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편하게 이야기하면… 이제는 그냥 오태양으로 불리고 싶어요.”
2001년 12월17일, 논산행 입영열차 대신 국가인권위원회로 가는 지하철을 탔던 26살 청년에게 지난 17년은 ‘양심적 병역거부 1호’라는 수식어의 굴레와 싸운 시간이었다. 종교적 이유로, 신념에 따라 총을 들 수 없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사회적 편견에 신음한 2만여 청년들 앞에서 ‘1호’라는 수식어는 그의 어깨를 눌렀다. 병역거부를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삶의 전부’로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1호라는 호칭은 낙인이기도 했다.
병역거부 1호라는 ‘낙인’
6월28일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군 복무자 아무개’라고 부르지 않듯이 ‘양심적 병역거부자 아무개’라고 부르지 않는 세상이 합법적으로 열리게 됐네요.”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는 세상이 돼 ‘1호’가 아닌 제 이름을 찾고 싶었던 오태양(43)씨가 꿈에 바짝 다가섰다. 17년이 걸렸다.
6월27일 서울 서초구 청년정당 ‘우리미래’ 사무실을 찾아 만나고, 28일 전화 통화로 ‘그의 17년’을 들어봤다. 그는 먼저 “제가 양심적 병역거부 1호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을 체포한 이래 지속해온 병역거부자 탄압의 긴 역사 속에 자신은 한 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만 명 넘는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감옥살이를 하고 목숨을 잃거나 용기를 내서 병역거부 선언을 했어요. 저 이후에도 9천여 명의 젊은이가 예고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역사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마치 강물처럼 역사가 이어지는 것 같아요. 2만 명이 2년 정도만 감옥 가도 4만 시간, 4만 시간의 감옥 생활을 70년간 이어왔으면, 이제는 끝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2만 명 중의 1명이지만, 17년 전 그의 병역거부 선언은 남북 대치 상황을 이유로 병역 의무를 절대시해왔던 한국 사회에 파열음을 냈다. ‘특정 종교인의 병역 기피’로 치부되던 양심적 병역거부는 오씨의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로 떠올랐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도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앞서 수십 년 동안 감옥을 선택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과 이들의 집총 거부, 수감 생활을 처음 세상에 알린 <한겨레21> 신윤동욱 기자에게 공을 돌렸다.
오씨는 “<한겨레21>에서 여호와의 증인들 기사를 읽고 충격받았다. 우리 사회가 종교적 신념을 지킨다는 이유로 일괄적으로, 기계적으로 전과자로 만들고 50년 동안 1만여 명이나 감옥에 보냈다. 그 기간에 한국의 사법적 정의가, 종교인들의 관용이, 인권·평화 운동한다는 시민사회가 이들을 왜 내버려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계적으로 전과자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도 인권운동 차원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고통에 자신이 겹치기 시작했다. 불교를 만나고 “왜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전쟁과 가난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겠다”던 20대 청년의 마음을 “살생하지 말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흔들었다.
“저는 불자였고 불살생의 가르침은 근본 계율이었어요. ‘살생하지 말라’는 소극적 개념을 넘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전쟁과 폭력보다 평화를 실현하라는 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자연스레 군사훈련을 거부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는 사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려고도 했다.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을 대체복무제도를 통해 우리 사회가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오씨는 “당시 병역거부 문제가 특정 종교인의 비뚤어진 종교관이라는 편견이 심했다. 공개 선언으로 국방의 의무와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실천적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질문을 던졌을 뿐이지만, 교사를 꿈꿨던 삶의 방향과 속도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병역거부 선언을 준비하면서 이석태 변호사와 이정희 변호사, 한홍구 선생님(성공회대 교수)에게 고민을 말씀드렸는데 대체복무제 운동을 하시던 분들인데도 모두 반대하셨어요. 사회적 편견이 커서 엄청 걱정하셨죠. 국가 체제와 맞서는 것인데 네게 큰 위해가 가해지는 것 아니냐, 이런 걱정을 하셨어요.”
