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문화포커스- 문화접대가 접대문화 바꾼다

등록 2004-04-16 00:00 수정 2020-05-03 04:23

‘공연장 비즈니스’에 주목하는 대기업들… ‘접대비 실명제’ 제외로 대학로에도 봄날 오려나

세종문화회관에는 ‘메세나27’이라는 특별한 객석이 마련돼 있다. 공연장 비즈니스에 주목하는 대기업들이 ‘문화접대’를 위해 이 자리를 찾고 있다는데….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4월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서는 살아 있는 트로트의 역사로 불리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가 데뷔 45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대표곡과 첨단 영상기법 등으로 이미자 노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인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은 특이하게도 너른 객석 가운데 안쪽의 별도의 자리에서도 즐길 수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이 재개관하면서 2층 안쪽에 문화접대용으로 ‘메세나27’이라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메세나27에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공연장을 찾아 리셉션룸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공연 시작을 기다린다. 관객들은 리셉션룸에서 전문 도우미가 마련한 음료와 다과 서비스를 받은 뒤 공연 직전 각자의 자리로 들어간다.

광고

“사교도 함께” 세종문화회관의 메세나27

아주 특별한 공연 관람의 백미는 공연 막간에 이뤄진다. 잠시 객석을 벗어난 관객들은 리셉션룸을 사교장으로 여길 수 있다. 이전이라면 많은 관객들 틈에서 소리 높여 말을 주고받아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반 관객이 왕래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사교 모임이 공연장 한쪽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한 언론사 사주의 초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공연의 재미보다도 초대받은 즐거움이 더 컸을지 모른다. 속된 말로 누구와도 다른 자리에서 폼나게 공연을 관람하며 서로 친분을 쌓기에 그만인 자리가 여기에 있었다.

메세나27은 문화예술 보호에 앞장섰던 고대 로마제국의 시인이자 정치가 가이우스 마에케나스의 이름에서 ‘메세나’(mecenat)를, 좌석이 모두 27석이라는 데서 ‘27’을 따온 이름이다. 지난달 가수 패티김 데뷔 45주년 공연 때 처음으로 메세나27에 관객이 자리를 잡았다. 공연을 기획한 (주)예스컴프로덕션의 공연기획팀 이길용 차장은 “책정된 금액에서 50% 할인된 486만원에 메세나27을 이용했다. 하지만 기업체의 문화접대로 대관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별도의 룸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밝혔다. 객석의 등급으로 따진다면 2순위 정도지만 리셉션 공간에 부가 서비스까지 제공하기에 최고석에 준하는 관람료를 내야 한다.

광고

세종문화회관은 메세나27을 마련하며 ‘감동의 시간이 비즈니스를 움직이는 곳’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관람객들이 거부감을 느끼던 VIP석을 문화접대 전용석으로 개조해 기업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메세나27을 빌리는 데 드는 비용은 최대 1천만원. 국내 클래식 공연은 최저 100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기업이 패키지로 구입하면 술집 접대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독립된 공간을 비즈니스에 활용할 수 있다. 메세나27을 처음으로 이용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말 재개관 기념으로 마련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세종문화회관 기획사업부 정철종 차장은 “적지 않은 관람료를 내야 하지만 대형 공연을 앞두고 이용을 문의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성공적인 운영을 예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이용

광고

자칫 버려진 공간으로 남을 뻔했던 메세나27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이 문화접대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초 국세청은 문화·예술관람권 등을 통한 문화접대는 현물접대의 하나로 여겨 ‘접대비 총액 50만원 이상 실명제’에서 예외로 한다고 밝혔다. 한꺼번에 50만원 이상의 관람권을 구입하더라도 접대 상대방에게 제공한 금액이 50만원 미만이면 접대비 실명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공연 접대비가 50만원이 넘으려면 고급예술에 관련된 티켓이라야 한다. 아무리 가격이 비싸더라도 고급 룸살롱이나 골프장 등지에서 이뤄지던 기업의 접대문화가 문화의 광장에 진입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접대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이 문화적으로 거듭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이전에 기업의 문화접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사회 기여와 브랜드 제고 차원에서 각종 공연을 후원하고 있다. 기업들은 지난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등 4편의 오페라 공연 좌석의 25%를 단체 구매했다. 기업들이 문화접대를 하기 위해 관심을 보이는 공연은 클래식과 오페라, 발레 등이다. 이들 공연은 기업에서 하루나 이틀치를 전석 구매하는 경우도 흔하다.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뮤지컬 의 경우 지난 4월2일 SK텔레콤이, 15일에는 삼성전자 하우젠이 1회분 전석(2300석)을 구매했다. 삼성전자는 해마다 20억원가량을 문화예술계에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연암문화재단은 500억원의 운영기금을 조성했고, SK그룹도 올해 200억원 규모의 메세나재단을 세우기로 했다.

