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검은 눈이 촉촉하다. 어쩐지 회한처럼 보인다. 금빛 털을 쓰다듬자 젖은 눈을 끔뻑 감는다. “먼저 달리지 않고, 먼저 잠들지 않고, 지쳐도 먼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눈을 대신했습니다.” 시각도우미견 ‘아름이’를 위해 사람들이 은퇴식을 열었다. 나이 든 아름이는 이제 도우미견 노릇을 그만둔다. 성우가 내레이션으로 위로한다. “이제는 안내견이 아니지만 가슴에 남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자막이 뜬다. ‘삼성화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기증사업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된 청각도우미견
2008년 11월 방영된 21초짜리 광고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삼성이 이를 무상 기증한다는 것도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2008년 내내 많은 사람은 삼성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 주목했다. 당국이 제대로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겨울이 되자 비난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 광고가 등장했다. 도우미견의 선한 눈망울 위로 삼성의 푸른 로고가 겹쳤다. ‘아름이’ 편을 포함한 삼성화재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 시리즈 광고는 대한민국광고윤리대상을 받았다. 사회 윤리의식을 드높인 탁월한 광고라고 다들 첫손가락에 꼽았다.
광고에는 뒷감당이 따른다. 사업으로 광고를 입증해야 한다. 최근 삼성은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을 축소했다. 도우미견 사업을 맡아온 삼성 계열사 에버랜드 차원의 구조조정이 지난 10월 시작됐다. 익명을 요청한 에버랜드 직원은 “그룹 차원에서 경영 진단이 있었고, 누적 적자로 인해 에버랜드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에버랜드 홍보팀 관계자는 “4천여 명의 에버랜드 직원 가운데 2~3%의 인력을 줄일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80~120명의 직원을 줄인다는 이야기다. 구조조정은 연말께 완료될 예정이다.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은 에버랜드 국제화팀이 전담해왔다. 시각·청각 장애인에게 도우미견을 무상 분양해왔다. 이곳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전체 직원 70여 명 가운데 20여 명이 희망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그 정도의 인력이 다른 계열사 또는 다른 사업 분야로 전배됐거나 전배될 예정이다. 결국 30~40명이 남게 됐다. 도우미견의 훈련·관리를 맡는 부서의 규모가 기존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에버랜드 직원은 “계속 (도우미견) 일을 하고 싶었으나 사업이 접히면서 그만둔 경우도 있다. 좋은 일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남은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 구조조정 결과, 청각도우미견의 신규 분양은 중단됐다. 삼성 쪽은 매년 10여 마리의 청각도우미견을 분양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각도우미견의 분양 규모도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으나, 에버랜드 홍보팀 관계자는 “연간 8~10마리를 분양해온 시각도우미견 사업은 앞으로도 그 규모를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일부 네티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장애인 도우미견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담당 부서의 구조조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청각도우미견 사업은 중단하지만, 시각도우미견 사업은 계속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시각도우미견보다 홍보효과 적은 탓?
왜 청각도우미견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을까? 에버랜드 홍보팀 관계자는 “필요하다면 (사업을) 계속 유지했겠지만 기업으로서 효용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청각도우미견을 훈련해 분양하기까지 1억~1억5천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삼성그룹의 또 다른 사회공헌 활동으로 희귀질환 어린이 치료비 지원사업이 있다. 어린이 1명당 500만원씩 지급한다. 1억5천만원이면 희귀질환 어린이 30명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에버랜드 쪽 설명대로 사람 목숨을 살리는 비용과 장애인 도우미견을 기르는 비용의 차이가 크다. 그러나 비용만 따지면 시각도우미견의 부담도 크다. 훈련·분양 비용이 2억원에 이른다.
청각도우미견과 시각도우미견을 갈라놓은 잣대는 비용 대비 효용이다. 시각도우미견은 길거리에서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돕는다. 사람들 눈에 많이 띈다. 청각도우미견은 집 안에서 청각장애인의 일상을 돕는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각도우미견을 본 사람은 있어도 청각도우미견을 본 사람은 드물다. 에버랜드 홍보팀 관계자는 “분양을 할 때 기업 사회공헌 활동의 효과성을 고려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초인종이 울리면 진동이나 램프로 알려주는 장치가 나와 있어 청각도우미견을 대체할 수 있다. 도우미견이 필요하다는 청각장애인도 드물어 오히려 우리가 필요한 사람을 발굴해야 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김수영(36·가명·경기도 거주)씨의 생각은 다르다. 김씨는 청각장애인이다. 46살의 남편도 청각장애인이다. 14살·9살 아들과 6살 딸을 뒀는데, 둘째아들에겐 지적장애가 있다. 김씨 부부는 초인종 소리,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 시계 알람 소리, 세면대에서 물 넘치는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등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일하고 먹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초인종에 진동·램프를 달아본들 깨어 있을 때나 감지할 수 있다. 청각도우미견이 필요했다.
3~4년 전, 삼성 도우미견 센터에 청각도우미견 분양을 신청했다. 삼성 직원이 “엄청 큰 개”를 데리고 김씨 집을 방문했다. 동네를 살펴보고, 아파트 평수를 물어봤다. 김씨는 11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큰 개는 11평 아파트와 어울리지 않았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년 만인 올해 1월, 다시 삼성 직원이 개를 데려왔다. 이번엔 몸집이 작은 ‘시추’ 품종이었다. 김씨는 “우리 가족 모두와 잘 어울렸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삼성 직원은 “개와 가족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이 맞지 않는다는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쇄도하는 청각도우미견 수요
“청각장애인이라면 누구나 도우미견을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보니, 정보도 부족하고 신청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김씨는 인터넷 ‘메신저’ 창에 글을 썼다. 그는 메신저, 휴대전화 문자 등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는 메신저로 기자와 대화했다. “우리 깜돌이 보여드릴게요. 화상 통화 가능하세요?” 메신저 창에 김씨는 그렇게 썼다. 3살짜리 푸들인 ‘깜돌이’는 김씨가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거의 유일한 자랑이다.
