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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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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떨림, 울림을 건네다

국악 본연의 색깔 지키면서 현대적 어법 가미한 국악 공연 ‘한국에서 듣는 음악, 평롱’
등록 2015-01-10 14:49 수정 2020-05-03 04:27

2014년 12월31일 ‘서울에서 듣는 한국 음악, 평롱: 그 평안한 떨림’(이하 ‘평롱’)의 공연이 끝났다. 5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8개월 동안 계속된 공연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월요일 하루만 쉬었을 뿐 주말과 공휴일에도 쉬지 않은 공연은 국악단체인 정가악회와 메타기획컨설팅이 공동 주관한 상설공연이었다.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국악당에서 진행된 ‘평롱’ 공연을 위해 지난 8개월 동안 정가악회 단원 19명이 2교대와 3교대로 교차 출연하며 무대에 올랐다. 정가악회 단원들만으로 만들어진 공연은 아니었다. 음악·영상·무대·조명·음향·의상·공연 전문가가 함께 참여했고, 제작비·인건비 등으로 수억원의 예산이 집행된 규모 있는 장기 공연이었다. 한 번이라도 공연을 해본 사람은 안다. 공연을 하기 위해 온 정신과 에너지를 집중하고 그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날마다 하는 공연이라고 쉽게 볼 일이 아니다. 무대는 언제나 냉엄해서 흐트러진 마음은 곧장 관객에게 들키고 만다. 그런데 정가악회는 그 떨림의 에너지를 8개월 내내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선율·악기보다 중요한 것은 국악의 철학”

사실 지금은 국악 공연을 보기 어렵지 않은 시대다. 삼청각과 정동극장에서도 국악 상설공연이 이어지고 국립국악원에서도 쉽게 국악 공연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평롱’은 다른 공연과 다르다. ‘평롱’을 세 번이나 보게 하고, 끝내는 다르다는 말을 두 번이나 쓰게 할 만큼 철학과 태도가 다른 공연이다. 대개의 국악 공연이 국악의 장르적 정통성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고, 상설공연의 경우 대표적 국악 장르들을 요약하듯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면, ‘평롱’은 국악의 본질을 질문하고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확인하면서, 퍼포먼스와 연출에서도 세련됨과 완벽함을 포기하지 않는 공연이었다.

서울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국악당에서 8개월 동안 펼쳐진 ‘서울에서 듣는 한국음악, 평롱: 그 평안한 떨림’ 공연의 한 장면. 정가악회 제공

서울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국악당에서 8개월 동안 펼쳐진 ‘서울에서 듣는 한국음악, 평롱: 그 평안한 떨림’ 공연의 한 장면. 정가악회 제공

대체 공연이 어땠길래 이렇게 평가하는 걸까. ‘평롱’에서 정가악회의 음악인들은 국악 본연의 색깔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어법을 가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국악계의 현재적 대안처럼 보편화된 퓨전 국악이 국악 본연의 어법과 가치를 투항하듯 폐기하며 서구의 방법론 앞에 백기를 흔들고 있는 데 반해 정가악회는 정가를 비롯한 국악의 고귀하고 기품 있는 유산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았다. 고루해 보이는 음악 속에 잠재된 가치야말로 국악의 핵심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가악회의 대표이자 ‘평롱’ 공연의 연출을 맡은 천재현은 “지금 같은 시대에는 국악이 없어지더라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면서 “그렇다면 국악이 있음으로 인해 좋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국악의 선율과 장단, 악기가 국악의 정체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악의 철학이다”라고 단언했다.

‘평롱’은 공연의 도입부에서 돌연 불덩이 같은 별 하나를 쏘아올린다. 느리게 치솟는 별은 화면 가득 폭발하며 우주가 되고 우주는 음악에 대한 오래된 깨우침을 다시 전해준다. 바로 이다. “악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든 것이요, 허(虛)에서 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피와 맥박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케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정가악회가 ‘평롱’ 공연을 통해 지키고 보여주려는 국악 철학의 총체다.

영상으로 우주를 보여주고 의 철학을 되짚으며 시작한 공연은 70분 동안 7곡을 노래하고 연주한다. 그 70분은 의 추상화된 철학이 국악을 빌려 음악과 공연으로 가시화됐을 때 무엇을 보여줄 수 있고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70분이다. 이로써 확인되는 것은 국악 자체의 아름다움과 깊이가 음악 자체의 존재 이유와 철학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평롱’은 “세상 만물은 떨림이 기본이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진동수를 맞추는 일이며, 음악이 심금을 울린다는 것 역시 공명하는 것이고, 공감하는 것”이라는 천재현 대표의 말이나 ‘그 평안한 떨림’이라는 공연의 부제처럼 보는 이들을 계속 떨게 하고 공감하게 하면서 국악과 음악의 본질에 이르게 한다.

떨림과 공감을 위해 ‘평롱’이 제시하는 것은 국악의 고전적 어법과 현대적 어법이라는 음악적 방법론이며,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서사다. 첫 곡 가 종묘를 배경으로 종묘제례악과 보허자의 음악을 재구성한 정가를 들려주고, 가 수제천과 인천 뱃노래를 빌려 국악의 장엄함과 단아함을 보여준다면, 와 , , 은 긴 아리랑과 창작곡, 범패와 사물놀이 등으로 국악의 역동성과 현재성을 증명한다.

음악은 결국 사람에게 닿아 있는 것

음악으로 국악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공연은 공연의 서사에서는 그리움과 방황, 소망과 사랑 등을 아우르면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끌어안는다. 특히 “아직도 차갑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들려준 는 2014년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된 세월호의 위령 음악으로 가슴을 미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음악은 사람에게 닿아 있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는 선곡이었다.

음악에 깃든 전통성과 현대성은 영상으로 재현된 이미지들을 통해 구체성을 더하고 아름다움을 확장했다. 12폭 병풍처럼 디자인된 화면에 연출된 영상은 섬세한 조명과 함께 공연의 감동을 주조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서울에서 보는 한국 음악’이라는 제목에 맞게 서울의 곳곳을 비추는 영상은 단지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개별적 순간으로 눈을 돌리게 하면서 국악이 일상에 기반한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퓨전이라는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악 본연의 가치로도 얼마든지 오늘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정가악회의 고집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었다. 춘앵무를 홀로그램 영상 기법으로 재현한 듯한 는 전통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모던하게 재창조했고, 와 에서는 일렉트로닉 음악의 영상에나 사용할 법한 현란한 그래픽으로 국악을 오늘의 음악으로 옮겨놓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영상과 조명이 정교하게 연출되면서 시각적 화려함에 익숙한 오늘의 관객을 사로잡았고 ‘평롱’은 흠잡을 데 없는 공연을 완성시켰다.

8개월의 상설 공연을 마친 ‘평롱’은 이제 잠시 걸음을 멈추고 2015년을 기약하는 중이다. 천재현 대표는 “2015년에도 ‘평롱’을 공연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평롱’을 통해 국악의 본질적 가능성을 보여준 정가악회의 내일에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기본과 철학, 그곳에 답이 있고 순수한 본질주의자들은 늘 세상을 바꾸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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