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드득 요절낼 때의 감촉이며 소리며… 시린 땅속에서 익은 김치의 절묘한 맛
성석제/ 소설가
김치가 맛있게 되는 데는 적어도 수십 가지의 조건이 있다는데 그 중 한두 가지는 나도 안다. 잘 익어야 맛있다는 것. 당연한 말 같지만 잘 익는다, 발효한다고 해서 맛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다.
잘 익은 김치에는 안 익은 김치의 수십, 수백 배에 해당하는 유산균이 들어 있다. 유산균 음료를 ‘요구르트’라는 이름을 붙여 팔고 있고 그게 장수식품이라고 하는 건 다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요구르트는 그 자체로는 별맛이 없다. 우유에 유산균을 넣고 하루쯤 발효되기를 기다리면 무미한 발효물질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사과잼이나 딸기잼을 섞어 먹는데 그게 사과요구르트, 딸기요구르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세끼 상식하는 김치는 뭘 섞지 않아도 처음부터 맛있다.

우선 살짝 신맛이 돈다. 침샘을 슬쩍 건드리면서 양쪽 뺨 안쪽을 시리게 하는 그런 맛.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캅사이신은 김치에 들어가서 자극적이면서 개운한 맛을 낸다. 여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해지는 맛이 있는데 그게 배추의 질감(質感)이다. 김치가 덜 익었을 때나 너무 익었을 때는 배추의 제일 바깥쪽, 그러니까 푸른 잎사귀쪽의 맛이 강하다. 그러나 김치가 한창 잘 익었을 때는 배추에서 뿌리에 가까운 쪽, 곧 두툼하고 이가 박히는 느낌이 실한 부분에 꽉 차게 맛이 든다. 이 부분을 어금니로 붙들어 아래 위로 으드득, 요절낼 때의 감촉이며 소리며…. 이것이 맛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고 떫고 짜고 맵고 쓴, 오미(五味)에는 들지 않지만 맛은 다섯 가지로만 분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치를 아미노산, 염분, 비타민군, 섬유소 따위로 정의할 수 없듯이.
잘 익은 김치는 차게 먹으면 훨씬 맛이 돋워진다. 북풍한설 모진 바람이 쏴쏴 뒤꼍 대나무 숲을 뒤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김칫독에서 건져온 김치를 썰어서 젓가락을 빌릴 필요도 없이 그대로 입으로 가져갈 때, 손에 이어 입속에 느껴지는 그 차가운 감촉 역시 맛으로 승격해야 마땅하리라. 동치미가 있다면 또한 좋을 것인데 얼음이 둥둥 뜨는 그것을 사발에 담아놓고 그냥 돌아가며 들이마셔도 좋고(내장이 다 찌르르한 차가운 맛!), 재미 삼아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 진 사람은 아예 못 먹게 하는 것도 괜찮다. 동치미 무를 채 썰어 양푼의 밥에 넉넉히 얹은 뒤 참기름과 고추장을 듬뿍 넣고 썩썩 비벼서 한 숟가락씩 돌아가며 먹으면 또 그 맛은 어떠한고. 역시 재미 삼아 가위바위보를 하고 지는 사람은 한 숟가락도 차례가 오지 않도록 해보자. 이게 ‘못 먹는 사람 약 올라 죽는 맛’이다.
대여섯해 전, 그때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이천의 동네 어느 집에 가서 김치를 얻어먹어도 김치맛이 비슷하게 맛있던 적이 있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앞집 왕 선생(주말부부라 살림을 직접 해본 경험이 다대하시다)이 그 동네 김치가 맛있는 건 아낙네들의 손맛이 뛰어난 것임을 전제한 뒤에 “올 김치가 맛있는 건 날씨 덕이 아닐까. 날이 귀때기 떨어져 나가게 춥다가 푹하고 또 춥다가도 요새 푹하거든.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이게 김치맛하고 상관이 있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기온이 일정한 곳에서 은근히 맛이 들라는 의미에서 김칫독을 땅에 깊이 묻는 게 아니야? 날씨는 무슨 얼어죽을…” 하고 핀잔을 줬더니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김치가 맛있어진 건 말여. 네가 철이 드느라고 그러능겨. 이제사 세상 맛을 좀 알게 된겨.”
그럴까. 정말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그 무렵에 나이가 마흔이 되었던가 싶다.
그렇지 않아도 공장에서 나오는 김치가 집이고 식당이고 구별 없이 식탁을 점령하는가 싶었는데, 근래에는 김치냉장고까지 나와서 온 세상의 김치맛이 다 비슷해졌다. 종가집 맛, 풀무원 맛, 삼성 맛, LG 맛, 만도 맛, 대우 맛에 우리는 우리의 김치를 잃어간다. 우리의 어머니·할머니·고모·이모의 손맛과 아버지의 삽, 외삼촌의 곡괭이로 판, 뒤꼍 땅속 또는 김칫광의 맛을 잃어간다. 잃어간다, 남 흉내내고 따라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 스스로를 남김 없이 잃어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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