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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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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음식점, 5천원의 행복


경기 안산 원곡동에 오밀조밀 모인 베트남·인도·몽골·우즈베키스탄 음식점 여행
등록 2009-01-09 16:45 수정 2020-05-03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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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3366"><font size="3"> ‘보트피플’은 음식을 싣고</font></font><font color="#003366"> 이른바 ‘보트피플’로 불리는 베트남 난민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날 베트남 음식의 세계화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갑자기 난민이 돼 서구로 떠났던 베트남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기에 먹고 살아온 음식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 그들의 끈질긴 생존 투쟁의 결과로 베트남 쌀국수는 지구적 음식이 되었다. 또 세계 각국 남성과 결혼해 이주한 타이 여성이 없었다면, 지금은 서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타이 음식의 열풍도 불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이주는 사람만 보내지 않는다. 사람이 오면 음식이 오고 문화가 온다. 또 사람이 있으면 음식점이 생긴다. 이주노동의 설움을 음식으로 달래려는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식당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밀집지구인 경기 안산시 원곡동에는 본토의 맛에 저렴한 가격까지 겸한 외국 식당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렇게 이주노동자들은 그곳에 모여 입맛을 달래고 설움을 나눈다. 때로 그곳은 단순한 식당을 넘어 향수를 달래는 사랑방 구실도 한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음식 냄새가 풍기고, 사람의 향기가 난다.</font>

베트남 고향 식당엔 베트남 사람밖에 없었다. 지난 12월30일 오후 2시께, 경기 안산시 원곡동 안산역 앞의 ‘베트남 고향 식당’(031-492-0865)에 들어섰다. 식당 가운데 베트남 국기와 호찌민 사진이 보였다. 평일 오후지만 두어 개 테이블에 각각 대여섯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둘러앉아 베트남 음식에 한국 소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불콰한 얼굴의 이들은 주인인 레티 하이 투(한국 이름 이미현)와 이따금 얘기도 나눴다. 레티는 “여기에 오는 손님의 80~90%는 베트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불황으로 안산·시화공단 공장이 생산을 줄이면서 낮 손님이 늘었다. 이날 식당에서 기자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베트남 고향 식당의 주인도, 손님도,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도 모두가 베트남 사람들이다.

‘국경 없는 마을’에는 오리 목을 비롯한 중국 거리음식들이 즐비하다.

‘국경 없는 마을’에는 오리 목을 비롯한 중국 거리음식들이 즐비하다.

설날 음식 ‘반찡’의 구수한 향

이곳은 ‘진짜’ 베트남 음식을 한다고 소문난 식당이다. 더구나 가격까지 ‘착하다’. 베트남 쌀국수 ‘포’가 5천원, 베트남식 튀김만두인 ‘반다넴’이 7천원, 베트남 특유의 요리인 개구리 라엠 고추 볶음이 2만원 등이다. 개고기 육수로 만든 ‘개고기 국수’도 저렴한 6천원에 ‘모시고’ 있다. 요즘 부쩍 늘어난 대도시의 베트남 식당보다 30% 이상은 저렴한 가격이다.

유명한 베트남 음식이자 한국인의 입맛에 ‘안전한’ 포와 반다넴을 주문했다. 맑은 쇠고기 육수에 넙적한 국수를 넣은 포가 나왔다. 여기에 레몬 한 조각, 빨간 쥐똥고추, 고수가 따로 접시에 담겼다. 그리고 또 다른 쟁반엔 숙주가 그득히 담겨 있었다. 사실 시중에서 파는 쌀국수는 국적이 베트남인지, 타이인지, 중국인지 혹은 한국인지 모호할 정도로 정체가 불명확하다. 때로 중국에서 먹었던 국수처럼 국물이 탁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국물은 담백하고 시원했다. 비결은 레티 모녀의 손맛이다. 필요한 식재료는 베트남에 있는 어머니가 만들어 보내고, 음식은 레티가 관리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3명의 직원도 모두 베트남 사람이다. 포와 함께 나온 반다넴은 양이 많았다. 2명이 함께 먹어도 충분할 정도의 양이다. 쌀로 만든 피에 목이버섯, 당근, 파, 고기, 당면 등을 넣고 바싹 튀겨낸 반다넴은 씹히는 맛이 한국식 만두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흔히 달콤한 소스를 찍어 먹는데 씹을수록 풍부한 맛이 났다. 사람에 따라 조금 느끼할 수도 있는데, 함께 나오는 상추에 싸먹으면 시원한 맛이 더해져 뒷맛이 깔끔하다. 2명이 베트남 쌀국수 두 그릇에 반다넴 한 접시를 시키면 충분할 정도의 양인데, 이렇게 주문하면 1인당 1만원도 나오지 않는다. 베트남 정통음식을 즐기는 만원의 행복이 ‘국경 없는 마을’에선 가능하다.

