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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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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염치한 소개팅, 우리 얘기 맞지?

등록 2006-11-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매력 떨어진 ‘체면치레 TV 맞선 게임’의 두 갈래 길, 연예인이냐 작업남녀냐…짝짓기 자연다큐를 보는 듯한 은 자극적인 맛을 살린 첫 성공작

▣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저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예전엔 이렇게 말했다. 학벌, 키, 성격, 취미 등 마음에 둔 조건이야 적지 않았지만, 그냥 막연히 ‘좋은 사람’이라고만 했다. 거기에는 바깥의 조건보다는 그 사람의 진짜 됨됨이를 보고 판단할 것이라는 약간의 위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지난 11월19일 한국방송 2TV의 가 마지막 방송을 내보냈다. 제법 만만찮은 조건을 갖춘 남녀가 등장해 적당히 체면 차리며 짝짓기를 하던 정통 중매 프로그램은 이렇게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좋은 사람’만으론 부족해

같은 시각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을 연결하는 핫라인은 황당한 멘트와 안티 리플로 들끓고 있었다.“3번 분 오시면 제가 집 어딘지 물어볼게요. 강북인지, 강남인지.” “키높이 구두 신으셨죠? 진짜 키 한번 재볼게요.” “몸에 털이 많네요. 종아리를 빗질해도 되겠어요.” 도대체 이게 처음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에게 할 법한 소리인가? M.net의 은 매회 새로운 킹카 퀸카들을 된장남 된장녀의 전형으로 변신시키며, 연애 적령기 청춘남녀와 인터넷 악플러들을 들썩거리게 하고 있다. 10번 욕먹는 게 한 번 칭찬받는 것보다 나은 솔직 발언 비호감의 시대, 짝짓기 프로그램도 확실한 변신의 신호탄을 날리고 있다.

1990년대 를 비롯해, 청춘남녀들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모아 공개 미팅과 맞선으로 연애 상대를 구하도록 하는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는 짧지 않다. 출연 당사자들은 방송사가 한 번 검증해준 사람들 중에서 진짜 좋은 짝을 구할 수도 있고, 보는 사람들로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혐의를 살짝 두면서도 ‘나라면 누구를 택할 텐데’ 혹은 ‘누구하고 누가 연결되면 천생배필이겠는데’라며 대리만족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체면치레로 가득한 맞선 게임은 더 이상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없게 됐다.

폭스TV의 , ABC의 등의 커플매치 리얼리티쇼가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여파가 국내에도 밀려들어왔다. 리얼리티쇼는 연애를 폐쇄적인 게임 장치 속으로 집어넣어 청춘남녀가 거액의 상금과 최고의 배필을 놓고 치열한 대결을 벌이도록 한다. 도전자들은 공개된 데이트에서는 온갖 멋진 척을 하고 아양을 떨어도, 진실의 카메라 앞에서는 다른 도전자 혹은 구애 상대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당연히 국내에서도 이러한 연애 리얼리티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졌는데, 지상파와 케이블·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은 두 갈래의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주말 버라이어티쇼에서 10대를 중심으로 한 가족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지상파는 와 같은 일련의 연예인 대상 짝짓기 프로그램을 내놓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방송 관행 속에서 케이블·DMB는 [S] 등 더욱 자극적인 프로그램들을 통해 ‘작업’에 가까운 짝짓기 모습을 내보내게 된다.

왜 이들의 치졸함은 못 참는 걸까

시청률을 잣대로 하자면 지상파의 연예인 대상 짝짓기 프로그램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나는 이야말로 진짜 리얼리티쇼다운 자극적인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첫 성공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쇼는 표절 시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고, 정치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않다. 우리 사회의 외모, 학벌지상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것도 모자라 처음 만난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몰염치한 작태를 버젓이 공개한다. 욕을 먹어 당연하지만, 그 욕 때문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국내에서 더욱 자극적인 리얼리티쇼가 방영되고 있는데 유독 이 공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정이입이다. 우리는 저 먼 나라의 외국인들이 벌이는 리얼리티쇼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본다. 의 악녀 오마 로사, 의 독설 비평가 사이먼 등 악한 캐릭터들에게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외모에 같은 말을 쓰는 남녀들의 치졸한 언행은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콤플렉스가 바로 그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을 대한민국 청춘남녀의 짝짓기 행태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보고 있다. 비록 의도된 연출로 출연자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 상습적인 ‘뒷담화’ 코너를 통해 위악적인 대화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이 연애 상대를 고르는 잣대는 정말로 이 시대 남녀들이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들의 도덕을 옹호하지 않지만, 그들의 생존방식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다. 발라드 가요의 달콤한 속삭임, 눈물 범벅의 연애 영화, 감상적인 어조의 웹툰과 같은 위선적인 연애물들을 즐기는 이 시대의 청춘들은 동시에 돈, 학력, 키, 외모 등 모든 외적 조건을 냉정하게 따지는 위악적인 연애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그 위선과 위악의 진폭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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