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고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렇다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참….”
지난 8월30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민법이 정한 소멸시효(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를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나 간첩 조작 등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박미옥(58)씨는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결정문을 읽는 한 구절 한 구절마다 37년의 곡절이 떠올라 말문이 막혔다.
사필귀정의 날, 그가 있었다재심만 11년을 끌어온 재판이다. 1980년대 대표적인 조작 사건으로 판명 난 이른바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에서 박씨의 아버지 박경준씨는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려 7년의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는 평생을 억울해했다. 재심은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10년 만인 2007년에야 시작됐다. 2년이 걸려 2009년 무죄가 났고, 배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5년 뒤 사달이 났다. 2014년 양승태 대법원에서 간첩 조작 사건의 소멸시효를 ‘재심 무죄 확정 이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줄인 것이다.
“그때 이게 나라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급심에서 승소해 배상금을 가지급받았던 당사자와 가족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마자 국가로부터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당했다. 국가가 가해자인 것은 맞지만 줬던 배상금은 토해내라는 꼴이었다. 이는 최근 사법부 재판 거래 의혹에서 드러난 대로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씨에게 8월30일의 법정은 특별했지만, 2018년 헌법재판관 김이수보다 2014년 대법원장 양승태, 당시 주심이던 박병대라는 이름이 더 또렷하게 남았다. 지금도 원망과 서러움, 미움이 몰려온다.
“37년 전 그 사건이 터진 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쉰여덟으로 명예퇴직을 할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헌법재판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듣는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위안이 됐어요.”
판결문을 읽던 김 재판관의 목소리를 ‘위안’ 삼아 박씨는 다시 소송을 준비한다. 박씨와 함께 2007년부터 이번 소송을 함께한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는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읽어내려가는데 만감이 교차했다”며 “피해자들이 볼 때 그 말들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말들을 하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만큼 김 재판관의 말에 무게가 실려 있었고, 판결문을 읽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목소리에 진심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원칙에는 판결 뒤 판사의 이름은 잊힌다는 뜻도 담긴 듯하다. 김 재판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에서조차 ‘김이수’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할 일을 한 거 아니냐”는 말이 어쩌면 김 재판관에 대한 최대의 찬사일 것이다. 지난 6월28일에 있었던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시 헌재는 병역법 제5조 1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병역거부에 대한 처벌은 합헌이되 대체복무제도가 없는 점을 지적해 헌법 불합치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의 당사자 가운데 일부는 병역거부 논의가 결국 헌재의 헌법 불합치로 결론지어지는 과정에서 김 재판관의 노력을 기억했다. 김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기까지 주심으로 재판을 이끌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의 주심 재판관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간사는 “결정문 전체를 보면 처벌 조항이 있는 병역법 제88조는 합헌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도 있다. 하지만 헌재에 여러 의견이 있었고 실질적인 위헌을 끌어내기 위한 고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대체복무를 하느냐 마느냐 하던 논의가 이제는 어떤 대체복무를 만드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헌재의 결정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논의가 한 단계 올라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김이수 재판관이 중심을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김 재판관이 퇴임하고 새로운 분이 오시면 그분의 역할을 잘 이어받아서 다른 권력기관에 의지할 데 없는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김이수가 이 김이수라는 걸 십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니까요.”
김 재판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헌재 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지난해 10월 서울지하철 신길역에서 있었던 고 한경덕(70)씨 추락사고가 15년 전 발산역 사고와 거의 흡사하다고 직감했다. 당시 베트남 상이군인인 한씨는 왼손을 쓸 수 없어 오른손으로 리프트 버튼을 누르려다 휠체어와 함께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참변을 당했고, 15년 전인 2002년 윤아무개씨가 숨진 발산역 사고도 리프트를 조작하다 일어난 추락이 원인이었다. 사고 발생 과정만 비슷한 게 아니다. 2002년에도 한씨 사례처럼 휠체어 리프트 안전 책임과 관련해 서울시·서울교통공사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2심까지 간 재판에서 윤씨 가족이 승소했고, 원심의 배상액에 5400만원을 추가 지급받았다. 한씨 가족이나 박 대표 처지에선 10년도 더 지난 판결문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것은 답답한 일이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2004년 2심 판결이 미리 앞서간 것이기도 했다. 당시 판결을 내린 판사가 바로 서울고법 민사22부의 김이수 부장판사였다. 박 대표는 “당시 인권위의 권고도 있고, 1심에서 승소한 상황이라 2심 판결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2심 판결문을 다시 보고 나서야 당시 부장판사가 지금의 헌법재판관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판결문에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우들은 인간적 존엄과 가치, 행복을 지킬 수 있게 시설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며 “피고(당시 서울교통공사)는 사고 전 수차례 안전문제를 지적받았을 뿐만 아니라 역무원들이 당시 윤씨가 안전하게 리프트를 타도록 작은 배려도 해주지 않았다”고 돼 있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2004년 장애인 이동권 판결박 대표는 8월28일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포함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그린라이트’ 시위에 나서면서 말했다. “지금 사과도 않고 있는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은 발산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참사에 대한 서울고법 김이수 부장판사의 판결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김이수라는 이름은 14년 전 우리에게는 귀한 판결을 남긴 이름으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그의 이름에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 가운데 법정에서 승리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4년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진성 당원 수만 3만 명이 넘는 공당이 공중분해 됐다. 정당해산심판에서 김이수 재판관은 9명의 재판관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2014년 해산 때까지 당원이었던 이아무개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마움이 더한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정당해산의 충격이 커 소수의견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씨는 “사실 정당해산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산 자체에 놀랐고, 반대 의견이 한 사람뿐이라는 데 더 놀랐다”며 “한참 지나 김이수라는 이름이 계속 남았다. 통합진보당 당적을 가졌던 당원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 상당수가 이후 정의당이나 민중당 당원이 됐지만 이씨는 여전히 당적이 없다. 정당 활동은 시작하지 못했지만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촛불을 들었다. “김 재판관이 아니었다면 어떤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는 보수 기득권에 숨이 막혀 정치혐오나 회의주의에 계속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김 재판관이 있어서 2016년 촛불집회도 나가고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에 민중당 상임대표로 선출된 이상규 전 의원도 ‘김이수’라는 이름을 고마움으로 기억했다. 그는 헌재 결정으로 당 해산 결정 뒤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 대표는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김이수라는 재판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마운 사람이다. 물론 정당해산 결정 당시에는 그런 마음을 표현할 여유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며 “해산의 부당함을 정확하게 판단해준 덕분에 이후에 마지막으로 지역구(서울 관악을) 인사를 다닐 때 ‘소수의견이 맞으니 힘내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김이수’를 기다리며당시 재판에 피신청인 쪽 변호인으로 참여한 이재화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수의견을 조목조목 비판한 의견 모두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었다. 김 재판관 같은 분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김이수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목소리로 ‘또 다른 김이수’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 농단으로 사법부의 신뢰가 처참히 무너진 이 시기, 그래도 소수자·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여전히 사법부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또 다른 김이수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이유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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