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이 없다. 아내의 진단은 정확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300일, 아내의 육아일기에서 아이는 짚고 일어서는데, 내 일기에서 아이는 아직 배밀이 중이다.
약속했던 육아휴직도 미뤘다. 새벽에 한 번 아이의 잠투정에 잠귀가 밝아 벌떡 일어나지만 무기력한 것은 여전하다. 아내가 저녁 약속이라도 있는 날이면, 버겁다. 아이는 돌고래처럼 몸을 뒤로 젖힌다. 기저귀도 갈았고, 이유식도 먹였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예정된 시간에 귀가한 아내를 향해 아이가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밤만 되면 꼭 엄마를 찾더라”는 말을 보탠 적도 있다. 자격이 없다는 아내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잠깐의 육아라도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쓰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고 하루를 맡길 만큼의 실력이 되지 못하는, 못난 아빠.
모니터의 커서가 깜빡인다. 곰곰이 앉아 생각해보니 자격 시비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내에게 휴식을 약속한 일요일 오후, 하필 육아 칼럼을 쓴다고 앉아 있다. 주말 내내 한시도 편치 않다. 아내는 안다. 아마 나는 하루 종일 글 쓴다고 앉아 있을 것이다.
“아빠빠빠!”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엉덩이가 들썩인다. “나오지 말고 마저 일해요.” 아내는 보지 않고도 안다. 존댓말은 예민함의 증거다. 그 말에는 “주말에도 저러고 있다”가 생략된 것이다. 며칠 전, “저는 자격이 없는 듯…”이라며 어렵게 꺼낸 말에 “반성문을 써”라고 답한 쿨한 선배가 밉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칼럼의 시작은 지난 초여름 어느 날 저녁의 ‘아빠모임’이다. 서울 이태원 초입, 한 허름한 맥줏집에서 한겨레 ‘남(편)’기자 6명이 모였다. “한겨레 초보 아빠들 자체위로 저녁 자리” “한겨레 젊은 아빠 자가발전 위로 저녁” “얼른 마시고 일찍 끝냅시다” 등의 문자가 오가기 시작한 지 보름 만이었다. 직장생활 4년차부터 16년차까지 다양한 연차에, 정치·사회·스포츠 등 부서도 제각각이다. 공통점이라고는 1년 사이 아빠가 됐다는 것뿐이다. 아니다. 공통점은 더 있다. “아빠모임이라고? 왜 안 가?”라며 흔쾌히 아내들이 등을 밀어 내보냈다.
급조된 아빠모임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이미 몇 명의 회사 동료로부터 “아이와 함께 가야 진정한 아빠모임”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왜 모이려고 했을까. 술 말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우리 지금 잘하고 있어’라는 집단위안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면, 너무 솔직한 것인가.
비난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빠모임이랍시고 모여보니… 우리는 육아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육아와 ‘관련된’ 얘기다. 시작은 거창했다. 육아 실력자의 이야기들이 애피타이저로 등장했다. 요리 칼럼을 쓸 정도로 이미 살림에 정통한 동료도,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분만을 도운 선배도 있었다. ‘냉장고를 부탁하면’ 15분 안에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내는 후배는 입만 열면 감탄이 나올 정도의 육아 지식을 뽐냈다.
이어진 상차림은 비루한 일상들로 이어졌다. 유모차·카시트에 대한 집착, 구하기 어려운 장난감을 구하기 위한 분투 등 알고 보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레어템을 득템했을 때의 과시욕이나 인정욕구였다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 이어졌다. 고백의 강도는 점점 더 쫄깃해졌다. 이유식을 시작하니 아이의 똥냄새가 ‘남’의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거나, 아이를 봐주는 장인·장모님이 ‘처음으로’ 가족처럼 느껴졌다는 고해성사가 이어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누구는 이러더라”며 아내에게 고변해야 하는 의무를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다들 취한 것이다.
우리가 아빠모임을 코스프레라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호박마차를 기다리는 듯 다들 안절부절. 밤 11시를 넘어서면서 육아 경험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2차!”라며 나서지 못했다. 누구랄 것 없이, 제안한 건배사는 다급했다.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을까. 마지막 건배사는 갑자기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맥락이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능동이(송호진 기자 둘째 태명), 건강하게! 유은(고나무 기자 첫째 이름)이는, 예쁘다!!”
호기롭게, 맥줏집을 나섰다. 능동이(본명 송이을)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고, 유은이는 여전히 예.쁘.다. 이렇게, 육아 칼럼은 시작됐다.
하어영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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