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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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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성지순례 떠나볼까

한가한 저녁 떠나는 이태원 경리단길 수제 맥주길,
한 가게에서 한두 잔씩 마시다 슈퍼에서 병맥주 사서 버스 타고 집으로
등록 2014-05-31 15:36 수정 2020-05-03 04:27
한국에서 다양한 맥주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한겨레 박미향

한국에서 다양한 맥주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한겨레 박미향

고모가 한 모금 권해준 것이 맨 처음 맛본 맥주였다. 찝찌름했다. 성인이 된 뒤 맥주를 자주 입에 대게 되었다. 혀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시원한 맥주를 목으로 넘기다보면 머리는 취한다. 청량함과 시원함이 맥주를 찾는 이유다. 직장생활을 하고부터는 한 가지 이유가 추가됐다. ‘소맥’을 말기 위해서. 그런데 세상에는 ‘소맥’을 불경하다고 느끼게 하는, 다양한 맛과 향의 ‘맛있는’ 맥주가 있다. 이 글은 사랑의 재발견에 관한 환희에 넘치는 이야기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옥수수·전분 맥주, 일본에선 발포주…</font></font>

한국 대표급 맥주는 옥수수나 전분을 ‘맛을 부드럽기 하기’ 위해 넣는다. 그 비율은 30~35%에 이른다. 하지만 독일의 맥주순수령은 홉과 맥아 외의 곡물을 넣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맥주는 일본에선 발포주로 분류된다. 일본은 주세법에서 맥주를 일반 맥주, 발포주, 제3의 맥주로 분류한다. 발포주는 경기불황 때 맥아량을 줄여 싸게 만든 맥주가 시작이다.

이것은 나중에 안 이야기고, ‘맥주맹’을 만드는 한국 사회에서 맥주에 눈뜨게 된 것은 미국인 친구 손에 이끌려 간 ‘스프링 비어 페스트 2012’(Spring Beer Fest 2012)에서였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경리단길 골목골목에 수백 명의 동호인들이 각자 담근 맥주를 가지고 나와 나눠 마셨다. 밀맥주·IPA·둔켈·랑비크 등 수십 종의 개성 있는 맛이 각자의 가정에서 창조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맥주 축제 뒤 나는 펍크롤링(Pub Crawling·새로운 맥줏집을 순례하는 행위)에 빠져들었다. 서울 강남이나 홍익대 앞에 새로운 수제 맥줏집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맛보는 것이 일상의 활력소로 자리잡았다.

몇 년 사이 1세대 수제 맥줏집들이 분점을 내고, 인터넷상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수제 맥주에 대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맛있는 맥주를 즐기려면 일단 뛰어들어야 한다.

저녁까지 빈 하루 날을 잡아 경리단길로 가보자. 제대로 된 수제 맥주를 처음 선보인 곳을 찾아간다는 ‘성지순례’의 상징성이 있는 여정이다. 가게별 자체 제조법으로 만든 독특한 풍미의 맥주를 두루 즐길 수 있다. ‘맥파이’에서는 페일에일·포터·엠버에일 등을 판다. 1세대 중 맏형 격인 가게다. 몇m 옆에 있는 ‘더부스’는 업력이 짧지만 유명세는 크다. ‘한국 맥주가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주제의 기사로 한국 맥주 시장을 흔든 전직 기자 대니얼 튜더가 창업한 가게다. ‘크레프트웍스 탭하우스’는 근처 수제 맥줏집 중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늘 북적인다. 한국의 산 이름을 딴 에일류가 유명하다. 수십m를 이동하면 신사동 세로수길에도 매장을 운영하는 ‘퐁당’ 계열의 ‘Made in 퐁당’이 있다. 대로변에 있어서 경리단길의 모든 수제 맥주 가게 중 가장 눈에 잘 띈다. 적게는 서너 종류에서 많게는 10여 가지의 맥주를 보유한 가게들이다. 초저녁부터 한 매장당 한두 가지씩 자체 레시피 맥주를 맛보며 이동하고 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귀가할 수 있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다양한 맥주를 위해, 맥주 담론 계속되길 </font></font>

성지순례지 부근의 가게들에서는 집에 쟁여놓을 맥주를 살 수 있다. 해외 소규모 양조장의 병입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수입사들도 용산구를 중심으로 시장성을 타진한다. ‘테스트마켓’인 셈이다. 경리단길의 우리슈퍼, 해방촌 고바우슈퍼, 이태원동의 한스스토어 등이 그렇다. 인기를 얻은 제품은 대형마트로 진입한다. 초심자는 도수가 높지 않은 제품 위주로 먼저 시도하길 권한다. 도수가 높으면 특유의 아로마도 강해서 거부감부터 가질 수 있다. 단계를 밟아가면 와인을 표현할 때 쓰는 ‘보디감’이나 ‘피니시’ 같은 단어들이 맥주에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국의 세 번째 양산 맥주 브랜드인 세븐브로이가 운영하는 직영점들도 가볼 만하다. 서울과 경기도 군포, 대구 등지에 매장이 있다. 전남 담양의 ‘담주브로이’, 제주도의 ‘제스피’, 전북 순창의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 등 지역 기반의 특색 있는 맥주 브랜드들도 꿈틀댄다.

‘앗 뜨거워라’ 싶은 양대 맥주 대기업들은 지난해부터 제품군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대다수 소비자들이 하면 발효식 맥주를 선호하고, 진하거나 쌉쌀한 맛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지난 4월1일 주세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소규모(5㎘ 이상) 맥주 제조자가 도·소매업자에게 맥주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제조장을 방문한 사람에게 판매하던 것이 변하면서 축제도 가능하게 되었다. 판매점이 제조공장에 레시피를 주고 의뢰하는 데서 나아가 소규모로 제조 과정을 관할하는 실험도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점화되지 않은 논쟁거리가 남아 있다. 유럽·미국·일본 등 소득수준이 두 배 이상 높은 지역의 맥주 값은 우리나라보다 싸다. 과세 체계 때문이란다. 다양하고 맛있는 맥주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게 ‘맥주 담론’이 지속되길 바란다.

이승기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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