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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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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생각의 유희’ 제공하는 잡지를”

‘세계 최고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마르틴 되리 부편집장 인터뷰…
“참신하고 세련됐다면 보수적인 글도 얼마든지 실어”
등록 2010-03-19 15:49 수정 2020-05-03 04:26
“시사잡지는 독자에게 ‘생각의 유희’, 즉 자신의 생각을 살찌우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마르틴 되리 <슈피겔> 부편집장.

“시사잡지는 독자에게 ‘생각의 유희’, 즉 자신의 생각을 살찌우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마르틴 되리 <슈피겔> 부편집장.

독일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은 2002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예술가를 물색했다. 적임자로 장 피에르 쿤켈이 정해졌다. 쿤켈은 파월·럼즈펠드·부시를 각각 배트맨·야만인 코난·람보처럼 그렸다. ‘부시의 전사들’을 그린 당시 표지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이 그림은 여러 신문에도 그대로 실렸고 마침내 포스터 인쇄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구입했고, 백악관도 구매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6년 뒤, 은 이 모티브를 다시 살린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내보였다. 역시 쿤켈이 부시와 그 심복들을 그렸다. 이번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한 남루한 패잔병 부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백악관에서 포스터를 사가지 않았다고 한다.

매주 전세계적으로 110만 부가 팔리는 중도좌파 성향의 독일 시사주간지 은 독일은 물론 유럽과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로 정평이 나 있다. 최근 마르틴 되리(55) 부편집장이,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이는 ‘슈피겔의 예술’ 전시회(서울 순화동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3월25일까지)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3월5일 이 전시장에서 과 만난 되리 부편집장은 “시사잡지를 포함해 언론매체는 사주로부터 편집 독립성을 지킬 수 있어야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도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며 “이런 기초 위에서 훌륭한 기획도 나오고 빼어난 표지 일러스트레이션도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에 입사한 지 23년차 되는 기자다.

- 중도좌파 성향의 이 독보적 영향력을 구가하는 원천으로 흔히 권력에 대한 집요한 비판과 날카로운 분석이 꼽힌다. 이번에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전시회를 여는 이유는.

= 의 또 다른 강점은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에 있다. 시사잡지의 성공 여부는 표지에 달려 있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은 잡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단박에 설명하면서도 독자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지녀야 한다. 표지의 고유한 상징은 빨간색 테두리다. 이 테두리는 1947년 창간 때 도입돼 지금껏 약간의 변화만 거쳤을 뿐이다. 몇십 년 동안 이 표지 테두리 안에 유명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 혹은 예술가의 흑백 초상화 하나만 등장했다. 그 뒤 컬러사진을 도입하면서부터는 여전히 인물사진을 충실히 싣되 그 뒷배경을 점점 더 첨가했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인물화를 배제하고 거의 모든 표지를 그림이나 포토 몽타주로 바꿨다.

- 시사주간지의 특성상 시간에 쫓기면서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들어야 할 텐데.

= 만의 독창적인 표지 그림은 이 작업을 맡아줄 예술가들을 찾아나서면서 시작된다. 시간을 다투면서 급박하게 만들어지는 일러스트레이션도 많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중 30% 정도는 최소한 몇 주 또는 한 달 정도 기간을 두고 기획된다. 안에 일러스트레이션 전담자 5명이 있는데 이들이 전세계 예술가 네트워크를 활용해 예술가들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일을 맡긴다. 유채와 아크릴로 그려진 후보작들이 본사로 배달되고, 편집장을 포함해 여러 명이 심사숙고한 끝에 표지로 장식될 작품을 최종 결정한다. 시사잡지 표지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언어가 살아 있다. 그림이 말을 걸고, 독자와 대화하는 것이다. 의 표지 그림은 새로운 미학과 모더니티를 표현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편집 이사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때로는 엉뚱한 말로 농담이 오가기도 한다. 이런 대화 자리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계획 없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방향이 바뀌어 준비했던 표지가 일거에 폐기되고 새 아이디어가 훨씬 더 마음을 끌면서 표지 이야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슈피겔>이 2002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선보인 ‘부시의 전사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왼쪽)과 6년 뒤 <슈피겔>이 다시 내건 ‘부시와 그 패잔병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두 표지 모두 세계적인 이목을 끌어모았다.

