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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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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보았나

미국 대공황 때 공공의 환호 받던 ‘공공의 적 1호’ 존 딜린저의 내면을 그린 누아르 <퍼블릭 에너미>
등록 2009-08-13 17:42 수정 2020-05-03 04:25

“어디든 갈 수 있어. 모든 걸 다 보여줄게.”
존 딜린저는 대공황이 시작된 지 4년째인 1933년부터 13개월 동안 2번의 탈옥과 11번의 은행털이를 감행한 미국 시민의 ‘영웅’이었다. 그는 시민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은행의 돈은 가져가되 시민의 개인 돈은 건드리지 않고, 여성 앞에서는 농담으로라도 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가 잡혔을 때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메웠다. 그도 인기 관리에 나섰다. 그는 동료가 납치를 제안하자 대중이 싫어한다며 반대했다. “대중이 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은 그의 원칙이었다. 그는 경찰의 권위를 비웃는 아이콘이었다.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체포 전담반을 구성하고 그를 ‘공공의 적 1호’로 지목했다. 공공의 적이었으나 공공은 환호했고, 경찰은 자신들의 정의를 ‘공공’으로 치장했다. 경찰에 쫓기는 처지였지만 딜린저는 비싼 옷, 빠른 차, 위스키와 함께 사랑하는 이 앞에서도 당당했다.

〈퍼블릭 에너미〉

〈퍼블릭 에너미〉

로맨스 한편에 영혼을 이해하는 버디

이름 끝에 ‘e’가 붙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인 빌리 프레셰는 어머니가 메노미언족 인디언인, 어디로 멀리 떠나본 적이 없는 ‘새장 안의 검은 새’였다. 그는 드나드는 사람의 옷을 받아걸고 그 사람이 일을 보고 나오면 옷을 찾아주는, 클럽에서 코트 봐주는 일을 했다. 붙박이인 그는 오가는 자유인을 응대하는 것이 일이었다. 딜린저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빌리에게 약속한다.

마이클 만 감독의 는 이 모순에 집중한다. 존 딜린저(조니 뎁)는 어디든 가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무엇이든 할 것을 약속하지만 아무것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이미 제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거물이다. 거물일수록 관성은 큰 법이다. 넓은 집에 묵지만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두어야 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형지물을 확인하고 퇴로를 살펴야 한다. 화려한 곳으로 멀리 떠나왔으나 빌리는 말한다. “이 클럽을 떠나지 못할 거예요.” 갑작스럽게 딜린저가 체포된 뒤 경찰은 같이 있던 빌리를 버스에 태워 시카고로 보낸다. 시카고는 그가 일하던 곳이다.

영화는 화려하게 보이는 범죄 행각이 감추지 못하는 죽음을 공들여 연출한다. 딜린저가 비극을 함께 나누는 이는 그를 쫓는 멜빈 퍼비스(크리스천 베일)다. 퍼비스는 수사반 최고의 G맨(Government Man)으로, 과학적 수사로 명성을 얻고 딜린저 체포 전담반 수사관이 된다. 마이클 만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의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처럼 둘은 항상 서로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참혹한 경주다. 감독은 딜린저와 퍼비스가 서로 영혼을 이해하는 사이인 듯 그리며, 영화를 ‘버디영화’처럼 엮는다.

딜린저가 등장하는 영화 첫 신의 마지막,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옥 사건에서 그는 따르던 동료 월터를 잃는다. 총을 맞은 월터는 절뚝거리며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차에 올라타려 한다. 딜린저는 손을 꼭 잡고 월터를 끌어올리지만 똑바로 쳐다보는 월터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카메라는 길게 그 순간을 목도한다. 잇따르는 퍼비스의 첫 등장 신. 딜린저 체포 전담반에 오기 전 그의 이름을 드높인 프리티보이 수색 사살을 그린 장면이다. 과수원에서 프리티보이는 퍼비스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쫓아간 퍼비스는 쓰러져 피가 쿨럭이는 그를 앞에 두고 동료가 어딨는지 묻는다. 프리티보이는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하느냐며 “내 본명은 찰스이고 당신은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저주한다. 프리티보이의 눈도 서서히 초점을 잃어간다. 퍼비스는 그를 꼿꼿이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퍼비스가 딜린저를 감옥에 넣은 뒤 딱 한 번 둘은 감옥에서 대화를 나눈다. 딜린저는 퍼비스가 죽인 자신의 동료가 즉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의 눈빛이 아른거리지. 그 생각에 잠이 안 올걸”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죽어갈 땐 다를걸.”

허세를 부렸지만 딜린저 역시 죽는 이의 눈빛이 어른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상처를 같은 상처를 가진 이에게 말한 것이다. 죽는 자는 눈을 감는 것으로 모든 걸 잊는 면죄부가 주어지지만, 그것을 지켜본 자는 죽음을 눈 속에 담게 된다. 죽음의 종류에 즉사는 없다.

딜린저 역시 바로 죽지 못했다. 죽기 전부터 그는 이미 죽은 것과 비슷했다.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료는 모두 죽었다. 돈세탁을 해주던 이는 다른 ‘한탕’ 계획으로 그를 외면한다. 그를 숨겨주던 이는 그를 밀고한다. 빌리는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다. 딜린저는 그를 모델로 한 주인공이 등장한다고 알려진 를 본다. 영화관 주위에는 경찰들이 좍 깔렸다. 퍼비스의 담배 라이터 신호만 기다리고 있다. 딜린저가 보는 영화인 에서 주인공인 클라크 게이블은 사형장으로 빨리 가자고 웃으며 재촉한다. 딜린저는 한가롭게 ‘시카고 경찰서’에 마련된 ‘딜린저 체포 전담반’을 둘러보고, 야구 경기를 라디오로 듣던 경찰에게 “몇 대 몇이오?”라고 묻기까지 하고 온 뒤였다. 덫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유유히 빠져나온 곳이 덫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맞은 그는 천천히 죽어간다. 자막으로 알려주는 사정에 따르면, 퍼비스는 1960년 자살을 했다고 한다.

느릿느릿한 ‘리얼’ 액션

영화는 딜린저의 내면을 비추기 위해 바로 그 장소가 필요했다.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옥, 인디애나 크라운포인트 교도소 탈옥, 리틀 보헤미아 트래블로지 대탈주극을 실제 장소에 가서 촬영했다. 당시의 무거운 총기들도 배우가 직접 들었다고 한다. 느릿느릿한 액션은 ‘리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총들이 난사되는 와중에도 맞는 사람들을 똑똑히 비춘다. 꼿꼿한 남부 G맨 크리스천 베일은 1930년을 재현하기 위해 퍼비스의 아들에게 남부 사투리를 배웠다. 순식간에 관객을 포섭하는 매력을 갖춘 조니 뎁은 딜린저의 매력이 그랬을 거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8월12일 개봉.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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