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댓새 왓으면 죠치// 여드래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햇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냐거던/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저젓서 느러젓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왓으면 죠치/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녀서 운다”(김소월 ‘왕십리’, 1923년 에 발표)
59년 왕십리, 왕십리 1980년…서울 왕십리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궁궐터를 정하러 왔다가 “십 리를 더 가라”는 말을 들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김소월 시의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말은, 가도 가도 십 리를 더 가야 함을 뜻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이 시가, 끝도 없이 오는 비가 “습관이 되고 자연이 되어 산 것들의 모든 기운이 ‘나른하고 촉촉하게’ 거기 젖어 적응하고 있”는 비극을 읊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시대별로 왕십리를 갖고 있다. 이상스럽게도 어느 시대든지 왕십리는 ‘과거’다. 과거란 그렇다. 가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 사랑을 마신다 정 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 하늘 아래 나 홀로 아아 깊어 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김흥국 , 1994년 발표, 김흥국은 1959년생).
최근 인터파크 ‘북&’에 연재를 시작한 조현의 단편소설 제목은 이다. 작가가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 1980년이었다. 그는 당시의 왕십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1980년의 왕십리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지방에서 실어온 소를 도축하는 우시장과 연탄공장이 있었고 마찌꼬방과 미군부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디론가 떠나가게 만드는 긴 철길이 있었다.”(3회)
가야 하는 목적지에서 한 정거장 못 미친 왕십리역에 내린 주인공이 본 2010년의 왕십리는 이렇다.
“왕십리 역사 앞 광장은 과시 욕구에 사로잡힌 독재자들의 광장만큼은 아니었지만 한때 이곳에서 십 년도 넘게 살았던 나로서는 꽤나 생경한 풍경이었다.”(1회)
1975년 조해일의 에서 민준태는 왕십리를 14년 만에 방문한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왕십리로 가자고 하는 것은 그곳에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돌아왔기에 휘둥그레진 눈에는 과거(1961년)와 현재(1975년)의 왕십리가 교차해 꼼꼼하게 묘사된다.
과 의 묘사를 좇아 ‘왕십리 1961년-1975년-1980년-2010년’을 재구성해보자.
1975년 전차의 궤도는 없어지고, 드럼통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서양 영화를 구경하던 광무극장은 그 자리에 남았다(). 하왕십리를 지나 왕십리 로터리 가까운 지점에서 준태는 택시에서 내린다.
“벽돌로 지은 ㄷ자 모양의 2층 건물, 다방과 당구장이 있고 식당과 여관이 있고 이발소와 목욕탕이 있는 그 건물, 근처의 거의 유일하던 종합휴양시설 같은 그 건물 말이다. 벽돌로 견고하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늘 비가 샐 것 같은 인상을 풍기던, 이름이 좋아서 ‘천지회관’이라고 불리던 건물 말이다.”
서울이라고 세월이 비껴날 리 없지만 왕십리 로터리의 ‘과거’는 아직도 남았다. 5대째 왕십리 토박이인 안광택(61·청계대주파크빌아파트 열린주민지원센터 관리사무소장)씨는 소설의 글귀를 읽고 이 건물이 ‘광심목욕탕 건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외환은행 성동지점이 있는 자리로, 새로 올린 건물은 ㄴ자 건물이다. 아직까지 그 자리에는 ‘광심미용실’이 남아 있다.
미나리꽝은 판잣집으로, 연탄공장은 아파트로의 민준태는 ‘천지회관’에서 밥을 먹고 당구를 치고 잠을 잔다. 첫날 여자를 부르고 다음날도 그와 함께 지낸다. 여자는 갑작스럽게 청혼을 한다. 시골에서 결혼을 하라고 성화인데다, 이 남자의 배려에 사랑을 느껴서 ‘깜짝 놀랄 청’을 한 것이다. 준태는 혼란스러워하며 일단 거절하지만, ‘다정도 병’인 준태는 다시 여관방을 찾아온 여자와 함께 ‘왕십리 산책’을 나선다.
