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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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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음식을 약으로 삼으라”

충북 속리산 자락 한옥 금단재에서 열린 김장교실에서

한국 전통음식의 건강한 매력을 배우다
등록 2010-12-15 15:20 수정 2020-05-03 04:26

“김치 담그러 하룻밤 외박이라니, 괜찮은 기회네. 주말에 야호, 해방이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첫눈 맞으며 소풍 겸 달려왔다는 이씨 아줌마.
“맛있는 김장김치 담가 와서, 집사람 힘도 덜어주고 겨우내 먹겠다 싶어서 따라나섰다”며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씻어 척척 담아 나르는 김씨 아저씨.
“우리 언니가 사위 보고 며느리 보더니, 이제 내 김치는 안 담가준다지 뭐야.” 사위에게 내 손으로 만든 김치 먹이고 싶어 참여했다는 김씨 아줌마.
“엄마 돌아가신 뒤론 그냥 사먹었는데, 이 기회에 나도 한번 배워보지 뭐.” ‘집에 딸린 부엌을 혐오한다!’고 떠벌리다 문득 정신줄 놓은 듯 새 아니 전 남편에게 푹 빠진 철부지, 한때 극렬 페미니스트류 아줌마도 합류한 김장교실. 여기 모여든 아줌마들의 사연은 비슷했다. 친정엄마 혹은 친정언니 덕, 아니 탓에 그동안 미뤄온 김치 담그는 법 배우기.

충북 속리산 자락 금단재에서 열린 김장교실에 참여한 이들이 김치 담그는 데 들어갈 재료를 마련하고 있다.박영숙 제공

충북 속리산 자락 금단재에서 열린 김장교실에 참여한 이들이 김치 담그는 데 들어갈 재료를 마련하고 있다.박영숙 제공

 

올겨울 책임질 장김치와 젓갈김치

김치담그기 행사가 열린 금단재는 좋은 한옥을 구하러 전국을 돌다 경북 문경에서 350년 넘은 똑 닮은 고옥 두 채를 발견한 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속리산 자락에 이식한 박홍석씨와 그의 아내 안혜령씨가 6년 남짓 정성을 쏟은 공간이다. 달천으로 흘러드는 1급수를 끼고 앉은 청정 지역에 옛 법도 따라 흙과 나무로 지은 다섯 동의 한옥이 완성되기까지, 남편 박홍석씨는 풋내기 농부의 길을 가며 “산골 마을에 한옥을 토대로 하는 문화 공간”을 희망했다. 이를 믿고 치다꺼리한 안혜령씨는 모두들 감탄하는 한옥을 완성한 뒤, 이를 더 잘 활용할 구체적인 길을 고심하다가 하늘도 땅도 함께 기뻐할 일을 찾아냈다. 금단재를 ‘약식동원’의 정신을 뿌리 삼는 전통음식 문화를 살려내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결정은 오랫동안 품었던 생각이 자연스레 열매로 맺어진 것일 뿐 결코 급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도시내기로 잡지사 기자가 되어 두메산골과 외진 바닷가로 취재를 다닐 때부터,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들을 만나고 된장 담그고 채소와 나물을 삶고 말려 겨울 나는 이들을 만나면서 헛된 욕망을 내려놓고 이기주의와 편의주의를 덜어낸 삶에 대한 꿈은 이미 시작됐다. 건강한 음식이 건강한 몸과 사회를 이룬다는 깨달음에 이른 까닭이었다. 그에 대한 보고서는 이란 제목으로 3년 전에 출간됐다. 유기농 짓는 농부들의 조촐하지만 건강한 밥상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맛보면서, 우리 전통의 살림살이와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이었다.

지난 11월27∼28일 이틀 동안 열린 김장교실은 좀 쑥스러우나 제법 내실이 돋보이는 근사한 축제였다. 김장교실 늦깎이 학생들은 가마솥에서 막 긁어낸 고소한 무밥을 나눠 먹은 뒤, 전날 밤에 절여둔 배추를 씻어 소쿠리에 담기, 흙 묻은 무와 파 씻고 다듬기, 마늘까기 등 역할을 나눠 혜각 스님의 지시대로 준비를 완료했다.

김장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에 켜켜이 김치속을 채워 만든다. 김치속은 찹쌀과 물을 1:10 비율로 끓인 찹쌀죽에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 채친 무가 들어간다. 전라도 김치는 무를 채쳐서 넣는 대신 마늘·양파·생강을 함께 갈아 섞는데, 그리 하면 김치속이 배춧잎과 따로 놀지 않아 버리는 게 없다고 한다. 대형 믹서로 죽처럼 간 채소가 섞인 걸쭉하고 붉은 찹쌀죽에 생새우와 잘게 썬 갓과 파, 미나리를 섞으니 구수한 김치 향이 돈다. 여기에다 간을 하는데, 젓갈김치와 장김치 두 가지로 했다. 장김치의 양념에는 생새우를 빼고, 멸치든 새우든 까나리든 ‘살생’에 해당하는 젓갈도 금한다. 대신 간장을 섞는 절집의 조리법인데, 맛이 담백해 오래 두고 먹기에 좋다고 한다. 햇살 좋고 바람도 좋은 금단재 장독대에 3년 넘게 묵은 조선간장이니 더욱 그러했다.

