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죽은 동료에 대한 죄책감, 크레인에 대한 두려움, 사고 목격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일터를 떠났다. 이들은 직접 몸을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죽음과 부상을 목격한 ‘2차 피해자’였다. 사고 뒤 수개월, 1년이 지나도 동료들이 죽어간 기억 속에 갇혀 여전히 사고 목격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정부 기관과 일터, 가정에서는 “멀쩡해 보이는데 꾀병 아니냐” “뭘 그런 거로 치료를 받냐?” “곧 괜찮아진다” “산재 인정받기도 어려운데 왜 하냐”고 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박성원의 소설 는 말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들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사고 이후 이들의 달라진 세상을 알 수 있을까. 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이자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노동자들을 3월22일부터 4월5일까지 여러 차례 만났다. 사고 후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 등을 지원한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이 2018년 5월부터 11월까지 노동자 11명을 치유하기 위해 수차례 만나 기록한 초안을 참고해 다각도의 목격담과 증언으로 그날 하루, 이후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세밀화를 그려봤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는 4월 중순 출간될 예정이다.
조윤영·변지민·장수경 기자 jyy@hani.co.kr
“쾅!” 김재영(41·가명)씨는 6층 꼭대기에 있었다. 사고가 난 곳은 3층의 휴게 공간이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야간 근무자들이 페인트를 칠할 표면을 매끄럽게 작업해둬 분진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물량팀(1차 하청업체로부터 재하청을 받는 단기 일용직)에서 도장 전에 하는 전처리 작업을 맡은 김재영씨는 바닥을 치웠다. 분진이 담긴 쓰레기함을 지브형 크레인이 들어내렸다. 사고가 난 지브형 크레인이었다. 바로 옆에는 골리앗 크레인이 있었다. 갑자기 동료 한 명이 “어, 어, 어!” 외쳤다. 김재영씨도 고개를 들었다. 골리앗 크레인이 김재영씨 머리 위를 지나갔다. 골리앗 크레인이 지브형 크레인에 가까워졌다. ‘칠 것 같은데, 서야 하는데….’ 골리앗 크레인은 지브형 크레인을 지그시 밀어버렸다.
‘바바박!’ 비명이 났다.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가 올라갔다가 갑자기 떨어질 때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물량팀 도장 작업을 맡은 김오성(38·가명)씨는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후 2시52분, 53분. 김오성씨는 간이 화장실에 한 동료가 들어가는 걸 봤다. 5월1일은 노동자의 날이었다. 하지만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는 쉬는 날이 아니었다. ‘돈은 그대로 받고 조금 더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간이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정해진 쉬는 시간이었던 오후 3시에 맞춰 담배를 피우러 가면 빈자리가 없었을 터였다. 따뜻한 커피 한잔도 쉬는 시간 10분 안에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도 이른 시간에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쉬자”며 동료를 불렀던 김오성씨는 평소 자신이 다니던 장소에 “툭” 떨어진 쓰레기함을 봤다. ‘우우우!’ 이어 진동 소리가 났다. 크레인 붐대를 잡아주던 와이어의 중간에 달린 고리가 ‘툭’ 떨어졌다. 김오성씨가 머리를 드는 순간. ‘휘이익!’ 와이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김오성씨는 순간 생각했다. ‘영화에서는 와이어를 잡아채는 영웅도 있던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구나….’ 김오성씨 옆에 있던 한 동료가 큰 기계에 몸을 숨겼다. 와이어는 절묘하게 그 동료를 ‘탁’ 치고 돌아갔다. 단번에. 스무 살 정도 돼 보이던 동료는 쓰러져 덜덜 떨고 있었다.
간이 화장실 건너편에는 흡연구역이 있었다. 물량팀 특수도장 작업을 맡은 김명진(38·가명)씨는 그때 거기서 담배를 피웠다. 김명진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같이 있던 동료에게 “피해라”고 했다. 김명진씨는 한쪽으로 뛰고, 그 동료는 다른 쪽으로 뛰었다. 이내 이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지브형 크레인 붐대가 떨어졌다. 차례대로 떨어졌다. 같이 일한 막내 동료는 그날이 첫 출근이었다. 그런데 김명진씨도, 동료들도, 막내 동료를 챙기지 못했다. 막내 동료는 그 자리에서 붐대에 깔려 죽었다. 동료는 붐대는 피했지만 날아온 와이어를 피하지 못했다. 김명진씨는 동료가 그렇게 날아가는 것을 봤다.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다. 김오성씨도 얼이 빠졌다. 이내 김오성씨는 흡연구역으로 달려갔다. 김오성씨가 발견한 두세 명은 이미 지브형 크레인 붐대에 깔려 미동도 없었다. 그순간 간이 화장실에 들어갔던 동료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물량팀 결선 작업을 맡은 박철희(47)씨는 가장 먼저 119에 신고했다. 하지만 박철희씨와 함께 일한 친동생은 사고가 난 지 1시간 만에야 응급실로 옮겨졌다. 박철희씨의 동생은 사고가 나고도 한동안 살아 있었다. 사고 난 지 3시간 후에 심정지가 왔다. 아프다는 동생에게 박철희씨가 해줄 수 있는 건 “곧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다시는 크레인 밑에 설 수 없어이후 김명진씨는 와이어에 맞아 크게 다친 동료가 경북 구미로 병원을 옮긴 뒤 줄곧 병원에 있었다. 그날 자신만 다치지 않은 게 미안했다. “행님을 같이 델고 갔다면 안 다쳤을 텐데, 숨진 막내도….” 아내는 “뭐 한다고 병원에 맨날 그래 가노”라고 했다. 병원에 혼자 있을 동료의 말동무가 됐다. 밤이면 잠을 못 이뤘다. 악몽에 시달렸다. 뻥 뚫린 곳에서 머리 위로 물건이 왔다 갔다 움직이면 떨어질까봐 불안해 견디지 못했다. 어느 날 집에서 나오는데 아파트에 누군가 이사를 왔다. 사다리차가 있었다. 김명진씨는 먼 길로 에둘러 나왔다.