“자동차가 한 대쯤 드나들 수 있는 길폭의,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머리 위로 철로가 지나가는 짧은 다리가 놓인, 한낮에도 어딘지 늘 음습해 보이고 어둑어둑해 보이던 골목이었다. 그러나 그 다리 밑만 빠져나가면 얼마 안 가 골목은 좌우로 펼쳐지는 미나리밭과 논들의 한가운데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골목이라는 이름을 사양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리 밑을 지나서 넓은 길 위로 빠져나왔을 때… 우선 시야에 나타난 것은 길 좌측에 보이는,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저탄장이었다. 그리고 그 저탄장의 전체 색깔을 닮은 지붕 낮은 판잣집들이 길 오른쪽으로 어깨동무라도 하듯 줄을 이어 지어져 있었다.”
지금도 철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에서 묘사한, 머리 위로 철로가 지나가는 다리는 이제 4차선으로 넓어졌다. 성동구청 공보팀 정지현(54)씨는 “철길을 지하로 넣었으면 좋겠지만 ‘군사용’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철길은 왕십리를 관통해 흐른다.
석탄을 빠르게 실어야 했기에 저탄장은 철길 가까이 있었다. 조현이 기억하는 ‘연탄공장’은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왼쪽에 있었다. 연탄공장의 이름은 ‘대성연탄’이었다. 연탄공장은 ‘진폐증’ 염려로 도시에서 석탄 관련 업체가 빠져나가던 시절에 철거됐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 이름은 ‘대성아파트’다. 조현이 말한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성동구청이 들어서 있다.
왕십리는 유명한 채소 재배지였다. 묘사된 대로 미나리꽝도 많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1권(공간·경제·문화)은 시대별로 왕십리를 개괄한다. 제목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는 ‘동대문 밖 채소 재배지와 물산의 교역지’, 일제강점기는 ‘경성부 교외지역의 성장과 왕십리 인구의 증가’, 6·25 전쟁에서 1960년대까지는 ‘지방민의 이주와 서민 주거지의 형성’, 1970~90년대는 ‘가내공업지대로의 변화’다. 지방민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밭은 주거지대로 변했다.
편찬에 참여한 서울역사박물관의 김상수 학예연구사는 “왕십리 주민들은 생명력이 넘치는 활발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초기에 형성될 때부터 왕십리는 서민 거주지였다. 일제시대 서울의 조선인 인구는 감소한다. 일본인 비율이 급작스럽게 늘어나면서다. 서울 인접 지역으로 조선인과 몰락한 농촌 인구가 몰려갔다. 왕십리가 속한 당시 고양군 한지면의 인구는 1930년, 1920년에 비해 2.5배 증가한다. 6·25 이후 1960년대는 지방 이주민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소설가 조현은 “왕십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계층적인 특색, 문화적 특성이 전형적인 서민들이다. 지방 이주 토박이가 문화적인 충돌을 겪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도축장, 연탄공장, 대학가, 심지어 미군부대까지 있어서 다른 서민적인 지역보다 역동적”이라고 왕십리를 표현했다.
왕십리역 앞에 모여 있던 지게꾼들역동성은 ‘중앙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민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 “왕십리는 이제껏 어느 누구의 개입 없이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도시가 조직되어온 지역이다. 다양한 직업군과 고층의 아파트 지역은 아니지만 특수한 지역성을 유지한 채 밀도 높은 주거율을 확보하였고 왕십리의 풍경을 조금씩 그리고 오랫동안 변화시켜왔다.”(서울역사박물관 1권) 이런 역동성 때문에 도시를 일거에 뒤엎는 ‘뉴타운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왕십리 뉴타운은 서울의 뉴타운 중 가장 먼저 발표됐지만, 은평 뉴타운의 입주가 끝난 지금 막 첫 삽을 떴다(10월12일).
