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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같지만 멋있어’를 따라해보지만 결국엔 ◯신이지

야심 없는 청년들의 지속 가능한 창작이란
등록 2014-05-10 18:11 수정 2020-05-03 04:27

언제부턴가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 ‘등신미’(병신미)는, 문화·예술의 무력화와 가난한 삶의 미학화라는 배경에서 태어난, 기대감소 시대 특유의 개념이다.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이하 원고에선 ‘○신미’라고 적겠다.)
정의하자면, ‘○신미’란, 어떤 반푼이 같은 요소로 인해 발생한 ‘갭모에’의 조화로운 불균형에서 야기되는 매력과 아름다움(혹은 애상의 미감)을 뜻한다. (비고1: 일단 ‘모에’(萌え)부터 간단히 설명해보자.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 신어인 ‘모에’는,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 즉 특별한 성적 페티시의 코드를 뜻한다. 하지만 최근의 모에는 미소녀 취향에 국한하지 않고, 거의 모든 문화적 대상에 확대 적용되는 모습이다. 비고2: 본디 ‘갭모에’(편차모에)는 어떤 캐릭터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모에’를 의미했지만,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편차를 발생시키는 이질적 요소 덕에 발생하는 ‘모에’나, 캐릭터와 상황의 편차에서 형성되는 ‘모에’- 마치 소격 효과 같은- 를 뜻하기도 한다.)

병맛과 다른, 근과거에 대한 향수

등신미를 상징하는 작품들. 박미나의 〈At the best beach!_PAPERMATE B〉, 힙스터의 ‘등신미’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자리잡은 〈Space_cat〉, 이우성의 〈자폭〉(왼쪽부터 시계방향).

등신미를 상징하는 작품들. 박미나의 〈At the best beach!_PAPERMATE B〉, 힙스터의 ‘등신미’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자리잡은 〈Space_cat〉, 이우성의 〈자폭〉(왼쪽부터 시계방향).

그러나 ‘○신미’가 망가나 아니메에 빠진 오타쿠나 후조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비고: 남성 동성애를 그린 소설이나 만화를 좋아하는 야오녀(やお女·여성 오타쿠)를, ‘썩은 여성’이라는 의미의 ‘후조시’(腐女子)라고 부른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적잖은 수의 젊은이들이 ‘○신미’를 공유하며, 그 의미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 보급 이전에도 ‘병맛’이란 유사 개념이 있었고, 또 2008년 인터넷을 강타한 에서 전조가 나타난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신미’라는 표현이 일군의 청년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의 일, 즉 근년의 현상이다.

‘○신미’의 기본적 감정/태도는, ‘○신 같지만 멋있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신 같지만 멋있어’를 따라해보지만 ‘결국엔 ○신이지’의 좀비적 감정/태도가 새로이 덧대지면서, ‘○신미’는 과거 시대의 ‘병맛’과는 다른 징후적 개념으로 진화했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신스러움의 미학’을 이해하는 감각의 예민함을 전제로 하지만, 후자에는 ‘○신 같아도 멋있을 수 있었던’ 근과거에 대한 어떤 향수-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를 향한, 불능의 노스탤지어- 가 짙게 배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일군의 청년들은 ‘○신미’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것일까?

‘미학화하는 삶 속의 가난한 청년’이라는, ‘○신미’ 향유 주체의 위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미’는 그저 문화·예술의 퇴락을 관통하는 몹쓸 징후로 뵈기 십상이다.

열패감으로 열패감 주는 현실을 극복하려

애상의 감각으로서 ‘○신미’는, 문화 소비자로서의 비평적 자각- 이를테면 ‘나는 바보 소비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처한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가망은 없다’는 식의- 을 전제로 한다. 즉 ‘○신미’란, 자신이 소비하는 문화적 대상을 마주한 상황에서, 전지적 소비자 시점(혹은 의식)이 발동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맥락 차원의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같은 것이다. (비고: ‘모노노아와레’는 일상에서 이격된 대상을 접할 때 심중에서 발생하는 적막하고 쓸쓸한 애상의 감정을 뜻한다.)

고쳐 말해 ‘○신미’는 열패감의 미학화로 열패감을 선사하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충동인 셈인데, 이것이 이른바 ‘정신 승리’의 수준을 벗어나는 방법은 삶의 양태를 미학화하는- 간접적이나마 윤리화·정치화를 동반하는-것뿐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신미’를 드러내거나 포착한 작품을 제작하는 청년들은, 과거 세대와 달리 야심 없는 패배자의 태도를 취하며 제 삶의 미학화를 꾀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심을 갖지 않는 청년들이, 지속 가능한 형태의 창작 방식을 모색하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만약 문화·예술이 이대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면, 삶의 미학화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가난한 소비자-개인으로서의 문화 청년이 ‘ ‘○신 같지만 멋있어’를 따라해보지만 결국엔 ○신이지’라는 감정/태도로 제 삶의 미학화를 고수하면, 과연 그는 어느 정도의 자족감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기성화한 삶의 방식에 어떤 비평이 될 것인가? 상징 차원의 만족감은, 경제적 박탈감과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될까?

나는 무신론자의 종교화한 빈한한 삶의 어떤 양태가 지속 가능한 미래상이라고 확신해왔다. 그것은 삶을 비우회적 방식으로 미학화하는 일에 다름 아닐 테다. 일상을 모방한 문화와 예술로 세상을 바꾸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일상이 수정될 차례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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