다음날 다시 찾은 베트남 고향 식당에는 구수한 냄새가 그득했다. 식당 난로 위에 올려놓은 솥에서 냄새가 피어났다. 솥 안에서 베트남 설날 음식인 ‘반찡’이 끓고 있었다. 반찡은 찹쌀 안에 녹두와 고기를 넣어 만든 일종의 떡이다. 이날은 레티의 남편인 최을식씨가 식당에 있었다. 최씨와 레티는 1998년 안산 염색공장에서 만나 결혼했다. 2002년 안산 라성시장에서 조그만 국수 가게를 열었고, 2005년엔 원곡동으로 이전했다. 음식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최근 안산역 앞으로 가게를 넓혀 옮겼다. 최씨는 “이제 원곡동에 베트남 식당이 4개에 이른다”고 전했다. 대개는 베트남 부인과 한국인 남편이 하는 가게다. 음식을 제대로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자본을 댈 테니 서울 강남에 베트남 식당을 내자는 제안을 최씨에게 해온 사람도 있었다.

‘베트남 고향식당’의 만두 반다넴, 쌀국수 포, 컨트리 하우스의 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나시고렝, 양고기 꼬치구이 사테 캄빙(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고향식당’의 만두 반다넴, 쌀국수 포, 컨트리 하우스의 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나시고렝, 양고기 꼬치구이 사테 캄빙(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산시 원곡동은 ‘이주노동자의 서울’로 불릴 만큼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이라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그래서 외국 식당은 그 나라 고유의 맛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안산역 건너편에서 시작해 원곡본동사무소에 이르는 300~400m의 ‘국경 없는 마을’에는 80여 개 다국적 음식점이 있다. 이곳 음식점들은 서울 강남이나 이태원은 물론 동대문에 밀집한 외국 음식점에 견줘도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저임금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원곡동은 전국에서 식료품 가격이 가장 저렴한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냉장고마다 붙은 라마단 일정표

레티가 권하는 베트남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거리로 나섰다. 국경 없는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공원을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컨트리 하우스’(031-494-9471)가 나온다. 식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쿠란 구절이 보인다. 망고, 구아바 등 인도네시아산 음료수가 가득한 냉장고에는 이슬람 금식월 라마단 일정표가 붙어 있다. 냉장고 위 TV에선 인도네시아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면 외국인 점원이 ‘짧은’ 한국어로 묻는다. “인도네시아 음식? 방글라데시 음식?” 국경 없는 마을에서도 한적한 곳에 위치한 컨트리 하우스는 이렇게 두 가지 음식을 하는 식당이다. 대부분의 원곡동 외국 식당처럼 외국산 식료품과 공산품을 파는 가게도 겸하고 있다. 식사를 하러 들렀다 인도네시아산 망고나 스리랑카산 향신료를 싸게 살 수도 있다.

주말이면 국경 없는 마을은 인천, 평택 등에서 친구를 만나러 온 이주민들로 붐빈다. 여기에서 일주일치 식료품 등을 사가는 이들도 적잖다.

주말이면 국경 없는 마을은 인천, 평택 등에서 친구를 만나러 온 이주민들로 붐빈다. 여기에서 일주일치 식료품 등을 사가는 이들도 적잖다.

