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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꽉 채운 큰 전시들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등 대중기획전 풍성해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붓질이 닿은 시골길 풍경이 끝없이 꿈틀거린다. 자잘한 붓선으로 그린 하늘과 별과 달, 불길 같은 사이프러스 나무와 흙길들이 화폭 위쪽으로 타오르듯 치솟아오른다. 길 위의 농부 두 사람과 마차만이 그나마 현실 같을 뿐이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90)의 붓질은 인간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은 심연을 암시한다.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회색 등의 덩어리들이 너울거리는 풍경 속으로 눈길을 쏟다보면, 작가의 의식을 덮은 죽음의 환각이 옅은 그늘처럼 드러난다.

고흐 작품 67점, 보험총액만 1조원

고흐가 그린 은 별이 소용돌이처럼 반짝이는 밤, 남프랑스 특유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광인처럼 옆에서 몸부림치는 시골길 풍경이다. 자살 두 달여 전인 1890년 5월 작가는 프랑스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귀를 자른 기행 등으로 끌려와 반감금 상태였던 작가는 만신창이 몸을 가누면서, 편집증적인 색채의 잔덩어리들을 채워넣어 환각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1m 가까이 되는 화폭에 거대한 파동이 물결치는 풍경은 물감을 빨아먹고 상자에 머리를 처박는 등의 자해를 일으켰던 그의 광기를 간간이 창작의 열정으로 간신히 되돌리며 빚어낸 열매다. 지독한 발작이 멈춘 동안, 그린 내면의 풍경인 것이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인 생레미 시절을 대표하는 이 걸작과 저 유명한 노란색 바탕의 청색꽃 그림 등을 올 설 연휴 서울에서 본다. 지난해 11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차려진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3월16일까지·1577-2933)은 고인의 유화, 드로잉·판화 등 67점을 내걸었다. 네덜란드의 초창기 습작기부터 파리를 거쳐 남프랑스를 전전한 말기까지 작업들을 시기별로 정리했다. 고흐 컬렉션의 명가인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도판으로 눈에 선한 명품들을 많이 빌려왔다. 1조원 넘는 보험평가 총액으로도 화제가 됐다. 밀레의 원작 이미지에 남국 아를의 찬란한 햇살을 가득 채운 , , 모자 쓴 자화상, 창녀 누드를 그린 석판화 이 보인다. 는 남빛 붓꽃과 노란 배경이 대비를 이룬 고흐의 꽃그림 걸작인데, 반 고흐 미술관에서 처음 반출을 허락했다고 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본떠 그린 와 은 몇 안 되는 고흐작 종교화다. 피로한 직공의 작업장을 그린 초창기 민중화들도 나온다. 출품작들은 전반적으로 정신적 고통에 맞서 창조력을 불태운 생레미 시절 수작들이 부각된 느낌을 준다.

이번 설 연휴 미술 전시들은 질적으로 유례없이 풍성하다. 규모와 질이 비교적 균형을 맞춘 대중기획전들이 잇따른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요란한 빈수레’란 인식이 굳어졌지만, 연초 전시들은 알짜 출품작들이 많고, 기획 틀도 예년보다 충실해졌다. 고흐 전만 해도 명품 컬렉션 덕분에 개막 40여 일 만에 관객 30만 명을 넘겼다.

경기도 고양 아람미술관의 ‘열정, 천재를 그리다’전(3월16일까지·1577-7766)의 콘셉트는 예술남녀의 비극적 사랑이다. 목 긴 여성 초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거장 모딜리아니(1884~1920)와 그의 요절 뒤 뒤따라 자살한 연인 잔 에뷔테른(1898~1920)의 사랑살이 흔적들을 좇는다. 등 모딜리아니 특유의 유화, 드로잉 40여 점과 작가로 활약했던 잔의 미공개 유화, 아크릴, 드로잉 65점, 공동 드로잉 등이 그 증거물이다. 잔의 머리카락과 주고받은 엽서와 사진 등도 나와 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2월27일까지·02-525-3321)은 볼 기회가 별로 없지만, 알고 보면 친숙해지는 러시아 근대미술품 선물세트다. 모스크바의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러시아미술관의 작품 91점이 출품됐다. 추상화 시조 칸딘스키, 사실주의 대가 레핀을 비롯해 말레비치·곤차로바·마소예도프 등 대가들의 작품이 내걸렸다. 성남아트센터 미술관의 ‘유럽 현대미술의 위대한 유산’전(2월24일까지·031-783-8146)은 유럽 매그재단 등에서 보나르, 피카소, 샤갈, 드뷔페 등 거장들의 원화, 판화 등 120여 점을 꾸러미로 모아왔다.

