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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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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이라는 사기꾼

헌병대 수사과를 만기 제대한 내가 당한 중고거래 사기, 연애의 쾌도난마 정언 법칙은 빈 잔으로 하는 야바위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다
등록 2015-06-12 00:1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내 삶에는 결정적인 하루가 있었다. 2012년 12월14일. 과장을 보태자면 내 인생은 이날을 분기점으로 나뉜다. 물론 이날은 내가 태어난 날도, 새삼스레 종교에 귀의한 날도 아니다. 첫 키스 날도 물론 아니며(서른셋에 첫 키스는 좀 슬프다) 입대일도 결혼식 날도 아니다. 이날은 내가 난생처음으로 중고거래 사기를 당한 날이다. 하! 난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들이나 그런 수모를 겪는 줄 알았다. 헌병대 수사과를 만기 제대한 내가 중고거래 사기라니….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중고 노트북을 사려다 70만원을 날렸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것들이 있다. 먼저 세상일은 결국 나한테 일어난 사건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란 사실이다. 중고거래 사기를 당했다고 했더니 다들 내 면전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나의 실패가 사람들에게는 오락이었다. 경험은 이토록 처절하게 나와 남을 경계짓는 것이다. 또한 중고거래 사기에 대한 이제까지의 내 인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나빠진 것은 아니었을 터다. 그럼 그 한 번의 예외적 사건이 결과적으로 나를 멍청하거나 어수룩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중고거래 사기는 바보 아님 숙맥이나 당하는 것’이란 내 단순한 구분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일반론적 인식은 흔하다. 연애에서 특히 쾌도난마 정언 법칙이 난무한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어떻게 헤어진 애인과 연락하면서 지낼 수 있어?’ ‘아무리 연인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야지’… 리스트는 끝이 없다. 난 이제 이런 종류의 일반론을 좀더 냉정히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 여기에 대한 내 입장은 ‘불가능’이다. 적어도 건강한 이성애자들이 부대끼면서 언제까지나 성적 긴장이 제로 상태일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실의 나는 단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몇몇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헤어진 애인과 연락하면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현재 그렇게 연락하는 전 여자친구는 없다(다들 나한테 학을 뗀 모양이다). 이 경우 내가 가진 일반론은 썰리지 않는 칼, 아님 텅 빈 잔으로 하는 야바위나 마찬가지 아닌가.

요는 이런 거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종 사안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우리의 알량한 방침 따위는 무시한 채 철저히 무작위적으로 페이지를 펼쳐 거기다 지금껏 각자가 애써 만들어놓은 캐릭터를 구겨넣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 ‘연인끼리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 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당신이 오늘밤 잠든 연인의 휴대전화를 슬며시 잠금 해제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이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가 궁금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막상 나한테 일어나니까 하나도 안 이상하잖아?’ 그야 그렇지, 이상한 건 당신의 일반론이었으니까.

P.S. 얼마 전에 경찰서로부터 그 사기꾼이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내가 피해 금액을 보상받지는 못하겠지만 놈은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그 인생에도 결정적인 하루가 있기를.

정바비 송라이터·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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