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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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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뻔한 아침드라마가 좋다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등 권선징악·해피엔딩의 ‘아줌마 맞춤형’ 드라마들

▣ 이문혁 CJ엔터테인먼트 드라마사업팀 프로듀서

영화 에서 뻣뻣하기 그지없던 감독은 말한다. 믿을 건 아줌마들밖에는 없다고. 비단 핸드볼의 얘기만은 아니다. 드라마도 최후의 보루는 아줌마다. 아니 최소한 시청률에서는 그렇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주인공의 결혼율이 급상승하고 미혼 여성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에서 보여지듯, 요즘 드라마가 이른바 ‘망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 가지다. 일단 아줌마들을 잡는 것. 을 만들든 고 외치든 간에, 30대 이상의 주부 시청자가 보기 힘든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 선수들을 유럽식으로 개조하려고 했던 신참내기 감독의 치기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느낌 빼고 수식어 빼고, ‘아줌마 맞춤형’ 드라마가 이른바 ‘욕하면서 보는’ 아침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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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고 꿈 꾸고 벌 주며 시원해져

과년한 남자가 아침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 것은 임기가 얼마 안 남은 현직 대통령을 술자리에서 칭찬하는 것만큼이나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일단 스스로 궁색해지는 느낌. ‘불륜이 취미야?’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정말 그런가 싶어서 다음날 TV 알람 시간을 슬쩍 뉴스 시간으로 맞춰놓고 자야 할 것 같은 압박도 느낀다. 하지만 솔직히 아침드라마 때문에 지각한 날이 없다고 하기 힘들다. 자기가 버린 딸이 바로 재혼한 남편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 그래서 이제는 라고 말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 언젠가 이날이 올 줄 알고 지루한 시간을 꼬박 봐왔는데, ‘살짝 감기 기운이 있어서 병원에 좀’이라는 지각의 핑계 정도는 버려진 두 남매가 살아온 지난한 시간들을 생각할 때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하물며 같은 엄마에게 난 자매인 줄 모르고 각종 진기명기로 표독스레 언니를 괴롭히는 동생을 라며 용서하고 참아내는 언니에게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보내주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다. 여하튼 단순히 ‘불륜 마니아’가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위해 서영명 작가의 말을 빌리면, “대중은 판타지, 권선징악, 해피엔딩을 원한다”. 아침드라마는 이런 대중의 공통적인 욕망을 조금 더 그 시간대의 거의 유일한 시청자층인 아줌마들의 눈높이에서 친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먼저 판타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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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나 지구온난화가 주제라면

(2006)는 다섯 글자 제목의 아침드라마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대조영의 부인 하희라의 컴백과 노련한 연기에 시청률은 이전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었고, 의 아버지 김윤석은 “탕으로 먹을까? 찜으로 먹을까?”라는 ‘천인공노’할 대사를 ‘가드도 올리지 않고’ 천연스레 내뱉으며, 욕을 먹고 뜬 배우가 됐다. 주부에게 이혼이란 지금까지 유일하게 지켜왔던 자신의 세상이 없어지는 일이다. 하물며 바람 피운 배우자의 뻔뻔함에, 팔이 안으로 굽는 시어머니의 외면까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30대 중반의, 밥밖에는 할 줄 모르는 이혼녀가 세상에 다시 홀로 서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란 현실을 바탕으로 꿈을 보여주는 것. 자신을 버린 남편보다 훨씬 멋진 남자를 만나고, 홀로 우뚝 서는 한 평범한 아줌마의 ‘재기 신화’는, 가정이 곧 직장인 이들에게는 사채업으로 50억원을 버는 남자의 이야기보다 훨씬 가까워서 더 달콤한 환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덜 시원하다. 좋은 사람이 상을 받으면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바로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인 권선징악과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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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드라마는 처음 시작 일주일을 보면 끝나는 일주일이 보인다. (2007)에서 버림받은 두 남매가 결국에는 자신의 생모를 만나게 될 것임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고, 만나서 결국에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끝날 것임은 대선 출구조사 결과만큼이나 확실하다. 딸에 대한 집착으로 갖은 거짓말을 하던 할머니도 개과천선할 것이며, 숨겨왔던 과거가 재혼한 남편에게 들통날 것도, 그리고 결국에는 행복한 가정의 웃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리라는 것도 척하면 안다. 현재 방송 중인 의 결론이 끝까지 자신의 생모가 자신의 집에서 30년을 일하던 도우미 아줌마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끝나리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혹은 두 자매 중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는 동생이 계속 그렇게 처세술 능하게 살다가 아들 낳고 잘 사는 것으로, 너무 착해서 항상 당하기만 하는 언니는 시댁에서 쫓겨난 채 지지리 궁상으로 그렇게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뻔한 걸 뭘 그렇게 열심히 봐?”라고들 하지만 원래 드라마란 뻔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예정된 결론의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는 심정에 같이 가슴이 콩닥거리고,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래서 결국 마음을 여는 것을 보고 훌쩍이는 재미가 없었다면, 연속극이라는 장르는 불가능했다. 드라마 이후 ‘한국형 연속극’의 원형에 가장 충실하게 진화해온 드라마 장르는 아침드라마다. 아침드라마가 불륜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는 가정이 곧 세상인 주부들에게 허리케인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불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를 혹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의 위기를 아침드라마에서 소재로 다루길 원한다면 욕심이다. 재미를 결정하는 것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지금의 안정적인 시청률은 뻔한 얘기를 보며 아침부터 욕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다. 통속과 우연과 불륜으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저주 섞인 평가보다는, 어찌됐건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훨씬 더 건강하다고 믿는다. 그럼 은 고상한 얘기냐는 말이다.

콘텐츠를 결정하는 것은 보는 이들

만드는 사람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콘텐츠를 결정하는 것은 보는 이들이다. 최소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란 좋고 나쁨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보고 안 봄으로 먼저 평가받는다. 영화 에서 태릉선수촌으로 다시 돌아온 아줌마 스타 미숙은 이렇게 얘기한다. “니 돈을 갚을 방법이 금메달 따는 것밖에 없더라.”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엄마들의, 아줌마들의 고귀한 노력 앞에는 올림픽 정신도 빛을 바랜다. 남편 출근시키고 자식들 학교 보내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상을 차리기부터 시작된 일련의 노동을 겨우 마무리한 아침 시간에, 주부들에게 익숙한 환상과 꿈과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면, 백번 양보해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게 해줄 수 있다면, 좀 진부하고 구차하더라도 그게 뭐 문젠가 싶다. 요즘 를 열심히 보면서 생긴 부작용 하나. 여자들이 점점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워진다. 장가갈 엄두가 점점 더 안 난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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