오씨는 ‘미리 마음 아파하실까봐’ 어머니에게도 공개 선언 전날에야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냐”고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냐” 어머니의 눈물
주변의 걱정대로 그를 다룬 기사에는 당시 병역 회피 논란이 일던 가수 유승준씨와 비교하며 욕설과 인신공격이 담긴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렸다. “밤길 조심해라”류의 협박편지도 받았다. 그는 병역거부를 한 뒤 스스로 대체복무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저소득층 아이 공부방, 독거노인 무료급식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매국노가 떠준 밥은 먹을 수 없다”고 소리치며 식판을 내팽개치는 노인을 마주하거나, 토론회나 강연장에서 물병 세례를 받는 게 일상이었다. 직업군인이면서도 “동의는 안 하지만 네 진심은 믿는다”고 말해준 사촌형, 이라크 파병을 가면서도 “그래도 너를 믿는다”고 전화한 동창 등의 지지로 버틴 시간이었다.
결국 2004년 실형 선고를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수감 생활에 임했지만 2005년 12월 출소 뒤 그는 예상치 못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앞으로 나아가던 사회가 다시 후퇴하는 현실을 오롯이 목격한 것이다. 2004년 8월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을 합헌 결정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이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이해와 관용을 보일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는지에 관하여 진지하게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국방부는 병원·시설에서 합숙하면서 현역 복무 기간의 2배를 일하는 대체복무제 도입을 검토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체복무제 도입을 손바닥 뒤집듯 철회했다.
청년정당 창당 주도
그 무렵 오씨는 출소 뒤 인도로 가 최하층 사람들이 모인 극빈 마을에서 2년간 구호활동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귀국 뒤 대체복무제가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완전 백지 상태로 돌아갔다”고 외치며 참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또다시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에 손을 들어주며 “남북 대치의 특유한 안보 상황, 대체복무제 도입시 발생할 병력자원의 손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7년 전 판단보다 후퇴한 것이다. 오씨는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10년 동안 병역거부 논의가 원점보다 더 후퇴했다. 정치적 영향을 받은 결정들이 아니었나 싶다”고 평가했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자신이 꿈꾸던 삶을 챙기기 시작했다. ‘전쟁 없는 세상’이란 단체가 병역거부 운동과 평화운동을 본격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청년 문제와 청년 정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교사를 할 수 없다보니… ‘88만원 세대’라고 하던 학생들과 청년들의 문제가 눈에 들어왔어요.” 2012년 총선에서 청년당 창당을 주도했고, 최근에는 청년정당 우리미래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17년 전 자신처럼 사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20~30대 청년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가 불혹을 넘기는 동안 병역거부는 예비군 훈련 거부, 성소수자 병역거부, 병역거부를 위한 해외 난민 신청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됐다. “2001년에 대학 강연을 가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험난한 길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낙엽처럼 쌓여야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병역거부라는 희생이 계속되면 우리 사회가 구제와 관용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지난 시간 동안 많은 청년이 자신의 삶과 군 복무에 대해 성찰했고, 그 가운데 원치 않는 삶을 강제로 살지 않겠다는 터닝포인트를 마련한 젊은이가 늘어난 것 같아요.”
“청년들이 더는 고통받고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망은 다시 17년 전 자신의 문제의식과 연결됐다. “병역의무를 지는 젊은이들도, 거부하는 젊은이들도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잖아요. 그들에게 ‘가혹한 군대’와 ‘더 가혹한 병역거부 이후의 삶’이라는 선택지만 있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대체복무제를 통해 병역거부자들을 포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권인식을 높여 군대를 변화시키는 계기도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오씨는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더 많은 청년에게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결정으로 군대 역시 개인 인권을 더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기여해야 하는 청년들이 존중받고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다음에는 모병제를 논의했으면 한다”고 했다. 나아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명칭도 ‘병역거부자’라는 말로 바뀌었으면 한다는 소망도 전했다. “나는 정말 군대가 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을 위한 제도적 출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17년 전인 2001년 12월12일, 그는 ‘스물일곱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고백, 나에게는 진정 꿈이 있습니다’라는 글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글은 짧은 시로 마무리된다.
군대 가기 싫은 사람을 위한 출구
“그리하여/ 저에게는 진정 꿈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전쟁과 가난의 고통이 사라지는/ 꿈 말입니다/ 그리고 걸어갈 것입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총 든 군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로 만나/ 인류의 꿈과 희망에 대해/ 지구의 생명과 평화에 대해/ 웃고 이야기하며/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는/ 그날을/ 염원하며 말입니다.” 이를 보도한 당시 <한겨레21>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40년 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이 오늘을 바꾸었듯, 오태양씨의 꿈도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그가 먼저 한발을 내디뎠다.”
당시 글을 인쇄한 종이를 내밀고 물었다. 지금도 이 꿈은 그대로냐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죠.”
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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