완성된 속을 배추 사이사이 채우는 동안 프라이팬에서 갓 나온 고소한 배추지짐이 돌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겉이파리로 포기를 감싸 김치박스에 담기 시작할 때는 겨우내 우리 입맛과 건강을 지켜줄 김장김치와 잘 삶아진 수육이 등장했다. 막걸리를 함께 마시며 즐거운 김장놀이가 내년에도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장담그기·계절 음식 이어갈 음식학교

김장교실 선생님으로 나선 혜각 스님의 손맛은 사찰음식에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간암 말기에 복수가 차는 등 사경을 헤매던 스님은 인산 김일훈 선생을 만나 병을 고친 인연으로 죽염 만들기와 약용식물 공부를 했다. 각별한 요리에는 으레 어머니에게 전수한 비법이 따르게 마련이나, 그녀의 배후에는 잔병치레 심한 손녀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할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 감칠맛 보태는 비법을 알려주니, 그 사연을 듣자면 더욱 재미지다. 감동의 손맛에다 건강의 지혜까지 아낌없이 나눠주고픈 스님의 보리심은 ‘약식동원’에 뿌리를 둔 금단재 음식학교 출범을 부추긴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날 저녁, 같은 뜻 품고 사는 이웃들이 함께 자리해 음식학교 개교를 축하했다. 개교와 함께 감투를 쓴 안혜령 교장 선생님의 “필요한 거 있음 뭐든 알려주세요. 최선 다해 도울게요”라는 취임사에 눈비산 마을 조희부 대표가 덕담으로 화답했다. 시루떡과 막걸리가 돌아간 다음, 전통춤과 노래 그리고 경희대 한의학과 이혜정 교수의 짧은 강의도 이어졌다.

금단재 음식학교 안혜령 교장의 꿈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가 음식 만들기로, 절기마다 산과 들에 나는 풀과 나무의 약성을 배우고 밭에서 키우는 작물을 살피며, 철철이 재료들을 거두고 다듬어 음식을 만든다. 둘째, 동양의학적 관점에서 몸과 음식의 관계를 살피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고 실천할 수 있는 건강법을 익힌다. 끝으로 직접 밭을 돌보고 작물을 보살피며 농촌 공동체와 농사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간다. 당분간은 장담그기, 명절음식과 계절 음식 만들기, 약용음식 배우기 교실을 매달 한 차례 열 계획이니, 전통음식 조리법을 배우고 싶은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각별한 한옥 체험이 될 듯하다.

“네 약을 음식으로, 네 음식을 약으로 삼으리랏다.”(Let medicine be the food, and food be the medicine)

우리 음식문화와 관련해 ‘약식동원’이란 말을 흔히 쓰지만 유럽에서도 ‘푸드 애즈 메디신’(food as medicine)은 기원전 400년 즈음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뿐 아니라 “진리는 책이 아니라 대자연에 있다”고 설파한 15세기 알프스 출신 파라셀수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유럽 친구들과 한국 음식을 나누며, 특히 김치의 항암효과와 성인병 예방, 유산균의 정장작용에 다이어트 효과와 항균작용까지 설명을 보태면 “파라셀수스가 말한 게 바로 그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군침을 삼키곤 한다.

몇 해 전 독일 친구 집에서 ‘열 나라 파티’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리스·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독일·브라질·영국·터키·이스라엘 출신 여성들이 귀한 전통음식들을 요리해 나눠 먹으며 수다로 밤을 지새웠다. 친구들은 나쁜 식생활 탓에 나이와 함께 ‘배둘레햄’이 자꾸 늘어 뭐 하나 맘껏 먹을 수 없으니 자신들도 환상적인 맛을 자랑하는 건강한 한국 음식을 배워 해먹을 수 있게 요리책 하나 써달라는 주문도 했다.

 

산과 들에서 자란 소박한 별미

내 친구들의 노후를 책임질 요리책을 구상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관련 책들을 탐독하다 놀라운 차이를 하나 발견했다. ‘요리예술’이라 자처하는 중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타이, 터키 요리들은 권력이 쏠렸던 곳에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값비싼 양념과 향신료 등 희귀 재료를 구해 만들어낸 것이지만, 우리 전통음식은 왕후장상의 요리가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매일 먹는 소박한 밥상이 바로 별미라는 점. 김치를 비롯해 간장이나 된장 같은 발효음식과 산과 들에서 자라는 온갖 나물은 서민의 ‘일상 음식’이다. 누군가 ‘한국인의 종교’라고까지 말한, 그렇게도 흔해 마땅한 김치가 서민의 밥상에 오를 수 없게 된 참담했던 현실, 올해의 ‘김치 대란’이 외국 언론까지 주목하는 ‘사건’이 된 것도 바로 그래서이지 않겠는가.

김재희 서울예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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