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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들을 안아주나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전국에 단 한 곳… 정부 기관·치료진이 2차 가해 하기도
등록 2019-04-17 01:44 수정 2020-05-02 19:29
건설 노동자들이 교각을 세우는 모습. 박승화 기자

건설 노동자들이 교각을 세우는 모습. 박승화 기자

“지난 6개월 동안 7만㎞ 넘게 운전했다.” 전국에 단 한 곳뿐인 대구 달서구의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이하 전문상담센터)에서 일하는 김미연 팀장이 4월9일 과 통화하며 한 말이다. 김 팀장과 상담사 1명은 지난해 5~12월 제주는 물론이고 대구와 경북 경주·영천, 경남 거제·밀양, 대전과 충남 서산·금산, 세종, 인천, 전남 함평까지 상담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김 팀장은 “동료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한 노동자들은 사고 방지가 미흡했던 회사 쪽에 대한 분노, 죄책감, 불면증, 불안 등을 다양하게 호소한다. 그런데 상담사 인력이 한정적이어서 사망 사고가 난 사업장 위주로 사고 목격 트라우마 치유를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라고 했다.

김 팀장이 6개월 동안 7만km를 달린 이유

2017년 5월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가 난 뒤 사고를 목격한 2차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겪는 ‘사고 목격 피해 트라우마’가 사회적으로 알려졌다. 사고를 직접 당한 1차 피해자나 사고를 수습하는 경찰, 소방관 등 3차 피해자와 견줘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들의 심리적인 외상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2018년 5월부터 12월까지 대구근로자건강센터에서 전문상담센터를 처음으로 시범 위탁 운영을 시작했다. 산업재해를 목격한 노동자들의 트라우마를 관리해 외상후스트레스 같은 2차 산업재해를 예방해야 한다는 인식에서였다.

실제로 반년 새 전문상담센터에서 상담받은 노동자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전문상담센터가 노동자 396명에게 만족도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모두 ‘상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안전보건공단이 올해 서울·부산·광주 3곳에 전문상담센터를 직영으로 운영하기 위해 올린 예산 4억5천만원은 전액 삭감됐다. 2017년 9월 ‘산업재해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처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힌 고용노동부의 발표는 1년짜리 구호에 그쳤다. 결국 안전보건공단은 자체 예산으로 전문상담센터 위탁 운영을 연장한 상태다.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전국에서 벌어지는 산업재해를 한 곳에서 다 맡기에는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다. 전문적이고 안정적으로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관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전문상담센터를 확대하는 게 시급하다. 올해 예산이 전액 삭감됐지만 아예 손 놓을 수도 없었다. 공단에서 다른 사업에 들어갈 예산을 조금씩 줄여 전문상담센터 운영비를 만들어 위탁 운영 중이다. 내년에도 전액 삭감된 예산을 다시 올릴 계획이다”라고 했다.

동료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한 노동자가 호소하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관리할 수 있는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는 전국에 단 한 곳뿐이다.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제공

동료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한 노동자가 호소하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관리할 수 있는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는 전국에 단 한 곳뿐이다.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제공

회사는 ‘나약하다’, 의료진은 ‘뭘 그런 거로’

전문상담센터 말고도 전국적으로 근로자건강센터가 21군데 있다. 전문상담센터의 상담사 3명과 근로자건강센터 상담사 21명을 다 더해도 24명이 전부다. 근로자건강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는 주로 직무 스트레스 관리를 맡는다. 동료들이 죽거나 다친 것을 목격한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사고 목격 피해 트라우마에 대한 상담 경험이나 전문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전문상담센터에서 지난해부터 서너 차례 근로자건강센터 상담사에게 전수 교육을 하지만 상담사들의 이직이 잦아 연속성이 떨어진다.

양선희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 부센터장은 인터뷰에서 “사고를 목격한 2차 피해자인 노동자들은 특수하다. 겉으로 보면 몸이 건강하니까 정상적인 사회 복귀를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비슷한 노동환경에서는 사고 당시가 재현돼 불안과 공포를 다시 경험한다. 초기에 상담받지 못해 치유 기회를 놓친 노동자들이 6~7개월 뒤 정신과 전문병원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회사 쪽에서는 사고와 관련 있다고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때 적극적으로 사고 목격 피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동료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한 2차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겪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에 대한 국내 연구나 사회적 인식은 걸음마 단계다. 일터에서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정부 기관, 치료진이 오히려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들은 “뭘 그런 거로 치료를 받냐?” “곧 괜찮아진다” “만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있다는 트라우마로 산재 인정받겠느냐”는 부정적인 비난 탓에 제때 치료받을 기회를 놓친 경우가 있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를 4월 중순 발간할 예정인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의 이은주 상임활동가는 인터뷰에서 “피해 노동자들이 겪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다. 죄책감을 갖지 않아야 할 노동자들도 일상이 깨지고 삶이 무너졌다. 사회가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데도 여전히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족하다. 회사 쪽은 ‘네가 나약하다’ ‘유별나다’며 침묵을 강요했다. 근로복지공단도 가장이자 노동자인 이들에게 ‘사고 목격 트라우마가 심했으면 사고 이후에도 어떻게 사고가 난 작업장에서 계속 일했느냐’고 물으며 이들을 지지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사고 전 교육 절실해

