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계층이 한데 사는 공간.’ 소셜믹스(사회적 혼합)는 오랜 꿈이다. “사회적 혼합은 사회통합을 위해 이질적인 집단들의 주거지를 혼합하는 계획 방식으로, 영국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만큼 유래가 깊다.”(김준형 외, ‘임대주택 사회적 혼합의 장애요인과 해소방안에 관한 연구’)
유토피아에 우리는 얼마만큼 다가갔을까? 모호한 방향성, 생활에서 빚어지는 갈등, 투자 대상이 된 부동산 틈에서 여전히, 어쩌면 한층 더 혼란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소셜믹스에 소요되는 예산이나 갈등보다, 사회적 배제 문제를 좌시했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이 아직은 훨씬 크다.”(LH 토지주택연구원, ‘사회통합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체계 및 계획모델 개선 연구’) 사는 곳을 합치는 일은, 각 계층 분리된 세계를 모으는 일이다. 그 한가운데 공공임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택’이 있다.
영구임대 시작의 계기도 ‘화합’
한때 혁신으로 여겼으나, 결국 고립으로 이어진 첫 사회주택의 역사가 있다. 영구임대아파트(영구임대) 옆 작아진 학교는 그 적나라한 단면이다.
“소외된 이웃들이 손바닥만 한 비좁은 집에서 여러 세대가 비벼대며 살아야 하는 달동네를 그대로 두고 진정한 국민 화합도, 민주주의 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노태우 전 대통령, 1989년 서울 번동 영구임대아파트 기공식)
영구임대 시작을 알리며 언급한 것도 ‘화합’이기는 했다. 1960년 243만7천 명에서 1985년 962만6천 명까지 서울로 인구는 몰렸다. 저소득층 주거 상황은 열악했다. 달동네, 닭장집, 비닐하우스 집이 등장했다. 민간 임대료가 급등했다. 세입자 여럿 스스로 목숨 끊었다. 이런 상황, 빈곤층에게 49㎡(약 15평) 이하나마 아파트를 제공하는 영구임대 정책은 혁신이었다. “초기 입주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인 주거를 얻게 된 걸 행운으로 생각했다.”(김정현 외, ‘경기도 영구임대단지 사회복지관의 성과와 과제’) 절대적인 저소득층 주거의 질을 높이면 ‘국민 화합’은 이뤄질 거라고 믿었다.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을 발표하며 영구임대 25만 호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이후 19만 호로 축소).
10여 년 뒤 맞닥뜨린 현실은 달랐다. 상대적 빈곤, 사회적 배제를 간과했다. 저소득층 1천 가구 이상씩 한 단지에 모아놓은 삶의 공간에서 주민들은 증언한다. “영구임대에 산다는 말을 남에게 하기 싫다. 남이 뭐라고 하기보다 나 스스로 위축되고 말하기 싫다.” 학교에서 자녀가 겪는 차별은 특히 모멸적이다. “여기선 청약자(분양)와 영세민(임대)의 자녀들은 학교도 다른 곳을 다닌다. 청약자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영구단지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한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 ‘서울시 영구임대주택 주민의 생활’, 2002)
인구 구성도 쏠렸다. “2010년 기준 LH(한국토지주택공사) 영구임대주택 65세 이상 고령자는 총입주자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고령인구가 2011년 13.1%인 것과 비교할 때 더 고령화가 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주자 연령 분포만 보면 영구임대주택 단지는 이미 ‘초고령 사회’다.”(조용경 외, ‘고령화에 따른 영구임대주택의 범주별 거주만족에 관한 연구’) 빈곤이 노인 세대를 중심으로 펼쳐질수록 영구임대의 고령화는 한발 앞서갔다. 아이 키우는 집은 사라져간다. 임대단지 옆 작은 초등학교·중학교가 생기는 또 다른 이유다. 1990년대 초반 비좁게 지어진 영구임대는 2000년대가 요구하는 주택 수준과도 멀어졌다.
한 단지 안에 짓고 동별 구분 없도록
‘섞여야 한다’. 2000년대 들어 유토피아를 향한 첫발이 시작됐다. 2003년 서울시가, 2005년 정부가 소셜믹스를 포함한 공공임대주택 정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어떻게? 한발 앞선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를 한 단지 안에 짓고 점차 동별 구분조차 없애는 소셜믹스를 택했다. 2007~2008년 준공된 서울 장지·발산·강일·은평뉴타운 지역 등을 시작으로 혼합단지가 들어섰다. 임대가 분양 가구보다 더 많은 혼합단지도 나타났다. 반발과 도전이 이어졌다.