왕십리의 활력은 왕십리역으로 집중됐다. “동대문에서 청계천변을 끼고 달려나와 뚝섬까지에 이르는, 시에서 운행하던 단선의 궤도차”()인 기동차, 전차(왕십리길에 있었는데 ‘묻었다’고 한다. “철거비가 더 드니까 아스팔트를 위에 깔아버렸지”라고 안광택씨는 말했다), 철도(구리∼청평으로 가는 노선)가 모여 있었다.
1972년 조해일은 왕십리역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9권에 수록)이다. 주인공이 ‘용솟음치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왕십리를 근거로 일하는 지게꾼에게서였다. 왕십리역 앞에는 “온 가족의 생존을 지게 하나에 걸머지고 역전 공터에 옹기종기 기대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사내들이 모여 있다. 가순호는 신식 지게들 사이에서 자연목을 그대로 쓴 지게를 든 남자를 고른다. 그들의 대화에서 놀라운 ‘당시’를 발견한다. “짐은 얼마 안 되지만 좀 먼데요.” “어딘데요?” “흑석동인데요. 가시겠습니까?” “가십시다.” 가순호는 지게에 짐을 싣고 ‘이사’를 하는 중이다. 하숙집의 짐은 버스에 들고 탈 수 있을 만큼 간단치 않고, 용달차를 부를 만큼 많지도 않다. 어쨌든 지게꾼이 짐을 지고 이사를 한다. 지게꾼이 짐을 얹고 일어서는 순간 주인공은 아름다운 뿔을 목격한다. 워낙 긴 지게의 나무살들이 하늘과 지평을 향해 뻗치면서 뿔처럼 보인 것이다. 그리고 가순호는 한 번 더 놀라는데, 지게꾼이 일어서서 내딛는 걸음이 뒤로여서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뿔을 앞세우고 얼굴은 뒤로 향한, 그 세상에서 처음 보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운동체는 그리고 한 마리 힘찬 짐승처럼 민첩하게 나아갔다. 아니, 물러갔다. 가순호는 용솟음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의뢰인과 얼굴을 마주한 지게꾼이 왕십리에서 흑석동까지 간 길이 소상하게 나와 있다(지도 설명 참조). 이 시대 사람들은 이 정도 걷는 것은 끄떡없었나 보다.
철길을 빠져나가 큰길가로 나가면 마장역이 나온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국 최고의 ‘축산물 시장’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소를 잡지는 않는다. ‘우시장’이라고 불리던 때도 소가 아니라 돼지를 잡다가 이마저도 그만뒀다. 가락시장으로, 독산동으로 옮겨갔다가 지금은 서울 시내에서 ‘잡는 일’은 없다.
“윗입술과 앞니 사이에 첫 칼을 꽂는다. 앞니를 중심으로 왼쪽 볼따구니와 오른쪽 볼따구니의 살을 안쪽에서 발라낸다. 눈과 콧등으로 이어지는 안면근육을 따라 조심스럽게 칼을 쑤시고 손대중으로 눈알과 연결된 근육을 끊는다. 머릿가죽을 들어올려 뼈가 잘 드러나게 한다. 머릿가죽을 손상시키지 않고 한 덩이로 분리해야만 나중에 털 벗기는 작업이 쉬워진다.”(천운영, , 2000년 창비 에 수록)
목격하기는 어려운 ‘발굴’ 현장‘소머리 가르는 놈’ 대창씨는 이어서 ‘위턱 아래턱 벌리고, 혓바닥을 끊고, 입천장과 입바닥을 갈라내고, 아랫입술을 떼어내고, 머리뼈를 앞으로 잡아당겨 머릿가죽을 벗겨내는’ 일을 2분 만에 해낸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을 지나가도 이런 ‘발굴’ 현장을 보기는 어렵다. 고기를 쌓아놓은 안쪽에서 고기를 발라낸다. 사진 찍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 여전히 소머리를 가르거나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일은 숨기고 싶은 일이다.