지난해 사망 사고가 난 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안전보건 담당자는 과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고 전에도 관리자나 노동자에게 사고 목격 트라우마 관리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교육이 절실하다. 사고가 나면 회사 쪽은 사고 처리에 급급하다. 노동자들의 심리적 외상은 뒷전으로 밀린다. 회사 쪽은 작업 중지 기간 떨어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작업 중지 명령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을 사고 현장에 그대로 투입하는 것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사고목격 트라우마는 모두 14등급


산재 인정받아도 직업재활 못해


2017년 5월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에서 함께 일하던 친동생과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박철희(47)씨는 당시 사고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 가운데 처음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박씨는 에 말했다. “초기에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사이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렸어요.” 요양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빠지는 가정 형편 때문에 사회 복귀를 서둘렀다. 그날의 사고 이후 박씨는 크레인을 제대로 못 쳐다봤다. 예전에 일하던 조선소에서 일하기가 겁났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엔 운전도 어려웠다.
박씨는 다른 일을 구하려고 면접도 여러 차례 봤다. 사업주는 산재 인정자 채용을 꺼렸다. 돌고 돌아 근로복지공단 쪽에 직업재활 프로그램 참여 여부를 물었다. 근로복지공단 쪽은 “치료를 종결해야만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박씨는 휴업급여를 받으면서 3개월마다 요양 기간 연장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취재 결과 박씨는 치료가 종결돼도 직업재활 프로그램에 아예 참여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현재 산재 보상과 재활 서비스 절차를 살펴보면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증, 적응장애, 급성 스트레스장애, 불안장애 등의 정신질환으로 산재를 인정받으면 요양급여와 휴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수면제나 신경안정제 등 약을 처방받는 정도지만, 치료 중 일을 못해 당장 생계가 어려워진 사고 목격 노동자와 가족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다. 이후 치료를 종결하면 주치의에게 장해진단서를 받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장해등급을 판정받을 수 있다. 장해등급 판정은 치료 후에도 신체적·정신적으로 장해가 남은 노동자에게 1∼14등급에 해당하는 장해급여를 지급하는 보상 조처다.
문제는 정작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고 목격 피해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장해등급이 가장 낮은 14등급이라는 점이다. 이조차 과학적인 판정 기준이 없다. 근로복지공단은 뇌손상에 따른 장해 14등급에 준해 일괄적으로 사고를 목격한 산재 인정 노동자들에게 14등급으로 판정할 뿐이다. 뇌손상에 따른 장해 14등급은 ‘노동 능력은 있으나 두통, 현기증 등의 자각 증상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고 현장과 비슷한 근로환경에서 일하면 정신적 고통이 재현돼 취업 가능한 직종의 범위가 사실상 제한된 사고 목격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노동 능력’ 차이를 일반화해버리는 접근이었다.
이 때문에 14등급으로 판정받은 사고 목격 노동자들은 근로복지공단에서 하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에 아예 참여할 수 없는 처지다. 치료를 종결해도 14등급으로 장해등급을 판정받을 예정이어서 요양 중에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는 사실상 없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에서 제공하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의 대상자는 장해등급 1∼12등급을 받은 노동자로 제한돼 있다. 실업 상태인 1∼12등급 산재 장해인은 직업훈련에 참여하면 훈련비를 받는다. 1∼12등급 산재 장해인을 원직장에 복귀시켜 안정적인 고용을 유지한 사업주에게도 직장 복귀 지원금 등을 준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정신질환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고 목격 노동자에 대한 과학적인 장해등급 판정 기준은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최근 직업재활 프로그램 대상자를 14등급까지 확대하는 내용이 담긴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개정 검토안을 마련했지만 시행령 개정은 국회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어서 한계가 있다”고 했다.

대구·창원=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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