다시는 배 위에 오르기 싫었다. 김재영씨는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 조선소에서 임시 발판이나 통로(족장)를 설치하는 일을 시작했다. 블록도 1층, 2층밖에 안 됐다. ‘별로 높지도 않고, 크레인이 왔다 갔다 하지도 않을 거다’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김재영씨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가 순식간에 걷혔다. 김재영씨는 고개를 들었다. 크레인이 쓰레기통을 들고 김재영씨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순간 신호수를 밀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공포였다. 도저히 크레인 밑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느꼈다. ‘이제 난 조선소 일 못하겠구나.’
같이 일한 친동생의 장례를 치른 직후 서울 집으로 올라온 박철희씨는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사고 당시 처참하게 숨진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료들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들지 않았다. 이삼 일 내리 잠을 못 잘 때도 있었다. 박철희씨는 술에 의지했다. ‘술이라도 마시면 취해서 자겠지.’ 상담해주던 보건소 상담사가 산업재해를 신청해보라고 권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산재로 인정받은 것은 박철희씨가 처음이었다.
물량팀 배관 작업을 했던 김현민(46·가명)씨도 함께 일하던 친형과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뒤 두 달 넘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음식만 먹으면 게워냈다. 김씨는 한 정신과 전문병원에 5일 동안 입원했다. 김씨는 홀로 편하게 쉬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형이 죽은 게 자기 책임 같았다. 김씨는 형보다 먼저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형을 불렀다. ‘쉬러 가기 전 형에게 먼저 전화했다면 형을 살릴 수 있었을까?’ 김씨는 수면제를 먹어야 5시간이라도 잤다. 근로복지공단의 한 담당자는 “정신질환은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 인정받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거다”라고 했다. 김씨는 근로복지공단의 설명을 듣고 산재 신청을 포기했다.
어느 날 김재영씨는 집에서 가만히 앉아 티브이를 봤다. 두 아이가 엄마에게 ‘뭘 해냈다’며 소리 지르며 자랑했다. 애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김재영씨 귀에 꽂혔다. 처음에는 ‘직장을 못 구해서 예민한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도가 심해졌다.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해라!” 김재영씨는 날마다 애들에게 소리쳤다. 어느 날 아이가 “아빠는 무섭다”며 울먹였다. 그날로 김재영씨는 심리상담센터를 자기 발로 찾았다. 한때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아, 이러다 죽는 건가.’ 막연한 공포가 생겼다. 사고 후 여성들의 높은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갑자기 추락할까봐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두려웠다.
사람이 변했다. 김오성씨도 사소한 일에 민감해졌다. 자동차 경적 소리만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누군가 새치기하면 용납이 안 됐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도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 사고가 났다. 어느 날 부부 싸움을 심하게 했다. 화가 난 김오성씨는 살림살이를 때려부쉈다. 아내가 경찰에 신고하고 김오성씨의 친동생을 불렀다. 동생이 김오성씨를 말리면서 말했다.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 병원에 가봐라. 정신병은 마음의 감기라 하더라.” 동생의 권유로 병원에 갔다. 처음 3주는 약효가 있었다. 이후 약효가 떨어졌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다시 난폭해질 것 같았다. “나락으로 떨어져서는 안 됐다.”
김명진씨도 집에서 홀로 견뎠다. 병원에 입원한 동료가 “니도 치료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고 후 심리치료를 받으라는 전화는 여러 통 받았다. 하지만 ‘내가 미쳤나?’라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됐다. ‘괜히 갔다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불이익이 있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에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도 김명진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멀쩡한 것 같은데….” “또 기간 연장해요?” “이제 기간 연장 안 하면 안 돼요?”라고 물었다. 김명진씨는 생각했다. ‘내가 어데 물건 사면서 흥정하는 거 같아요.’
