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삼성에버랜드 장애인 도우미견 센터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836호 사람과 사회 ‘장애인 도우미견, 삼성 떠나면 속수무책?’ 참조). 그 서막은 검찰의 압수수색 장면을 연상케 한다. 어느 도우미견 훈련사가 내게 전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0월12일, 에버랜드 도우미견 센터로 2.5t 트럭을 앞세운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회사가 보내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한 그들은 컴퓨터와 서류 뭉치 등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그들의 ‘누아르’적 행동 앞에서 훈련사들은 대항하지 못했다. 몇 시간 뒤, 훈련사들은 에버랜드 인사팀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을 전담하는 에버랜드 ‘국제화 기획실’ 규모를 “현재 75명에서 20명 규모로 축소하니 다음주 월요일까지 희망퇴직, 계열사 내 전배, 타 계열사 전배 가운데 하나를 정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삼성에서 분양받은 ‘아름이’
나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실명한 뒤 흰 지팡이를 이용해 보행했는데, 대학 신입생 때인 1999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도우미견을 분양받았다. 도우미견이 늙거나 병들어 두 차례 ‘대체 분양’도 받았다. 삼성으로부터 누구보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늘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에버랜드의 이번 구조조정과 그 해명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은 삼성이라는 사기업의 소유물이 아니다. 장애인 도우미견은 우리 사회의 공공 자산이다. 막대한 비용을 지급한다고 해서 이 사업을 완성할 수 없다. 도우미견 양성에는 전문적 훈련 외에도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사회구성원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갓 태어난 도우미견과 은퇴한 도우미견을 돌보는 것은 자원봉사자들이다. 훈련견의 털을 손질하고 훈련장의 잡초를 뽑는 일에도 자원봉사자가 참여한다. 이들은 기꺼이 경기도 용인까지 오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남녀노소의 평범한 이웃이다. 길에서 만나는 도우미견을 말없이 응원하는 시민들도 장애인 도우미견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다. 이들 가운데 누가 장애인이나 도우미견이 아닌 삼성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눠왔겠는가.
이번 구조조정으로 에버랜드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시민 사이의 신뢰에는 금이 갔다. 삼성의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은 그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축소되거나 아예 없어질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삼성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민들의 희생과 배려를 떳떳하게 요청할 수 있을까.
에버랜드는 도우미견 사업 구조조정에 대해 “리조트 사업의 수익 악화 때문”이라고 트위터를 통해 해명했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삼성 안내견학교는 삼성화재의 후원으로 운영돼왔다. 에버랜드의 수익 구조가 일시적으로 나빠졌다 하여 엉뚱하게 된서리 맞을 까닭이 없다. 올해부터 보건복지부가 시각도우미견 사업지원금 1억원을 예산으로 책정했는데, 에버랜드는 정부의 지원을 마다한 바 있다. 수익 구조가 나쁘다면 정부 지원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수익 악화가 아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에버랜드 안내견학교의 후원사인 삼성화재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삼성화재 사회공헌 담당 부서가 밝힌 이유는 이렇다. “안내견학교 구조조정에 관해 아무 보고도 받지 못했기에 밝힐 입장이 없다. 보고서가 삼성화재에 도착하는 12월 말께 입장을 정리해 다시 얘기하자.” 그마저도 차일피일 미루다 한 달 만에 내놓은 답변이라고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어느 간부는 내게 전했다.
