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트위터에서 ‘#대충 살자’ 시리즈가 유행했다. 한 번도 대충 살아본 적 없는 2030세대는 #대충 살자는 말에 호응하면서 긴장을 푼다. 트위터 화면 갈무리
#대충 살자, 기사 쓰기 귀찮아서 원고지 14장을 ‘대충 살자’라는 단어로 ‘복붙’한 장수경 기자처럼.
이 말을 실행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왼쪽 중지→오른쪽 중지→왼쪽 검지→오른쪽 검지→왼쪽 중지→왼쪽 검지→오른쪽 중지→왼쪽 검지→왼쪽 약지→오른손 중지’를 5분쯤 반복해 키보드를 두드리면 이번주 기사는 끝인데. 그럼 정말 대충 사는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트위터에서 짤(사진)로 돌아다니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광고
#대충 살자. 최근 트위터에선 ‘대충 살자’는 놀이가 유행처럼 번졌다. 가수 ‘신화’의 멤버 김동완씨가 양발에 높이가 다른 흰색 양말을 신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사진과 함께 ‘대충 살자, 양말은 색깔만 같으면 상관없는 김동완처럼’이나 베토벤 등 유명 작곡가들이 흘리듯이 그린 높은음자리표들을 모아놓곤 ‘대충 살자, 베토벤의 높은음자리표처럼’, 배우 황정민씨가 머리에 풍선을 끼고 찍은 사진엔 ‘대충 살자, 숫자 풍선 들기 귀찮아서 머리에 낀 황정민처럼’ 등과 같은 패러디를 만들고 공유하며 누리꾼들은 찧고 까불었다. 김동완씨는 한 팬이 김씨의 페이스북에 해당 짤을 올리자 “양말은 색깔만 같으면 상관없다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냐”며 “젓가락 짝이 안 맞으면 밥을 못 먹냐”고 되물어 ‘대충’ 사는 장인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 엠버가 케이크를 칼이 아닌 가위로 자르는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한 적 있는 박아무개(35)씨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경쟁하며 살아왔는데, 가수 이효리씨가 한 방송에서 아이에게 ‘아무나 되어도 돼’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실수할까봐 작은 일에도 예민했는데, ‘대충 살자’는 짤을 보니 사소한 것엔 긴장을 좀 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젠 양말에 구멍이 나도 점심시간에 나가 새로 사서 신지 않고 그냥 발가락 내놓고 살아보려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트위터에선 이런 인기 때문에 ‘대충 살자’는 글자가 쓰인 금속 배지를 만들어 배포한다는 이까지 생겼다. 하지만 대충 사는 이들이 배지까지 사는 열정을 보일 수는 없는 법. 구매자가 적어서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닉네임부터 범상치 않은 @my_lifeis18은 약 20일간 트위터에서 모객했으나 제작 최소 수량 60개에 절반가량만 구매를 신청해 환불 절차에 들어갔다. @my_lifeis18은 “배지 제작에 큰 이유는 없다”고 프로젝트를 ‘대충’ 시도했음을 밝히면서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살아도 누가 알아주냐”고 했다. 자신의 닉네임에 대해선 “열심히 살아도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대충 살자는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는 이른바 ‘무민세대’다. ‘없다’라는 뜻의 한자 ‘無’(무)와 ‘의미’라는 뜻의 영어 ‘mean’(민)이 합쳐진 신조어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라 할 만큼 경쟁에 내몰려 바쁘게 살아가야 했던 2030세대가 완벽과 성공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현재 젊은 세대는 ‘N포세대’(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 등을 포기하는 세대)다. 초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살아온 기성세대와 달리 노력해도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어렵다.
광고
지난 2월 구인·구직 업체 ‘사람인’이 성인 남녀 118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자신이 무민세대라고 생각하는 20대와 30대는 각각 47.9%, 44.8%였다. ‘무민’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이유로는 ‘취업, 직장생활 등 치열한 삶에 지쳐서’(복수응답)가 60.5%로 1위였고,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38.1%), ‘노력해도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34.1%)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2030세대 사이에서 #대충 살자는 가치관이 퍼지는 것을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연결지었다. “부모 세대는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면 집을 얻고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현재 청년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기반을 쌓기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다. #대충 살자는 젊은 세대가 겪는 가혹한 현실에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긴장을 푸는 ‘숨통’이다.”
#대충 살자는 말은 대충 살아본 일이 없는 이들이 겪는 현실의 고단함에 위로를 건넸다. 유명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취직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아파트를 사기 위해 끝없이 달려온 2030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노오오오오력하라’ ‘열심히’ 같은 최선을 강요하는 말에선 더는 감흥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소확행’이나 ‘나답게’ ‘대충’ 같은 긴장을 풀어주는 말에서 위로를 받는다.
광고
#대충 살자는 말에 공감한다고 이들이 대충 사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 김아무개(23)씨는 친구들과 단체 대화방에서 이야기할 때 종종 #대충 살자 짤을 사용한다. 아르바이트 가느라, 과제하느라 힘들다는 친구에게 ‘대충 살자’라는 짤을 보내는 식이다. “#대충 살자는 말을 하지만 한 번도 대충 살아본 적이 없다. 현재 휴학하고 주 3일가량 알바하면서 생활비를 번다. 대학에 입학한 뒤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다.” 김씨가 몇 년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옥탑방에서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다가구주택으로 옮겨 주거 상황은 괜찮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김씨는 “졸업해서 크게 성공할 것 같지 않다. 입에 풀칠하고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을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는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벌레가 ‘대충’이라고 말했지만, 오늘도 2030세대는 ‘노오오력’을 다해서 ‘대충’ 살고 싶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4월 탄핵 선고 3가지 시나리오…윤석열 파면·복귀, 아니면 헌재 불능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최상목, 2억 상당 ‘미 국채’ 매수…야당 “환율방어 사령관이 제정신이냐”
안동 산불 재발화…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서안동IC 양방향 차단
[단독] ‘내란’ 김용현, 군인연금 월 540만원 받고 있다
“일 못하는 헌법재판관들”…윤석열 파면 촉구 시민들 배신감 토로
한국도 못 만든 첫 조기경보기 공개한 북한…제 구실은 할까
냉장고-벽 사이에 82세 어르신 주검…“얼마나 뜨거우셨으면”
[단독] 우원식 “한덕수 ‘마은혁 미임명’은 위헌”…헌재에 권한쟁의 청구
연세대 의대, 미등록 의대생 1명 ‘학칙대로 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