이렇게 기업이 문화예술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더라도 공연장을 문화접대 장소로 활용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가 서울 소재 181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접대비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기업의식 조사’에서 대부분(84%)의 기업이 접대 활동이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접대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에는 공감해도 현재의 관행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71.9%)이라고 내다봤다. 룸살롱과 골프장 등에서의 접대가 아직은 효과적이라고 여기는 탓이다. 한 제약업체의 홍보팀 관계자는 “기업도 소비성·향략성 접대가 실속 있는 문화 접대로 바뀌길 기대한다. 하지만 접대라는 게 받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접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문화접대를 하려 해도 적당한 공연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회장 박성용·메세나협의회)에 회원사로 가입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994년 200여개의 회원사로 출범한 메세나협의회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며 124개사로 떨어졌다가 올해 들어 171개사로 회원사가 확대되는 추세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연회비를 10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내면 ‘문화접대하기 좋은 공연’ 등을 정기적으로 추천받고 기업의 여건에 맞는 문화접대 컨설팅도 받는다. 메세나협의회 박찬 기획운영국장은 문화접대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접대 기업이 늘어나려면 문화기부금을 별도 항목으로 정해 조세감면 혜택을 주고, 정부 조달 사업 입찰에 가산점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많은 기업들이 문화접대를 주목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문화적 마인드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단순히 공연 한번 관람하게 하는 것으로는 상대방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대림산업처럼 문화접대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하게 풀릴 것이다. 대림산업은 건설업체이면서도 특이하게 서울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길에 사진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대림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대림산업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협력업체 모임이나 기업 설명회 등을 미술관에서 열고 있다. 지난 3월17일에는 해외 거래처 임원들을 미술관에 초대해 ‘재즈 사진전’을 관람하게 하고 세미나실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 동안에는 ‘임달균 재즈밴드’의 연주를 들려줬다. 메세나27 같은 대형 극장의 폼나는 자리가 아니어도 나름의 기획력을 발휘하면 얼마든지 접대 대상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만약 대림산업처럼 한다면…

대형 공연장은 기업의 문화접대 활성화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예술의 전당은 메세나27 같은 별도의 객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공연장 밖에 있는 ‘VIP룸’이 널리 쓰이길 기대하고 있다. 현재 예술의 전당은 오페라극장 200석 이상 구입 기업에게 30여명이 이용할 수 있는 VIP룸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 안호상 공연사업국장은 “지금까지는 200대 기업 홍보실에 공연 안내 책자를 보내 단체 관람을 유도했는데 앞으로는 수신 기업 범위를 넓히고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겠다. 현재는 기업들이 지명도 높은 공연을 찾지만 앞으로는 실험적인 공연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공연장은 좋은 공연을 유치하는 것뿐 아니라 기업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케팅에도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기업들의 문화접대 관련 장르가 너무 적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무리 기업들이 문화접대에 관심을 가져도 ‘떡고물’도 챙길 수 없는 공연장이 수두룩하다. 기업과 문화가 서로 통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만남의 장소’가 너무 제한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홈페이지 이벤트를 할 때도 대학로 극장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학로 공연 티켓 수십장을 주는 것보다 폼나는 공연 티켓 한두장 주는 게 효과가 높다고 여긴다. 악어엔터테인먼트 김만철 대리는 기업의 문화접대를 간절히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지금껏 기업에 공연을 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학로 공연으로는 기업체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접대가 뿌리내리려면 공연 기획 단계부터 연계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기업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로 연극 같은 작은 공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문화 마케팅은 새로운 돌파구

[기업과 문화]

기업이 문화 전도사로 재탄생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 샘표식품 이천공장 500여평 부지에 들어선 ‘샘표 스페이스’.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취지로 지난 4월7일 개관한 샘표 스페이스는 기업과 지역주민의 문화적 만남을 꾀한다. 샘표 스페이스는 실험적인 전시와 퍼포먼스, 이벤트 등 복합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청년 미술의 메카로 자리잡을 예정이다. 지난 7일부터 개관 기념으로 마련한 ‘간장공장 습격사건’전에는 설치작가 최정화·안두진씨와 사진작가 변순철씨 등이 참여했다.
이처럼 기업의 마케팅에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소비자의 감성을 일깨우는 데 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내의 한 건설회사는 아파트 분양 광고를 갤러리를 배경으로 찍어 브랜드에 문화의 옷을 입히기도 했다. 문화를 광고·판촉 수단으로 활용해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심어준 셈이다. 국가도 문화 이미지를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다. 이탈리아 명품 구두도 알고 보면 문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의 손재주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여자들의 미적 수준이 높아 거기에 맞추다보니 명품 구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기업의 문화 마케팅은 소비자의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커피 한잔에도 맛과 향 그리고 인테리어 분위기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생산한 제품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다. 해태제과는 지난해 3월부터 비스킷 ‘아이비’에 비발디의 중 봄·가을, 모차르트의 등 클래식 음악 16곡을 틀어준 신제품을 내놓아 매출을 높였고, 대상은 음악을 들으면서 숙성한 장류 제품을 내놓았다. 이 회사는 숙성실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담은 CD 15만개를 제작해 소비자에게 배포하고 있다.
그동안 기업들은 공연이나 전시회 등 각종 문화행사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문화 마케팅을 벌여왔다. 문화예술을 단순히 ‘지원’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머지않아 마케팅을 위한 문화에서 문화를 위한 마케팅으로 나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상지대학교 경제학부 임상오 교수(문화경제학)는 “기업들이 문화를 활용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창의성 증진에 도움을 준다. 문화적 마인드를 가지고 기업을 경영하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마케팅에 활용하려면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는 게 좋다. 금융권과 유통업체 등에서 설립한 문화센터가 성공 사례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차별화된 문화예술 접근을 하지 않은 탓이 크다. 일단은 소비자가 즐기는 문화예술에 기업이 함께한다는 데 의미를 둬도 성과는 있게 마련이다. 잠재적 소비자를 겨냥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LG칼텍스정유는 올해로 11년째 ‘어린이 환경미술대회’를 열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을지라도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