컨트리 하우스를 찾은 이틀 동안 주로 양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어보았다. 첫날엔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에서 많이 먹는 모턴 커리와 얇게 만든 밀가루 빵인 로티를 주문했다. 커리 5천원에 로티 두 장을 시키면 모두 7천원. 양고기를 소스에 찍어 로티에 싸먹었는데, 역한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소한 맛이 입에 오래 남았다. 다른 음식도 달 커리 4천원, 탄두리 치킨 1만2천원 등으로 저렴했다. 둘쨋날은 인도네시아 음식을 시켰는데, 양고기 꼬치에 인도네시아식 스낵과 밥이 곁들여 나오는 사테 캄빙과 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나시고렝이 각각 6천원이었다. 향신료에 볶아낸 나시고렝은 고소했고, 사테 캄빙은 닭고기 꼬치에 견줘도 느끼하지 않았다. 여기서 파는 20여 가지 인도네시아 음식은 각각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양인데, 모두 6천원을 받는다. 여기에 밀크티인 차이(2천원) 한 잔을 후식으로 곁들여도 1만원짜리 한 장이면 충분하다. 컨트리 하우스가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현지의 맛으로 내오는 비결은 주방에 있다. 이곳의 다국적 주방은 인도·인도네시아 출신 주방장과 우즈베키스탄 출신 ‘보조’로 구성돼 있다.

중국어 간판에 ‘토종 똥개’ 알림

원곡동 골목에 있는 컨트리 하우스도 한파는 비켜가지 않았다. 갈수록 심각한 불황에 계속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겹치면서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 파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최경자씨는 “주말마다 오던 외국인 손님이 보이지 않으면 단속으로 쫓겨났나 보다 생각한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는 이별인 것이다. 예전에 컨트리 하우스는 주말이면 새벽 2~3시까지 이주노동자들로 붐볐지만 요즘엔 주말에도 일찍 문을 닫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추방을 당했고, 남은 이들도 단속이 무서워 거리로 잘 나오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고 이곳에 한국인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니다. 최씨는 “우리나라 음식은 오래되고 허름한 식당을 찾아가지만, 외국 음식은 비싼 식당에서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고 꼬집었다. 비록 내부 장식이 화려하진 않아도 원곡동의 식당에선 제대로 된 외국 음식을 내놓는데 찾아오는 한국 손님이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젊은 층이나 동네 사람들 중엔 단골이 적잖다.

원곡동이 얼마나 ‘인터내셔널’한지는 컨트리 하우스를 나오면 한눈에 보인다. 컨트리 하우스 옆에는 ‘원곡 개고기 축산’이 있고, 그 옆에는 ‘몽골리안 라이프’가 있고, 그 옆에는 ‘동북 식당’이 있다. ‘원곡 개고기 축산’에는 중국어 간판과 함께 ‘토종 똥개’라는 알림이 붙어 있다. 이곳의 주인은 한국인이지만, 손님은 중국인이다. ‘원곡 축산’의 주인은 “대부분의 개고기를 중국인이 사간다”며 “국산 개라고 하면 이들도 좋아해 그렇게 썼다”며 웃었다. ‘몽골리안 라이프’에서는 몽골 음식과 함께 몽골 물품을 판다. 여기서 몽골식 만두를 맛보고 나면 동북 식당에선 ‘북경 오리’를 살 수 있다. 이런 가게를 지나 우즈베키스탄 음식점 ‘훌세라 샤마르칸’(031-492-6984)에 들어섰다. 이곳은 큼직한 빵 속에 양념을 한 고기가 들어간 사므싸(2천원), 크림소스와 비슷한 국물에 삶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물만두 만튀(5천원) 등이 유명하다. 여기에 곁들일 다양한 러시아 맥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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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세라 샤마르칸의 벽에는 표창장이 걸려 있다. “내·외국인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다양한 문화체육 행사에 적극 참여”한 공로로 안산시장이 2007년 훌세라 샤마르칸의 주인 쉐리줘드에게 준 상이다. 쉐리줘드는 벌써 10년째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해왔고, 4년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도 한국에서 키우며 여기에 정착하고 싶어한다. 그는 “멀리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고향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서 식당을 열었다”며 “우즈베크 사람뿐 아니라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 사람들이 다 온다”고 말했다. 주방은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가 맡는다. 선한 얼굴의 쉐리줘드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다”며 “외국 사람들은 몇 년 살다가 가지만, 한국인들은 계속 사니까 단골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웃었다.

이렇게 국경 없는 마을에는 국경 없는 음식이 있고, 국경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열대과일 두리안을 파는 식료품점을 지나 아랍어가 적힌 노래방을 거쳐 국경 없는 마을의 끝에 이르면 주먹만 한 꽃빵을 500원에 파는 중국 가게가 나온다. 이렇게 세상 구경을 하면서 다니다 출출하면 5천원짜리 외국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된다. 지금 여기에 세계가 있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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