첫 번째 도전, 생활 속에 펼쳐졌다. 헬스장, 어린이집 같은 공동시설 사용부터 위탁관리업체 선정을 둔 다툼까지 생활 곳곳 부딪힐 문제가 많았다. 시설 하나를 지어도 결국 내 재산 가치가 되는 분양 가구와 당장 살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중요한 임대 가구 사이 거리가 좁아들지 않았다. 분양동과 임대동 사이를 가르는 옹벽을 치다가 몸싸움이 일고(서울 성북구 길음동 혼합단지), 헬스장 시설비 분담을 둔 갈등 속에 누구도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일(서울 강서구 마곡동 혼합단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갈등 속에, 제도는 누구 편도 들지 않은 채 발을 뺐다. 임대 가구가 수적으로 많아도 임차인일 뿐이다. 임차인들의 요구는 소유자(SH 등)를 거쳐야 하는데, 분양 가구가 보기에 ‘여기 살지도 않는 SH’의 권한은 의심스럽다. 사사건건 문제에 간섭하기에 공사의 역량이 부족하기도 하다. “분양주택에 대한 법과 임대주택에 대한 법이 나누어져 있어요. 혼합단지에 대한 법이 따로 필요하지만 없는 상황이죠. 현장에서 갈등은 큰데 정리해줄 제도가 없습니다.” 오정석 SH도시연구원 수석연구원이 <한겨레21>에 한 말이다.
뒤따른 정부와 LH의 소셜믹스는 임대 가구 비중을 낮추거나, 영구임대보다 나은 수준의 임대단지를 이전처럼 모아두는 형태를 주로 택했다. 갈등은 다소 피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 다른 계층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기본 취지는 미약해졌다.
집값 집착도 더해져
거세게 오르는 집값과 부동산 소유에 대한 열망은 더 근본적인 도전이다. 빚으로 감당한 집값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집착이 분양 가구 사이 커간다. ‘섞이면 값 떨어진다’는 막연한 거부감이 인다. 실제는 어떨까? 서울지역 31개 50년공공임대주택 단지를 실증분석한 결과는 ‘임대단지 또는 소셜믹스된 임대주택이 주변 집값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김주진, ‘사회적 혼합이 거주자의 사회적 배제와 주변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 2008)
부동산이 유력한 자산으로 여겨질수록 사회주택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그나마 사회주택에 대한 인식이 좋았던 네덜란드나 덴마크 같은 유럽 국가들에서조차 저금리 속 민간 부동산 시장으로만 쏠리는 중간 계층의 욕망, 그로 인해 사회임대주택이 저소득층만의 주택이 되어가는 상황은 고민거리다.
그래도 정부 노력은 이어진다. 국토교통부는 2020년 업무계획에서 영구·국민·행복주택 등으로 나뉜 공공임대를 통합해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고 고령화가 심한 영구임대와 소득수준이 높은 편인 국민임대, 인구 구성이 젊은 행복주택을 한 단지에 지어 소셜믹스를 하겠다는 의미다.
다만 이렇게 섞인 임대단지가 분양 가구와 함께 지어질지, 임대주택 유형별 비중은 어떻게 할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임대료 수준이 높은 국민임대나 행복주택 비중이 커질수록 공공임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재정 부담은 줄어든다. 반면 더 절박한 처지인 저소득층이 정부가 제공하는 새 임대아파트에 살 기회는 축소된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숱한 어려움에도 소셜믹스를 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아이들이다. ‘학교에서 자녀들의 교우관계 및 선생님으로부터 차별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혼합단지 가운데서도 동별 구분 없이 더 적극적으로 섞인 단지에서 낮게 나타난다.(김주진, 2008) 사는 곳 가르지 않고 이웃 사이를 두둑히 하는 다리 역할도 아이들 몫이다. 대개 조사에서 임대 가구와 분양 가구가 친분을 형성한 이유로 가장 흔히 꼽히는 것이 ‘자녀의 친구 가정이기 때문’이다.
아직 없지만 확신을 놓을 수 없는 ‘좋은’ 곳
“처음에는 혼합단지가 낯설어 걱정이 있긴 했어요. 살아보니 별달리 차이를 못 느껴요. 어차피 같이 아이 키우고 학교 보내고 비슷한 것 먹고 사는 엄마들이니까요.”(서울 강서구 마곡동 혼합단지 분양아파트 주민) 막상 살아보니, 같이 애들 키우고, 비슷한 찬거리 생각하고, 내가 사는 곳이 좀더 괜찮아지길 바라는 바람 또한 같은 이웃이다. ‘함께 사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고 좌절할 일만은 아니다. 배제와 분리 없이 어울려 사는 우리 동네, 그리고 아이들. 아직 ‘없는’ 곳일지 몰라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놓을 수 없는 ‘좋은’ 곳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토피아의 본래 뜻처럼.
방준호 whorun@hani.co.kr·변지민 기자 d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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