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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의 ‘고객’이 되거나 떠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JYP와 2PM의 몇몇 팬덤… ‘의리’ 판타지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등록 2010-03-12 13:20 수정 2020-05-03 04:26

“저희는 회사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말씀드릴 때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재범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지난 2월27일 JYP엔터테인먼트(이하 JYP)의 정욱 사장은 그룹 2PM을 동석시키고 팬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JYP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사생활 문제”로 영구 탈퇴시킨 멤버 재범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담회는 오히려 JYP와 2PM의 몇몇 팬덤을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다.

지난해 박재범의 2PM 탈퇴 발표가 나오자, 소속사 앞에서 탈퇴 철회를 요구하는 팬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해 박재범의 2PM 탈퇴 발표가 나오자, 소속사 앞에서 탈퇴 철회를 요구하는 팬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재범 복귀를 기원하며 지었다던

간담회 이후 2PM의 몇몇 팬덤은 기자들에게 “JYP를 고발합니다” 같은 전자우편을 수백 통씩 보냈다. JYP가 재범 탈퇴를 둘러싼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고, 2PM마저 재범의 탈퇴에 동의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반면 JYP는 멤버들의 사생활 루머를 퍼트리고 신상정보를 해킹한 일부 팬들을 법적 조처하겠다고 밝혔다. 마치 전쟁을 치르는 듯한 팬덤과 기획사의 충돌은 지금 아이돌 산업의 균열을 보여준다. JYP는 재범의 탈퇴를 기업 비즈니스의 논리로 푼다. 그들은 재범의 사생활이 기업 활동에 치명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PM이 재범을 “좋은 형”이라 말하면서도 탈퇴에 동의한 건 그들이 자신의 직장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로 돌아선 2PM의 몇몇 팬덤에게 2PM의 이런 행동은 ‘배신’이다. 그들에게 아이돌은 춤과 노래 이전에 멤버들의 ‘의리’ 판타지를 파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남자들이 때론 싸우고 문제도 일으키지만 결국 함께 성장한다는 스토리는 만화 부터 문화방송 까지 수많은 인기 콘텐츠의 핵심적 판타지고, 아이돌 그룹은 이를 현실에서 보여준다. 아이돌은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팬들을 위하고 멤버를 서로 챙기는 스타들이다.

물론 아이돌 팬들이 그 모습을 다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돌의 ‘사생팬’(스타의 사생활을 좇는 팬)은 아이돌의 온갖 사생활을 알고, 몇몇 팬덤은 자신의 아이돌이 문제가 되면 다른 아이돌의 비슷한 사례를 언론에 제보할 만큼 조직적이다. 그러나 팬은 지극히 현실적인 팬덤 활동을 통해 아이돌이 주는 1%의 판타지에 희열을 느낀다. 내가 지지한 아이돌이 서로의 의리를 지키며 인기를 얻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열성적인 아이돌 팬덤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다. 그들은 아이돌을 통해 자신의 판타지를, 꿈을 투사한다. 신화가 아이돌 업계에서 ‘원로’ 대접을 받는 것도 10년 이상 한 명도 탈퇴하지 않고 그룹을 유지한 점이 크다.

그리고 신화의 멤버 이민우가 “과거의 우리 같다”고 말했던 2PM은 근래 들어 이 판타지를 가장 자극했다. 그들은 케이블 방송 ‘MBC에브리원’ 에서 자신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덤을 키웠다. 게다가 JYP는 재범이 지난해 한국 비하 논란으로 미국으로 떠난 뒤 2PM의 앨범 타이틀을 재범의 복귀를 기원하는 로 지어 멤버들의 ‘의리’를 부각시켰고, 팬들 역시 그들의 의리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현재의 2PM 안티 팬들에게 2PM이 재범의 탈퇴에 동의한 건 ‘의리’를 구입한 고객을 기만한 것과 같다. 팬들은 언제나 7명일 것을 믿고 앨범을 샀는데, 멤버들은 그들이 때론 헤어질 수 있는 동료였다고 말한다.

이 입장 차이는 지금 아이돌 시장의 범위 변화와 관계 있다. 재범의 사생활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면 JYP가 재범을 안고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JYP 입장에서는 재범의 사생활 문제를 감춰 모든 비난을 자신들이 지고 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JYP가 굳이 2PM이 재범의 탈퇴에 동의했음을 알린 것은 기존 팬덤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2PM은 팬덤의 지지로 성장했지만, 지금 2PM은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 CF에 출연한다. 2PM의 수익 활동에 필요한 건 팬덤의 열성적 지지보다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다. 그리고 JYP는 대중에게 재범 탈퇴의 이유를 모두 밝히며 그들이 회사에 필요한 도덕성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팬덤에서 대중으로, 해외로

한때 열성적인 아이돌 팬덤은 기획사의 가장 강력한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음악 시장은 갈수록 축소되고, 아이돌의 상품을 무조건 살 열성적 팬덤의 수는 쉽게 늘지 않는다. 그리고 기획사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아이돌의 정의를 바꿨다.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는 앨범과 앨범 사이에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개개인의 인지도를 높이려 노력한다. 인기 남자 아이돌 그룹은 국내 못지않게 해외 활동을 자주 한다. 과거의 아이돌은 팬덤에 집중했지만, 지금의 아이돌은 팬덤에서 시작해 대중으로, 해외로 나간다.

물론 2PM을 비롯한 아이돌은 여전히 많은 팬덤을 가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2PM의 ‘의리’를 샀다 해도 그들의 팬이 멤버들의 신상정보를 해킹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그만큼 아이돌 팬이 자신의 아이돌에 열광하고, 아이돌 팬덤이 신인 아이돌을 밀어올리는 일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의리는 사라졌다. 팬들과 아이돌이 서로 지켜야 할 의리도 사라졌다. 이 새로운 시대 앞에서 아이돌의 팬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2PM의 팬들은 자신을 ‘고객’으로 불렀다. 그건 아이돌의 일을 스스로 농담 삼아 ‘비즈니스’라고 말하는 요즘 아이돌의 현실을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이제 아이돌의 열성팬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아이돌의 엔터테인먼트만을 즐기는 고객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1%의 판타지의 세계에서 떠나거나.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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