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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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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투쟁

삼성 백혈병 고 황유미씨 아버지 이야기 담은 영화 <또 하나의 가족>

험난한 캐스팅 더 험난한 제작비 모금, 영화에 담길 새로운 이야기
등록 2012-11-16 18:48 수정 2020-05-03 04:27

“차라리 친구들처럼 대학이나 갈걸, 싫은데도 참고 일하는 건 엄마한테 미안해서이다. 엄마가 대학 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우겨서 이 회사 왔는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퇴사 못하겠다. 슬픈 책이라도 읽고 아주 펑펑 울고 싶다.”
르포작가 희정이 (아카이브 펴냄)에서 옮겨 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2003년 일기다. 물량 목표를 채우기 위해 휴일도 가리지 않고 일하고, 피로를 풀 틈도 없이 오전·오후·밤 3교대로 돌아가는 일정에 황유미씨는 미처 눈물을 흘릴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모은 월급으로 고향집 이사에 보탬도 되고, 쌍꺼풀 수술도 할 것이라고 청사진을 그렸다. 2~3년 더 돈을 모아 대학을 갈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소박한 꿈을 다 실현하기도 전에 병이 생겼다. 공장에 입사한 지 1년8개월 만인 200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황유미씨는 일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앓다 2007년 3월 가혹한 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흰 국화 뒤로 사라졌다.

''또 하나의 가족'은 팩트의 무게가 드라마를 압도하는 영화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딸이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대기업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잔혹한 사연들이 영화에서 공개된다.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제공

''또 하나의 가족'은 팩트의 무게가 드라마를 압도하는 영화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딸이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대기업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잔혹한 사연들이 영화에서 공개된다.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제공

배우도 투자자도 없었으나

이것은 황유미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기흥사업장에서 2인1조로 일한 이숙영씨는 황씨보다 앞서 2006년 8월 백혈병으로 숨졌다. 이밖에도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던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뇌종양이며 재생불량성빈혈에 시달리거나 혹은 견디다 못해 생을 놓았다.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57)씨는 딸이 죽은 원인을 밝히려고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오랫동안 딸의 병이 산업재해라고 주장하며 대기업과 맞서 싸웠다. 그 과정을 영상으로 다시 그렸다. 영화 얘기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결말을 미리 말하자면, 산업재해를 인정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로 영화는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는 생략했다. 아버지의 작은 승리로 끝나는 영화의 엔딩처럼 현실에서도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로 싸우고 있는 이들이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는 김태윤 감독과 11월7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태윤 감독은 지난해 황상기씨가 승소를 거뒀다는 기사를 읽고 이 사건이 무엇인지 좀더 면밀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기사를 거슬러 읽으며 사건을 역추적했다. 영화로 만들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이 한정돼 있거나, 짧게 브리핑하고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라 자료 조사부터 난관이었다. 강원도 속초에 찾아가 황상기씨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 “저는 영화 만드는 사람인데 얘기 좀 들려주십시오, 했더니 집 앞 중국집에 데려가시더라고요. 소주 한잔 하며 서너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어요. 그때 받았던 가장 큰 인상은 그렇게 큰 일을 겪었는데도 항상 웃으시더라고요. 그 모습에 울컥했어요. 뵐 때마다 울컥울컥해요. 영화 만들겠다는 얘기에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이후로는 황상기씨 서울 오실 때마다, 집회 있을 때마다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모르는 것 있으면 질문하며 7~8개월을 보냈더니 ‘그래, 당신이 만들어’ 그러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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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영화를 찍겠다고 공표했으나 투자자가 모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라는 게 이유다. 덩달아 배우도 나서지 않는다. 주변의 만류도 거세다. 다시 두 달 정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며 답보 상태를 보냈다.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요. 있는 사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겠다는데,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뭔가 많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을 다시 먹고 부딪히기 시작하자 일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박철민·윤유선 등 잘 알려진 배우가 기꺼이 부모 역을 맡겠다고 나섰다.

클라우드 펀딩이 살리다

주요 배우의 캐스팅을 마치고 장소를 섭외하는 등 일을 진행하고 있지만 더 큰 걸림돌은 제작비였다. 궁리 끝에 11월1일부터 클라우드 펀딩(소셜네트워크서비스나 인터넷 등을 통해 시민에게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제작비 마련에 나섰다. 11월8일 현재 예상 목표액 1억원의 39%를 채웠다. 제작비가 모이면 12월 초에 크랭크인해서 두 달여 촬영한 다음 내년 봄에 개봉하는 게 목표란다. 김태윤 감독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대통령이 누가 되든 꼭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태윤 감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례들도 영화에 녹여내려고 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제공한 녹취록을 보니까 오퍼레이터 여성들 외에 남성 엔지니어들도 굉장히 많은 병을 갖고 있었어요. 예컨대 어떤 분은 자신은 병이 없어요. 그런데 팀장은 백혈병, 부팀장은 피부암, 같은 팀의 어떤 분은 재생불량성빈혈이랍니다.” 그다음은 자기 차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노동자는 얼마나 큰 공포에 휩싸였을까.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 더 잔혹한 이 공포는 우리 ‘또 하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다. 후원 문의 굿펀딩(www.goodfunding.net).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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