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개혁 끝장토론에선 이런 장면이 있었다. 윤제균 영화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 영화산업의 특징은 투자·배급·극장이 한 기업에서 운영된다는 것이다. 산업 성장 측면에서 집중력이 생기는 장점이 있지만 (영화계) 권력이 일부 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
TV로 윤 감독의 발언을 듣던 영화인들 중엔 놀란 사람도 있었다. 대기업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영화 작업을 같이 해온 윤 감독의 입에서 대기업이 영화계에 끼치는 문제가 언급됐기 때문이다.
윤 감독의 말에 대통령이 화답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영화산업의) 양극화에 시달리는 (중소) 영화업체들은 아예 (극장에) 진출할 수가 없으니 그런 것이 규제다. (해소 방안을) 구체적으로 보고해주길 바란다”고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지시했다. 이 자리에 있던 노대래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이 중소·독립영화 제작사의 궁박한 상황을 이용해 시장 참여 기회를 박탈하는 걸 철저하게 적발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제 ‘흥미로운 반전’이 펼쳐진다. 지난해 12월17일 개봉한 영화 은 이미 관객 1천만 명을 넘겼다. 눈물을 흘렸다는 관객들의 입소문이 많았고, 박 대통령도 애국을 강조하며 이 영화의 한 장면을 특별히 거론했다. 은 올해 1월3일엔 전국 스크린 1044개관에서 상영됐다. 전국 스크린 수는 2351개(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다. 그즈음 8~10개 스크린을 가진 어떤 CGV를 갔더니 상영시간표가 으로 도배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다. 은 CJ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위한 큰돈을 대고(투자), 상영할 극장을 잡아준(배급) 영화다. CJ는 자사가 투자한 영화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상영할 극장(CGV)도 갖고 있다. 연출자는 박 대통령 앞에서 대기업이 관여한 영화가 스크린을 과다 점유하는 ‘불공정 구조’를 지적했던 윤제균 감독이다. 끝장토론 10개월 뒤인 지금 윤 감독은 ‘대기업 수직계열화’(대기업이 투자·배급을 넘어 극장까지 소유·운영) 구조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됐다. 한 영화 제작자는 규제개혁 끝장토론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윤 감독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윤 감독이 그때 그런 얘기를 대통령에게 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다만 대통령에게 수직계열화 문제를 얘기한 윤 감독이 수직계열화의 우산 아래에서 수혜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것 아닌가. 대통령이 영화 등 문화산업이 창조경제의 핵심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면, 영화계 문제를 시정하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 ‘스크린 공급의 우위’란 날개를 달아 승승장구하는 사이, 한 편의 영화가 사라져갔다. 언론·평단·관객이 고루 좋게 평가한 (이하 )이란 작품이다. 이 영화는 대기업 중심의 배급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국내 유명 제작자들이 직접 설립한 대안적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가 극장을 잡는 배급에 나섰다.
은 아빠가 사라진 뒤 집이 없어 엄마·동생과 함께 낡은 차에서 지내는 초등학생 ‘지소’(이레)가 전세 보증금 500만원을 마련하려고 개를 훔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혜자·최민수·강혜정·이천희, 아역배우 이레 등이 출연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 따뜻한 영화” “기분 좋은 선물을 받은 듯한 행복감을 선사한 영화”라는 관객의 반응이 이어진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자연스러운 감동을 준 영화”라고 평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31일 전국 205개 스크린에서 개봉했다. 개봉 당일 한국 영화 (912개)과 (529개, 롯데엔터테인먼트 투자·배급), 외화 (509개·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급) 등이 차지했던 스크린에 견줘 크게 뒤지는 수치다. 개봉 11일째인 1월10일엔 85개관으로 줄었고, 23일 현재 스크린 수는 전국적으로 20개를 밑돈다. 일부 관객이 “왜 을 틀어주지 않느냐”고 극장에 항의하는가 하면, 아예 배우·개그맨·유명인사·사회단체·일반관객들이 스크린 1개관을 빌려 이 영화를 보는 ‘대관 운동’에 나서는 상황이 됐다.
시사회 직후 “겨울 극장가에서 흥행 복병이 될 것”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 은 스크린에서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극장들이 스크린 수를 결정할 때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이다. 예매하는 사람(예매율)이 적고, 영화를 튼 상영관에 관람객(좌석점유율)이 적어 빈자리가 많으면 스크린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익이 중요한 영화관들로선 당연한 조처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이 “왜곡된 데이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에 적용해보자.
12월31일 개봉한 의 예매는 지난해 12월26일부터 시작됐다. 극장들이 12월26일이 돼서야 의 예매가 가능한 상영관을 지정해 열어준 탓이다. 일부 대형 영화의 경우 개봉 1~2주 전부터 예매가 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출발부터 불리했다. 그나마 의 예매가 가능한 극장은 전국 5곳이었다. 12월26일에 은 전국 52곳 극장에서 예매가 가능했고, 은 67곳에 달했다. (올해 1월5일 은 전국 167곳에서 예매할 수 있었고, 은 6곳에 그쳤다.)