<슈피겔>이 2002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선보인 ‘부시의 전사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왼쪽)과 6년 뒤 <슈피겔>이 다시 내건 ‘부시와 그 패잔병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두 표지 모두 세계적인 이목을 끌어모았다.

- 인터넷 시대에 시사잡지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 나는 미래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20∼30년 뒤에는 잡지가 사라질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잡지를 읽는 독자가 여전히 부분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에 대응해 은 지금 아이패드나 아이폰용 슈피겔 애플리케이션 등 크로스미디어를 전사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전자책 개발도 역점을 두고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각종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시대에 맞춰 콘텐츠를 생산하는 편집국도 바뀌어야 한다. 사실 지금 내부에서 편집회의가 너무 많다. 편집과 인쇄 과정에서 의사결정 단위가 위에서 아래까지 너무 많이 계층구조화돼 있다. 이런 비효율적인 낭비 요인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광고시장 위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데.

= 판매부수는 아직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적자로 돌아선 건 아니지만 광고 감소로 인해 수익이 3분의 1가량 줄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업무시간 관리 측면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등 자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단 한 명도 해고는 하지 않았다.

- 은 독일어로 ‘거울’을 뜻한다고 알고 있다. 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뭔가.

= 사원들이 주식 지분 50.5%를 보유하고 있다(1947년에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전 발행인이 창간한 은 사원주주회사다. 아우크슈타인은 1974년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절반을 직원들에게 양도했다). 기자를 포함해 모든 사원이 ‘편집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의 큰 강점이다. 이는 우리 기자들의 특권이기도 하고, 독자가 에 뭔가를 기대하는 원천도 된다. 권력에 대한 집요한 비판 등 독자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해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우리 잡지가 성공할 수 있는 핵심 열쇠다.

- 250여 명에 이르는 기자들은 모두 중도좌파 성향인가.

= 좌파 혹은 중도파가 90%에 이르고 10% 정도는 보수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제정책 등을 둘러싸고 편집국에서 갑론을박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 기자들끼리 무진장 싸운다. 하지만 이런 활발한 토론이 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 중도좌파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는 대다수 기자가 동의하고 있다. 독자 쪽을 보면, 과거에는 보수와 좌파 쪽으로 명확히 구분되었으나 최근에는 이런 구분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사안별로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진보적이었다가 어느 때는 보수적인 가치를 따르기도 한다. 독자를 무조건 묶어놓으려 하면 안 된다. 독자에게 더 많은 선택의 재미를 줘야 한다. 기자들 역시 변하고 있다. 창간 이후 1998년까지는 에 기자 이름은 전혀 표기되지 않았다. ‘집단적 책임’이란 원칙 아래 동질화를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글을 쓴 기자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젊은 기자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젊은 기자들이 자기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드러내고 싶어했고, 이를 경쟁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편집장으로서 나는 이런 경쟁 구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은 새로운 독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 최근 의 진보좌파적 지향이 다소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는데.

= 온라인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서 전통적인 종이 시사잡지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인터넷 매체 확산과 함께 독자들이 연예오락물 쪽으로 경도되는 흐름은 다소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치·경제 등 무거운 이슈에 대한 수요도 여전히 많다. 다만, 잡지가 중도좌파 도그마에 빠지는 건 경계해야 한다. 비록 보수적 관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참신하고 세련되게 표현될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깊게 고민하게 하는 ‘멋지고 훌륭한 글’이라면 지면에 언제든지 실릴 수 있어야 한다. 독자에게 ‘생각의 유희’, 즉 자신의 생각을 살찌우는 기회를 제공하는 잡지가 돼야 한다.

-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의견은.

= 모든 언론매체는 기존 독자와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독자의 수를 늘리기에 앞서 기존 독자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저널리즘이 안고 있는 문제는 소유주로부터 독립성이라고 들어왔다. 언론사 사주로부터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으면 기존 독자와의 좋은 관계도 틀어질 수밖에 없다.

글 조계완 기자 경제월간지 창간 준비팀 kyewan@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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