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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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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만 하고 대비는 안 했다

2015년에 이미 최저임금 인상 필요 공감대 조성…

정치권은 4년 동안 뭐했나?
등록 2019-01-26 17:00 수정 2020-05-03 04:29
알바노조가 2017년 4월30일 서울 강남구 BGF리테일 본사 앞에서 연 ‘얼굴 없는 알바들의 가면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최저임금 1만원 구호’를 외치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알바노조가 2017년 4월30일 서울 강남구 BGF리테일 본사 앞에서 연 ‘얼굴 없는 알바들의 가면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최저임금 1만원 구호’를 외치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노동자들은 사람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수요와 공급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버터 가격을 정하는 것처럼 결정할 수 없다. 노동자가 얼마를 받느냐의 문제는 수요 공급의 원리만큼 사회적 힘, 정치적 힘에도 달려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2015년 3월2일 미국 일간지 에 기고한 ‘월마트의 보이는 손’의 한 대목이다. 그는 기고에서 월마트의 최저임금 인상이 노동시장을 왜곡해 실업률을 높일 것이라는 보수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최저임금 인상이 미국의 소득 불평등 정도를 완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폴 크루그먼의 주장대로 임금은 결국 사회·정치적 합의다.

주요 대선 후보 모두 ‘1만원’ 공약

한국 사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이란 이슈도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2012년 대선 이후 비정규직·아르바이트 노동자들 중심으로 거리에서 울려퍼지던 ‘최저임금 1만원’ 구호는 시간이 흐르며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고, 정치권은 이를 끌어안았다. 2017년 대선에 나온 5명의 후보는 달성 시기만 다를 뿐 모두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여의도에서 ‘최저임금 1만원’은 사실상 ‘천덕꾸러기’가 됐다. 보수 야당을 중심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유예하거나 속도 조절을 목표로 하는 법안이 다수 발의돼 2월 국회에서 여야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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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기에 치른 2017년 5월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 시급 1만원을 공약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임기 내인 2022년까지 1만원을 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는 심화하는 소득 불평등과 저임금 노동자의 문제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에 바탕을 둔 공약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최저임금 1만원 로드맵은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정책이 됐다.

‘최저임금 1만원’은 2012년 대선 때, 소수 정당인 진보신당 김순자 후보의 공약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최저임금 시급이 4580원인 상황에서 김순자 후보의 공약은 소수 정당의 이색 공약 정도로 다뤄졌다. 그때 박근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는 ‘최저임금 현실화’를,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최저임금 1만원’은 김순자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알바연대’(알바노조)를 만들어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노동계의 주요 요구로 떠올랐다. 여의도 정치권도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이인영 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을 화두로 던졌다. 2015년 3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도 “내수 진작을 위해 최저임금을 빠르게 올려야 한다”고 밝혔고,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시장의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해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던 새누리당도 최저임금 인상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2016년 총선을 거치며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2017년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 반영됐다. 2017년 7월 최저임금위에서 2018년 최저임금 시급을 16.4% 올려 7530원으로 결정할 때만 해도 “속도위반”이라고 비판하던 자유한국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정당들은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했다.

무책임한 반성문만 쓰는 정치인들

하지만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며 최저임금 인상의 그림자가 드러나자 정치권의 기류가 바뀌었다. 홍준표 후보는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인 2017년 12월 관훈토론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좌파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했는데, 홍 대표도 대선에서 공약했다”는 질문에 “최저임금 대상이 알바생과 저소득층이라고 보고, 5년 내 1만원까지 점차 올려보겠다고 했다”고 답했다. “(대선 공약인) 최저임금 인상 방식은 어떤 것이었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이 안 됐기 때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즉답을 피했다. 유승민 후보도 2018년 1월10일 “대선 후보였던 사람으로서 3년 안에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는 게 과속이라고 생각하며 반성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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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의 고통은 예상된 것이었다. 정치는 그 대책을 세우고 갈등을 조정해야 했지만, 결국 ‘을과 을의 갈등’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당은 최저임금 부작용을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는 데 안이한 접근을 보였고, 보수 야당은 최저임금을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데 활용하며 지난 1년을 보냈다는 평가다.

준비가 부족했던 여당은 지난해 5월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재계의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여 최저임금 대비 정기 상여금 25% 초과분과 복리후생비 7% 초과분을 최저임금에 산입하는 ‘최저임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줄이는 조처에 노동계는 당연히 반발했다. 야당과 재계·보수 언론의 공세에 시달린 문 대통령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2018년 7월16일 수석·보좌관회의)고 몸을 낮췄고,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를 방문해 공무원들에게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빠릅니까”라고 물었다.

최저임금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최근 정부가 최저임금위원회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는 최저임금 결정 체계 개편안을 내놓은 것도 연장선에 있다. 정부와 여당은 2월 국회에서 개편안 입법에 힘을 쏟을 예정이지만 보수 야당의 생각은 다르다. 1월24일 국회 의안 정보시스템을 보면 2018~2019년 발의돼 계류 중인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32건에 이른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이 발의한 법안을 보면 최저임금 인상 적용 유예 또는 동결, 최저임금 산정 기준에서 주휴시간 제외, 업종별 차등 지급, 최저임금위원회 구성 변화 등을 담고 있는데, 최저임금 인상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나경원 자유한국당 대표는 최근 올해 최저임금 시급 8350원 시행을 막아야 한다며 문 대통령에게 긴급재정경제명령권(헌법 제76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한.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서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 대통령이 발할 수 있는 법률의 효력을 지니는 명령) 발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 실현 가능성을 떠나 보수 야당은 2월 국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막겠다고 예고해, 최저임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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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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