개봉이 임박해서야 적은 수의 극장에서 예매를 열어줬으니 개봉 첫 주 예매율이 높을 수 없었다. 의 개봉 스크린 수도 205개에 불과해 관객이 영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는 “12월31일 개봉 당시 이미 (스크린을) 과다 점유하며 흥행하던 영화가 있었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도 많다며, 우리에게 극장이 내준 스크린이 그 정도였다”고 했다. 수도 적지만 확보한 205개 스크린의 ‘질’도 좋지 않았다. 엄 대표는 “온관 상영(1개 스크린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을 계속 상영) 조건으로 적은 스크린 수를 받겠느냐, 반관(1개 스크린에서 과 다른 영화가 교차 상영되는 것) 조건을 포함해 스크린 수를 조금 늘리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크린을 하나라도 더 열면 입소문에 의해 점점 스크린이 더 많이 열릴 것이란 기대로 ‘반관’이라도 받자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12월31일 개봉 당시 상영 회차를 심야 두 번(밤 11시35분, 자정을 넘긴 1시55분)만 배정한 경기 지역의 한 CGV ‘4관’도 의 205개 개봉 스크린 수에 포함된 식이다. 이 극장의 ‘4관’은 관람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낮과 저녁엔 다른 흥행 영화를 상영했다.
흥행 스타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는 입소문을 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극장은 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트위터·페이스북 등에서 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던 개봉 2주차(1월5~11일)에 극장은 거꾸로 의 스크린을 줄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1개 스크린에서 을 온전히 상영하는 극장도 거의 없어졌다. 경기 지역의 한 CGV는 낮 12시대와 저녁 8시대에만 상영했고, 경기 지역의 한 롯데시네마는 아침 8시에만 이 영화를 틀었다. 엄 대표는 “아침과 심야 시간대로 무자비하게 배정했다. 우리 작품이 가족영화인데 아이들 관객에게 수면권까지 박탈하면서 보라는 것인지…”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사라진 과정’은 이렇게 요약된다. ‘개봉 임박해 소수의 극장에서만 예매 가능→예매율 저조→적은 개봉 스크린 수→개봉 스크린 일부는 다른 영화와 ‘퐁당퐁당’ 교차 상영→개봉 2주차부터 오전과 심야 시간대로 밀리기 시작→영화를 보기 어려우니 예매율과 좌석점유율 저조→상영관 대폭 축소’.
엄 대표는 “어떤 영화는 예매가 개봉 1~2주 전부터, 어떤 영화는 4~5일 전부터 가능하다면 동일한 조건으로 페어플레이를 할 수 없다. 출발 조건부터 공정한 기준이 깨진 것이다. 2주차부터는 정상적으로 관람할 시간대도 확 날아갔다. 당연히 그 시간대에 볼 수 없으니 예매율이 떨어지고, 빈자리가 많으니 좌석점유율도 갉아먹는다.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이 왜곡된 데이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에 스크린을 더 배정하기 위해 우리 영화를 줄이는 게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계에선 흥행을 위해선 작품 자체의 완결성과 감흥이 우선 중요하지만, 스크린을 몰아주는 외적인 요건도 흥행 실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영화가 이처럼 스크린 물량 공세를 주도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CGV와 롯데시네마가 각각 모기업이 투자·배급한 영화에 스크린을 몰아줬다며 55억원(CGV 32억원, 롯데시네마 2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정지욱 평론가는 “국내에서 뛰어난 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가 배급한 까지 힘을 못 쓴 건, CJ 등의 영화계 독주가 그만큼 세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기회가 줄어들고 영화의 다양성도 사라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영화계에선 대기업이 투자·배급을 하더라도 극장을 소유해 상영까지 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CJ와 롯데가 CGV와 롯데시네마를 다른 곳에 매각해서라도 ‘투자·배급’과 ‘상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투자·배급·상영까지 하며 한국 영화의 규모를 키우고 관람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고 얘기한다.
수직계열화 해체를 주장해온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 극장들이 중소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의 무료 초대권까지 발행하면서 사람을 끌어다 팝콘·음료수를 팔며 돈을 벌고 있다.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수직계열화를 끊는) 근본적 구조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매 오픈도 동등하게 하고, 흥행성이 똑같은 영화라면 상영관 수도 비슷하게 잡아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느냐란 수요에 따라 상영관이 (지금보다는 공정하게) 배정될 수 있다.”
의 주인공인 9살 이레는 최근 관객들이 영화관을 빌려 을 보는 현장에 예고 없이 나타나 마이크를 잡았다. 9개월 전, 박 대통령에게 대기업의 수직계열화를 지적한 영화감독의 발언을 아이의 시각에서 풀어낸 짧은 말을 남겼다.
“우리 영화가 재미있다는데 상영관이 없어서 볼 수 없다죠? 너무 서운해요.”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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