대표적이다. 특히 송 기자는 육아빠 완전체로 가는 필수 능력치랄 수 있는 이유식 조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내가 이유식을 만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육아빠 세계에서의 ‘클라스’ 인증인 셈.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치자면 16좌 가운데 열세 번째 봉우리에 오르는 정도가 아닐지. 게다가 휴직자도 아니니…, 무산소 등정?
일단 고기 핏물을 빼고, 냉장실 안에서 충분히 불려진 쌀을 확인했다. 이어서 날렵하게, 의뢰인의 3mm 요구에 부합하도록 재료를 다졌다. 2011년 여름 일본 출장 당시, 산골마을 떡 장인이 “자네, 떡 한번 배워보지 않겠나?”라며 다섯 중 나를 굳이 지목했던 일화를 아내에게 다시 한번 알렸다. 아내는 허기진 아이를 달래며 들은 척 만 척.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먹기 좋은 온도로 이유식을 내놓았다. 두어 숟가락,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득의양양. 이제 출근용 셔츠를 꺼내 다리미 아래에 깔았다.
“웩.” 아이의 어깨가 한번 들썩하더니 이유식을 폭포수처럼 게워냈다.
“내가 했어야 했는데….” 다리미를 팽개친 채 눈물, 콧물, 토사물로 범벅이 된 바닥을 닦는 내게 던진 아내의 한마디. 내 안에서 불길이 올라왔다. 옥신각신, 아웅다웅. 지각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 틈에 다리미 아래 깔린 셔츠는 등판에 까만 자국을 남겼다.
출근길,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이유식을 보며 ‘앞으로는 절대 이유식을 만들지 않겠다’는 못난 결심도 했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원하는 일을 하고야 말 것인가. 그래봤자 이유식일 뿐인데, 이유식 하나로 이렇게 내 안의 나와 대결해야 하는가.
아이가 태어난 지 11개월. 육아의 세계는 외갓집 우물처럼 예상보다 깊고 넓다. 퇴근 뒤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고 재워야 하는 날이면 해오던 집안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 목욕까지 시키고 나면, 침대 위 바싹 마른 빨래들이 반 발짝 앞 장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거나 부엌 한켠 플라스틱 용기와 텅 빈 깡통들이 거실까지 흘러나오는 일이 다반사다. 게다가 이유식이라니…. 주말이면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아빠는 아이를 자전거 뒤 수레에 태우고 하이킹을 가거나, 반짝이 옷을 입고 놀이공원에 가던데, 그사이 청소·빨래·요리는 도대체 누가 하는 건지. 다큐가 아니라 예능이라는 핑계는 핑계일 뿐 영 찜찜하다.
결국 난 현실을 받아들였다. 출근 전 잠깐 설거지를 하고, 장난감을 정리해 방바닥을 드러낸다.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놓은 이유식을 해동한다. 밥솥에 물 안 넣고 쌀만 넣기도 하던 아내는 아기 입에 들어갈 이유식은 기가 막히다. 당분간 이유식 만드는 아빠로의 비약은 어렵게 됐다. 아이를 돌보는 것만 육아가 아니다. 집안일을 더 충실히 하길 원하는 아내의 뜻을 받들자. 이것도 육아다.
하어영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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