삼성중공업과 하청업체, 재하청업체로 이어지는 왜곡된 고용 관계에서 김오성씨가 치료받기 위해 넘어야 할 난관은 많았다. “웬만하면 치료를 안 받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런 거는 극복할 수 있다”던 하청업체 쪽의 말은 김오성씨에게 ‘그런 것도 못 고쳐 병원에 다니느냐’는 식으로 들렸다. 1~2주 뒤 하청업체 쪽에서 또 전화해 물었다. “치료는 의미가 없다. 치료 안 받아도 되는 거 맞잖아? 앞으로 치료받을 생각 있나?” 하청업체 쪽의 거듭된 질문에 김오성씨는 자신이 없어졌다. 업체 쪽은 “내가 회유해서 치료를 못하겠다고 하면 안 되니까 자필로 적어달라”고 했다. ‘치료 같은 게 의미가 없고, 필요성을 못 느낀다.’ 김오성씨가 하청업체 쪽의 말을 받아 적은 종이는 원청인 삼성중공업에 제출됐다.
처음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생각도 못했다.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때문에 전화할 때마다 김재영씨가 다니던 업체가 어딘지, 무슨 일을 했는지 재차 물었다. 김재영씨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전화할 때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결국 해를 넘겼다. 김재영씨는 기대감을 갖고 전화를 받았다가도 “업체가 어디죠” “무슨 일을 하셨죠”라고 묻는 상대방에게 욕을 뱉을 뻔했다. 김재영씨가 다니던 업체 쪽도 말했다. “가능성도 없는 것을 왜 하려고 하냐. 돈만 까먹는 거다. 너 생각해 그러는 거다.” 김재영씨는 ‘괜히 산재 신청하는 건가’라는 걱정이 들었다.
산재 인정 후에도 나 홀로“니 뭐 하노, 인마!” “그냥 놀아.” 이웃들은 김명진씨에게 왜 아직도 집에 있는지 묻는다. 김명진씨가 사는 동네는 좁았다. 잠깐 돌아다녀도 “어, 명진이 보이던데”라며 이웃들이 전화를 걸었다. 김명진씨는 계속 집에서 쉰다고만 얘기했다. “일도 안 하는데 돈이 나오는 걸 부러워했어요.” 김명진씨는 사고 후 어딜 나가도 불안해졌다. 아이가 놀이동산에 가자고 졸랐지만 여태 못 갔다. 아내도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도 안 하고 집에서 술만 마시니까 아내 심정은 이해해요.” 김명진씨는 사고 후 혼자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겪는 증상이 이해가 안 됐다. 최근 김재영씨는 애들과 기차를 탔다가 공황장애를 경험했다. 열차가 탈선할까봐 숨이 차고 식은땀이 났다. 사고 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새롭게 나타난 증상에 김재영씨는 다시 낙담했다.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차도가 있으면 얼른 다른 일을 배워 돈을 벌 참이었거든요.” 아내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내도 홀로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거울 텐데, ‘트라우마 때문에 힘들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하면 아내가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최근 김오성씨와 함께 일했던 한 동료는 이력서를 넣고도, 업체 쪽에서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물으면 ‘아, 일을 못하겠구나’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 동료는 업체 쪽에 “딴 데 들어가기로 했다”며 둘러댔다. 김오성씨가 찾으면 만나도, 다른 친구들이 부르면 나가지도 않았다. 동질감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살아남은 자신들은 위태로웠고 불안정했다. 김오성씨는 크레인과 비슷한 것만 봐도 놀랐다. 크레인 근처에서 다시 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데, 스스로 먹물을 뿌리는 것 같아요. 먹물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좌절감이에요.”
사고 났을 때가 재현되는 조선소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김재영씨는 타일 기술이라도 배우려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페인트를 섞어주는 기계에 전선이 감기는 걸 보고 전선을 잡다가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김재영씨는 뼈가 부러지고 살이 파였다. 김명진씨는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현장에 업체 사장도 함께 있었다. 산재 신청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업체 사장이 목격자여서 사고 처리도, 산재 인정도 곧바로 됐다. 김재영씨는 말했다. “눈에 보이는 신체 사고는 쉽게 산재로 인정받더라고요. 트라우마랑 너무나 비교돼요.”
김현민씨는 4월15일 산재 신청을 위한 특별진찰을 받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김현민씨가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를 목격한 피해 노동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김현민씨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월요일 아침마다 전체 조회 시간에 안전교육을 한다. 어느 날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를 사례로 언급했다.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사고를 미리 막자는 내용이었다. 김현민씨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한때 김현민씨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가 뭔지도 몰랐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날이 떠올라 절로 눈물이 났다.
운전하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다가, 밥을 먹다가도 그날의 기억은 불쑥 김현민씨를 삼켰다. 최근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담배를 피우러 휴게실에 갔다가 바로 옆에 크레인이 지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김현민씨는 ‘화장실에 간다’고 나와 세수하는 척 눈물을 닦았다.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김현민씨는 ‘가면’ 속에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가렸다. “누구든지 위로해줬으면 좋겠어요. 동료들이 죽은 게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도움 주신 분들이은주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상임활동가
한채민 심리상담사
최지명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이미영 청소년상담사
문선현 심리상담사
정수빈 가족상담가
손소희 기록노동자
박희정 인권기록활동가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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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인천·창원·울산=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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