3년 넘게 기다린 끝에 지난 9월 김씨는 청각도우미견 깜돌이를 무상으로 분양받았다. 삼성에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대신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가 도움을 줬다. 초인종이 울리면 깜돌이는 김씨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고, 다시 문 앞으로 뛰어가 두 발로 선다. 자명종과 휴대전화가 울려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근심을 덜어주는 것은 깜돌이뿐이다. 장애인 남편은 월급 100만원을 받으며 인테리어 일을 했다. 아내 김씨는 전업주부다. 혹시 궁핍한 살림 때문에 그동안 도우미견 분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김씨는 혼자서만 생각한다.
김씨 같은 청각장애인은 국내에 24만여 명이 있다. 정부에 등록된 장애인 가운데 10%를 차지한다. 삼성 도우미견 센터가 지금까지 분양해 활동 중인 청각도우미견은 60여 마리다. 박종관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사무국장은 “삼성이 기업 사정상 (청각도우미견) 사업을 정리했다면 모르겠지만, ‘수요’가 없고 대체 방법이 있어서 중단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28건의 청각도우미견 신청을 접수했다. 다른 도우미견에 비해 월등히 많다. 지체장애도우미견은 19건, 시각도우미견은 13건, 치료도우미견은 13건이었다. 수요로 보자면 청각도우미견이 시각도우미견보다 더 많은 셈이다. “삼성은 정치인·대학생 등 대외적으로 활용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주로 분양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런 고려 없이 꼭 필요한 사람, 특히 차상위계층 장애인에게 분양한다”고 박 국장은 설명했다.
“삼성이 하는데 굳이 왜 지원하나”
다른 나라에도 장애인 도우미견을 분양하는 단체가 있다. 전세계 공통적으로 ‘무상 분양’을 원칙으로 한다. 전세계 모든 기관이 민간 비정부기구(NGO)다. 오직 예외가 삼성의 안내·도우미견 센터다. 에버랜드 쪽도 “기업이 장애인을 위해 직접 나서 도우미견을 무상 분양하는 곳은 삼성밖에 없다는 점을 함께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느 기업도 나서지 않는 일을 삼성이 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인정받을 만하다는 이야기다.
“다른 나라에선 왜 그런 기업이 없을까요?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은 돈이 없어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도우미견 사업을 안 하는 것일까요?”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이형구 회장이 되물었다. 이 회장은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복지의 가치가 다르다. (사회복지) 마인드가 있는 기업이 있다면, 사회복지를 추구하는 민간단체를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1993년 10월 시각도우미견을 국내 처음으로 무상 분양했다. 삼성은 1994년 4월 시각도우미견 분양사업을 개시했다. 이후 삼성이 시각도우미견 보급에 집중하자,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청각도우미견에 눈을 돌렸다. 1999년 6월, 청각도우미견을 국내 처음으로 무상 분양했다. 뒤이어 삼성이 2003년 6월 청각도우미견 분양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이후 지체도우미견 분양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가 먼저 삽을 뜨면 삼성이 따라잡았고, 삼성이 일단 손대면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다른 ‘분야’를 개척해야 했다.
삼성은 에버랜드가 개의 훈련·관리를 전담하고, 비용의 일부를 삼성화재·삼성전자·삼성생명 등이 후원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왔다. 주력 계열사의 이름을 내건 덕분에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삼성의 그늘에 묻혔다. “‘당신들, 삼성한테 하청받아 하는 거 아니냐’거나 ‘삼성이 하는데 굳이 당신들이 왜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고 박종관 사무국장은 말했다. 기업에 후원을 요청하면 “삼성이 하고 있는 사업이라 후원 효과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150여 명의 후원회원에게 쌈짓돈이라도 모으려면, 삼성의 ‘주력사업’을 피해 차별적인 운영을 도모해야 했다.
삼성의 도우미견 광고가 한창 주목받던 2년여 전,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는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어느 성당의 땅을 빌려 훈련장으로 썼는데, 주임 신부가 바뀌면서 쫓겨났다. 이 회장은 자신의 집을 담보로 경기도 평택시 외곽에 작은 땅을 마련했다. KTX가 수시로 오가는 기찻길 아래 한갓진 시골 땅이다. 경기도가 4년 전부터 연간 7500만원을 지원하고, 올해부터 보건복지부가 1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후보견 70마리를 먹이고 훈련사 7~9명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주기에도 벅차다. 협회 직원들은 100만~150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기업 선심에 기대지 말고 사회운동 펴야
기업은 투자 대비 효용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사회복지는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돕는다. 이 회장은 “기업 가치를 추구한 덕분에 장애인 도우미견이 널리 알려진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도우미견 사업을 줄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 도우미견 보급이 사회운동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도우미견의 확산은 그 나라 사회복지 수준의 척도”라는 말도 했다. 도우미견이 널리 보급·활용되려면, 장애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회적 배려가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사회운동이다.
은퇴한 도우미견은 일반 가정에 분양된다. 장애인의 가슴에 친구로 남은 시각도우미견 ‘아름이’도 은퇴 뒤, ‘은퇴견 홈케어’ 가정에서 지냈다. 그러다 지난 10월에 죽었다. 15살이었다. “나이가 들어 자연사했다”고 에버랜드 쪽은 설명했다. 아름이가 죽은 10월, 삼성은 도우미견 사업 구조조정을 한창 추진하고 있었다. 때맞춰 아름이가 세상을 뜬 것은 그저 우연이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d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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