덕수궁 미술관의 근대 한·일 작가 2인전 ‘최영림·무나카타 시코’(3월30일까지·02-2022-0613)는 얼개가 색다르다. 월남작가인 최영림(1916~85)은 토속성과 익살, 관능 어린 알몸 여인 그림으로 알려진 초창기 주요 작가다. 입체파에 영향받은 그의 시기별 그림과 더불어 작품, 세계관 등에서 영감을 주고받은 스승 무나카타 시코(1903~75)의 장식성 강한 판화, 채색화 등을 전시해 과거 양국 화가들의 정서적 공감대를 복원했다. 이 밖에 조립 장난감 레고를 짜맞춰 만든 건축가, 디자이너 등의 작품을 보여주는 체험전 ‘플레이 레고월드’전(2월9일까지 코엑스 컨벤션홀·1588-4909), 가나아트갤러리 작업실에서 창작한 국내 작가 30여 명의 근작을 선보이는 ‘아뜰리에 보고전’(2월10일까지 인사아트센터·02-736-1020)도 기다린다.

문화재 동네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3층에 한신대 박물관이 차린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금석문 서예전(2월10일까지·02-580-1284)을 손꼽는다. 조선 중기 이래 서예의 모범이 된 양송체 글씨의 주역인 송준길, 송시열의 탄신 400돌을 기려 열렸다. 두 대가가 각지의 무덤 비석, 기념비 등에 남긴 금석문 글씨의 탁본 100여 점을 추렸다. 유봉학 전 박물관장이 10여 년간 곳곳의 비석들을 수소문하며 어렵게 모은 우암, 동춘당 탁본 글씨들은 조선 이념을 주도한 율곡학파의 적자인 두 거장의 웅건, 장중한 글자체를 보여준다. 활기찬 붓질을 휘두른 송준길의 민광훈 묘표, 단아한 필획이 돋보이는 우암의 조헌 묘표와 더불어 18세기 명화가인 이인상이 선인 묘의 망주석 각면에 새긴 우아, 수려한 전서 글씨도 처음 발굴됐다.

일제에 훼손되기 전 조선 궁궐 사진전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시대에 훼손되기 전 조선의 주요 궁궐 모습 등을 찍은 옛 사진들을 선보이고 있다. ‘궁(宮)-소장 유리건판에 담긴 궁궐사진’전(2월10일까지·02-2020-9260)은 1909~45년 일제가 찍은 유리건판 사진 800여 점을 추렸다.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이 1922년 아버지 순종, 부인 이방자 등과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귀국 기념사진, 옛 광화문과 육조거리 모습 등이 나왔다. 인근 전쟁기념관에서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6월4일까지·02-785-8710)이 열려 기원전 2~1세기의 사해사본 구약성서와 발견 장소인 쿰란 동굴의 생활문화 등을 재현해 선보이는 중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08년 무자년의 동물인 쥐의 문화적 의미를 역사 유물 등을 통해 살펴보는 기획전(2월25일까지·02-3704-3114)을 계속 진행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경상도 칠곡의 광주 이씨 옛 종가에서 기증한 유물들을 선보이는 특별전(2월24일까지·02-724-0156)을, 경기도박물관도 문화재를 보존과학의 눈으로 살펴보는 ‘문화재 속 비밀 찾기’전(2월24일까지·031-288-5357)을 마련했다. 지방에서는 국립광주박물관이 존경받는 선승들의 수행 과정과 일상을 옛 문헌과 유품 등을 통해 살펴보는 ‘불서로 본 스님의 일상’전(2월17일까지·062-570-7028)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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