“안내견은 더 이상 새로운 아이템 아니다”
삼성은 “청각견은 중단하지만 안내견은 계속한다”는 해명도 내놓았다. 이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는다. 어느 훈련사는 “남은 사람들이 노력해 기존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겠다”고 내게 다짐했는데, 그 약속은 안쓰럽다. ‘약속’의 주체인 그들 훈련사는 구조조정에 가슴 졸여야 하는 근로자일 뿐, 의사결정 과정에는 참여할 수 없다.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10월 중순의 어느 금요일 밤, 에버랜드 관계자들이 나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속에 있던 이야기의 한 자락을 꺼냈다. 나는 그 말을 가슴 아프게 들었다. “윗분들이 볼 때, 안내견은 더 이상 새로운 아이템이 아니다.” “우리는 너희를 이용했고, 너희는 우리를 이용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름이’는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역할에 긍지를 느끼는 멋진 개였다. 비 오는 날, 빗물이 괸 웅덩이 곁을 지날 때면 자신이 앞서 물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고 나에겐 마른 길을 내주었다. 삼성화재의 광고 촬영 제안을 받은 것은 아름이가 은퇴한 이후다. 광고가 방영되던 넉 달 동안 TV를 켜지 않을 만큼 민망했지만, 나는 촬영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장애인 도우미견의 정착을 위한 광고이니 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름이는 내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었나 보다. 에버랜드 훈련사들이 “희망퇴직과 전배 가운데 하나를 정하여 보고”해야 하는 마감 시한이었던 10월17일 아침, 아름이는 세상을 떠났다. 훈련사로부터 아름이의 사망 소식을 접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구조조정으로 누구보다 경황 없었을 훈련사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고, 성남의 동물 전용 화장 시설까지 동행했다. 그곳에서 아름이의 ‘홈케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눴다. 은퇴한 아름이를 정성스레 보살펴줬던 아주머니는 애달픈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지난 10여 년간 삼성은 이 땅에 장애인 도우미견 문화의 싹을 틔웠다.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가치는 “세계 안내견학교 가운데 상위를 차지한다”는 삼성식 경쟁 논리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활동하는 도우미견은 얼마나 있는가, 이를 길러내는 훈련사는 얼마나 되나, 도우미견 제도와 문화를 사회 전체가 나누고 있는가 등이 이 사업의 진정한 가치다. 에버랜드의 이번 구조조정은 이런 가치를 모두 포기하는 어리석은 결정이다.
조건 없이 헌신한 자원봉사자를 비롯해 훈련사, 장애인 그리고 도우미견 모두에게 삼성은 상처를 남겼다. 사업 규모를 축소한 탓만은 아니다. 장애인 도우미견과 이를 돕는 사람들을 향해 ‘효과’ ‘전략’ 따위의 수식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삼성은 ‘홍보효과’와 ‘경영전략’을 이유로 사업을 축소했다. 노하우를 한 몸에 지닌 훈련사들은 퇴직하거나 전배 조처됐다. 도대체 도우미견 훈련사를 리조트나 물류 분야로 보내 무슨 일을 시키겠다는 말인가. “월급 못 받아도 좋으니 이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어느 훈련사의 말이 생생하다.
비영리 공익단체 설립 논의해야도우미견은 장애인과 사회를 이어주는 ‘기회의 다리’를 지탱하는 교각이었다. 겨우 자리잡은 그 기둥의 일부가 꺾이고, 기회의 다리는 좁은 문으로 전락했다. 시각장애인의 이동권이 중대하게 침해받았음에도 보건복지부마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가자미눈을 뜨고 대상의 강약을 가늠하며 반응하는 태도는 비겁한 침묵이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안내견학교가 있지만, 기업이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을 전담·직영하는 사례는 삼성 외에 없다. 대부분의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은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의 일부를 보조하고, 나머지는 개인·단체 후원 등을 통해 운영된다. 태생부터 사회의 공적 자산일 수밖에 없는 모델이다.
고대 그리스 왕 피로스는 승리한 전투마다 장수들을 많이 잃어 마지막 전투에서 결국 패망했다. 삼성에버랜드의 구조조정은 기껏해야 ‘피로스의 승리’가 될 것이다. 이젠 우리 사회 전체가 장애인 도우미견을 새롭게 인식하고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는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이를 통해 순차적으로 삼성의 도우미견 사업을 이양받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이번 사건을 통해 삼성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노영관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사용자·(주)네오엑세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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