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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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씌인 것은 귀신이 아니라...

능청맞고도 사랑스러운 <오 나의 귀신님> 속 ‘박보영’ 자신의 행복을 찾는 데 주저 않는 여자의 쿨내가 진동하는 드라마
등록 2015-07-24 16:59 수정 2020-05-03 04:28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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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딱 그것만 보이나니. 을 기다리며, 누군가는 잘생긴 스타 셰프와 천방지축 요리 보조의 쿡드라마를 기대했을 것이다. 열대야의 여름이니 귀신 들린 여주인공의 심령 드라마가 좋겠다고 여긴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연애에 꽂히는, 한국산 드라마의 뻔한 공식을 예측하는 이도 없지 않겠다. 하나 뚜껑을 열어보니, 이것은 전혀 다른 장르- ‘박보영 드라마’였다. 박보영이 귀신에 씌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박보영에게 씌인다.

일에도 연애에도 자신감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주눅쟁이 박보영. 어느 날 그녀의 몸에 음탕한 처녀귀신 김슬기가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진짜 보여주고 싶은 캐릭터는 김슬기구나 싶었다. 국민욕동생으로는 부족하니까 국민여동생을 데려와 엉거주춤 흉내를 내겠구나 생각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박보영은 김슬기의 능청스러움을 완전히 흡수했고, 거기에 자신만의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으로 드라마 안팎의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다.

잘나가는 셰프 조정석은 그야말로 맨스플레인에 적격인 위치. 주방 안에서 칼질·불질로 대장 노릇 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주변 사람들 삶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자기 몫인 줄 여긴다. 그래. 대놓고 꼰대질은 아니다. 속내에는 애정이 없지 않다. 그래서 설거지통도 못 지키는 사고뭉치 박보영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크게 꼴사납지는 않다. “내가 유예기간으로 한 달 줄게. 그 안에 결정해. 네 인생을 이 주방에 바칠지 말지.” 그런데 여기서부터 달라진다. 박보영이 “늬예~늬예~” 할 줄 알았나? 에서 강백호가 감독님 턱 두드리듯이 상큼하게 말한다. “오케이 무조건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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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조정석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 남자들의 시선에 박보영은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일에서만 주제넘은 게 아니다. 연애에는 한술 더 뜬다. “까짓 인생 한 번 사는 거, 연애도 양다리 삼다리 해보고.” 말만 그런 게 아니다. 박보영은 조정석의 양기를 얻기 위해 “한 번만, 딱 한 번만” 애걸복걸한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음탕이나, SNL 안영미의- 남녀가 뒤집어진- 성희롱과는 다르다. 박보영은 장난기와 사랑스러움이 겹쳐진 표정으로 그의 동공, 흔들리는 멘털을 탐닉한다. 조정석은 겨우 뇌를 수습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가르치려 든다. “너 다른 남자한테도 이러냐?” “아, 뭘 그리 말이 많아요? 아님 말고.” 작가는 남자들이 ‘여자의 음란함’만큼이나 ‘여자의 쿨함’에 당황해한다는 걸 꿰뚫고 있다.

박보영의 뻔뻔함은 밝다. 이 보여준, 온갖 풍파를 겪으며 포기에 포기를 더해 만들어진 뻔뻔함이 아니다. ‘내 행복 내가 찾는데 어때서’라는 당당한 선언이다. 그녀는 자기만을 생각하지만, 조정석의 어리석음에 한마디 안 해줄 수 없다. 남자는 더욱 당황해한다. “근데 네가 뭔데 날 생각해. 니 주제에?” “왜 생각 좀 하면 안 돼요? 이 주제는?” 나는 그녀 앞에 장동민을 세워보고 싶다. ‘나대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여기 있네. 야, 너 미쳤냐? 그래, 미쳤다고 생각해. 그게 편할 거니까. 귀신에게 빙의되었다는 ‘탈’이 그래서 필요했나보다.

박보영은 지금껏 방어의 연기에 발군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의 어린 폐비 윤씨, 의 미혼모, 의 외로운 소녀…. 세상의 편견 속에서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꼿꼿이 머리 세우는 역할이다. 이번에는 전혀 다르다. 행복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아가는 공격의 연기다. 그동안 이런 성격을 전혀 안 보인 건 아니다. 데뷔작인 에서 남학생 이민호에게 금목걸이를 선물하려고 생떼를 쓰는 여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제 어른 여자가 되었고, 남자들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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