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풍경’전에서 만난 형상회화의 특별함… 예술가의 감각 회복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을 찾아
▣ 유경희/ 미술평론가
전시장 내부가 화려하게 변신했다. 전시 공간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가 되어, 회화작품이 마치 하나의 점처럼 초록색 방과 보라색 방을 배경으로 걸려 있는 광경은 아주 신선하기까지 하다. 일단 시선 집중에 성공한 셈이다. 게다가 마치 설치작품인 듯 착각을 일으키는 소파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고, 결코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남자(알고 보니 연극배우 박광정)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시가 배경음악 없이 소음처럼 흘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삶의 풍경’(Life Landscape)전의 인상이다. 삶의 풍경전은 말 그대로 일상의 풍경을 담고자 한 전시다. 전시 제목에서 풍기는 자체로도 관객들은 그것이 형상회화전임을 예측할 수 있다.
황지우의 시를 모티브로 삼은 방
근래 10년 넘게 미술계는 설치미술과 비디오아트 등의 범람으로 회화가 설자리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회화의 죽음’이라든지 ‘노쇠한 왕’이라는 말로 폄하돼온 회화는 이제 다시 그것의 복권이니 부활이니 하는 화려한 말잔치로 회자되고 있다. 회화가 다시 세계적 조류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추상회화가 아닌 형상회화가 부활하고 있다. 우리 미술계 역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몇년 전부터 회화의 전시가 지속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전시들은 그저 ‘회화’라는 장르 안에 안착되어 있다는 공통감 이외에 이렇다 할 콘셉트나 주제로 범주화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럴 만큼 회화 작품이 드물었다는 뜻이 아니라 전 시대와 변별되고 새로운 콘텍스트를 가진 주목할 만한 회화가 부재했다는 의미이다. 역량 있는 형상회화 작가를 만나기도, 그런 작업을 만나기도 더더욱 어려웠음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한꺼번에 다양한 형상미술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위안과 안도감을 만족시키며, 그런 면에서 일단 주목할 만한 전시이다. 2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군이라든지,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미술 평단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전시는 두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가 ‘살찐 소파가 있는 풍경’이고 두 번째는 ‘그 풍경 속으로’이다. 기획자는 첫 번째 방에서는 황지우의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를 모티브로 일상적인 삶의 내러티브를 담아내고자 했고, 두 번째 방에서는 일상적 풍경 아래에 내밀히 공존하는 삶의 권태나 고독 같은 인간 삶의 심리적 궤적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는 이전에 행해지던 전시와는 몇 가지 점에서 변별되며, 바로 그 지점이 숙고할 만한 핵심적 관건을 제공한다.
우선 전시 주제의 시발점으로 현대 시인의 시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그런데 황지우 시의 선정이 과연 최적의 선택이었느냐는 점은 좀 의아하다. 물론 이 시의 선택은 사적인 화자를 넘어서 “권태로운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흔들리는 현대인의 자아”라는 사회적 자아라는 상징적 의미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나름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황지우의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가 대다수 예술가와 대중의 사소한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할지라도, 그 시의 선택이 과연 비천하고 비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유머러스하고 시니시즘적으로 폭로(?)하는 것 외에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들은 이 시와 시적 주제를 어쩌면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직설적인 차용과 해석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테마전이 가질 수 있는 한계 내지 결함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가들의 ‘자아상실감’ 내밀히 드러나
두 번째, 이 전시는 일상의 풍경을 물리적 환경과 심리적 환경으로 구분하여 좀더 세부적인 테마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물리적인 삶의 풍경과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삶의 풍경은 변별되기 어렵다. 그것은 예술가가 일상을 세밀하고 정치하게 그대로 모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그리고 그 선택이 무관심적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그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시계에 들어온 모든 대상은 예술가와 어떤 식으로든 내밀한 방식의 심리적 관계를 맺게 마련이며, 따라서 무관심한 선택 역시 미학적 쾌를 위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이 소파와 의자 같은 물리적 일상 기물의 등장 여부에 따라 변별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출품된 작가들의 작품 성향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작업 형식이나 기법은 다양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왠지 냉소적이고 좀 심각하다. 게다가 그로테스크하며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들에게 일상은 그저 지리멸렬한 것, 권태로운 것, 아프고 아련한 것, 공허하고 고독한 것,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 등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작업에서 요즘 작업에서 중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미’(fun)의 요소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또 17세기 네덜란드 회화가 보여주었던 풍부한 알레고리적 오브제의 선택을 통한 일상 예찬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새롭고 쇼킹한 형상만으로 관객을 자극하고 놀랍게 하는 것만이 예술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매우 일회적이며 부차적인 효과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전시는 기획 의도의 치밀함에 비해 작업의 다양성(그림은 다른데 느낌이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과 회화의 차원만이 견지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우라가 담보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형상회화라는 드물기만 하던 장르를 통해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내밀한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돋보인다. 어쨌거나 출품작들은 오랜 불경기와 침체의 늪에 빠진 경제 사정과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저급한 정치 상황 등 질곡의 삶 속에서 예술가들의 자아 상실감을 그대로 드러낸 솔직한 작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전시를 통해서나마, 작금의 시대를 사는 예술가에게 앙가주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더불어 왜 다시 회화, 그것도 형상회화인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회화가 어떤 장르보다 예술가의 탁월한 감각을 회복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의 소통으로 나아가는 가장 어렵지만 본질적인 길이라는 고전적인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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