왕십리 뉴타운이 들어서는 곳은 ‘곱창골목’이었다. 마장동에서 나온 ‘싱싱한’ 부속을 가져다 구워먹었다. 그래서 왕십리길 새로운 건물에는 그곳에서 빠져나온 곱창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왕십리가 항상 ‘과거’로 호출되는 것은 ‘과거’를 환기하는 ‘현재’가 여전했기 때문이다. 땅장사들의 ‘덩어리 땅’이 아니라 조금씩 나뉜 땅을 일하는 서민들이 나눠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거리는 왕십리 역사처럼 왕십리 뉴타운이 번쩍거리게 되면 이제 과거는 영원히 가도 가도 ‘왕십리’가 될 터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서울 문학 산책 ③ →
왕십리역 1번 출구로 나오면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쪽에 여기가 성동소방서 자리였음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놓여 있다. 그대로 직진하면 외환은행 성동지점이 있다. 그 건물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해 골목으로 들어가면 ‘광심미용실’①이 있다. 예전에 당구장, 목욕탕, 여관을 함께 갖췄던 그 지역 유일의 위락시설 ‘광심목욕탕’의 흔적이다. 돌아나와 길을 건너 왕십리 역사로 향한다.
김소월의 ‘왕십리’를 적은 시비는 새로 만들어진 왕십리 민자역사② 한켠에 놓여 있다. 우체국 앞 공원에 있던 것을 성동문화센터 앞으로 옮겼다가 민자역사가 생겨날 때 다시 옮겼다. 본문의 인용문은 시비 표기대로 옮긴 것이다.
성동구청 앞을 지나 도선사거리까지 걸어간다. 금형공장이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길 앞으로 열차가 지나는 철길 밑 도로③가 나타난다. 그 길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대성아파트’는 옛날의 연탄공장 ‘대성연탄’의 흔적이다. 길을 따라가다 대성아파트 앞 도로와 만나는 곳에 예전에 연탄을 실어나르던 철로가 있었다. 길을 건너 큰길 쪽으로 나가서 마장 축산물 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아 골목길로 접어든다. 마장초등학교를 지나면 앞쪽으로 변전소가 보인다. 이곳은 의 준태가 떠나기 전 연인인 정희를 만나곤 하던 변전소다. 에는 이 앞으로 기동차 정류장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부근이 축산물 시장④이다.
오후 2시면 가장 번잡하고 오전이면 안쪽에서 바쁘게 ‘발굴’하는 현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장은 꽤 길다. 시장을 반으로 가른 것은 아까 보았던 철길이다. 시장 끝까지 걸어간다.
의 지게꾼이 지나간 길 →
육합춘(지도에 표시)~광무극장~중앙시장~신당동 네거리~시구문(중구 광희동, 서소문과 함께 주검을 내가던 서울 사소문의 하나)~퇴계로~동국대학~대한극장~성심병원~아스토리아 호텔~프린스 호텔~산업경제신문사~DP&E, 블론디~정 건강관리연구소~육교 밑~서울특별시 농업협동조합~서울역~교통센터~USO~동자동 버스정류장~대림산업~칠성사이다~성남극장~용산 미군부대~용산전화국~용산우체국~미원 주식회사~철우회관~대한여행사 관광버스 영업소~신진자동차 용산서비스 센터~한남동 맨션아파트마을이 보이는 길~한강대교~헌병파견소~새 하숙집.
의 지게꾼은 왕십리 역에서 상왕십리역 방향으로 왕십리길을 걸어갔다. ‘왕십리로 28길’로 들어서는 길에 있는 제비표페인트 자리가 ‘육합춘’이었다. 화교가 세운 중국집인데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왕십리 뉴타운’이 시작된다. 본문에도 지명이 나오는 광무극장은 현재 교통안전회관 자리다. 왕십리길을 따라 신당역으로 가는 길, 도로교통공단 사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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