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9700여 명. 1950년 이후 지난해까지 군대 대신 감옥행을 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수다. 6월28일 헌법재판소가 이들을 처벌하던 병역법 조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68년이다.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병역거부 역사는 1만9700개의 사연이 수십 년의 시간에 차곡차곡 쌓이며 구성됐다. 여기에 더해 수많은 시민사회 활동가와 교수들, 법전에서 배운 원칙과 가치를 외면할 수 없었던 법관들이 개개의 사연에 색을 입히고, 의미를 부여했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 신도 첫 거부
한국에선 대체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체포된 사건을 병역거부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이들은 전쟁 반대 사상을 유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역사에는 항일 투쟁 중 하나인 ‘등대사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들 중 옥지준씨는 본인을 비롯해 부인과 형님 부부 등 일가가 모두 투옥됐다. 정부 수립 뒤에도 감옥에 간 자손이 있었고, 손자 옥규빈(23)씨도 입영을 거부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6월29일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역사를 찾아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정말 고생하셨더라. 나도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입영을 거부했다. 8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헌법재판소가) 이제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1949년 병역법이 제정되고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이 시작됐다. 대부분이 입영을 거부했던 여호와의 증인과 입영은 했지만 총 들기를 거부한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도였다. 한국전쟁 때도 남북한 양쪽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병역기피로 처벌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했고 1~3년의 징역형이 부과됐다.
병역거부자들의 시련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본격화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대신 군사주의로 국가를 운영하던 시기에 병역거부자는 ‘중대 범죄자’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병역법이 “6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형된 자는 병역에 복무할 수 없다”고 규정하다보니 2~3년형을 받고도 출소 뒤 다시 소집돼 실형 선고를 받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70년의 회고와 전망’이란 글에서 “당시 징병 의무는 35세가 되는 해의 12월31일에야 면제되었으므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도합 7~8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1974년 박 전 대통령이 군 입영률 100% 달성을 지시하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도 강제로 군대로 끌려간 뒤 집총을 거부하게 됐다. 병역법이 아니라 군법(항명죄)으로 이들을 처벌하면서 처벌 강도도 높아졌다. 1969년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정춘국씨는 병역법 위반으로 3년 넘게 복역하고 징집돼 군형법상 항명죄로 또 처벌받아 모두 7년10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병역거부자들은 이 과정에서 구타나 가혹 행위에 시달렸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일어난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의 죽음이 군대에서 일어난 구타와 고문에서 비롯됐다고 2009년 발표한 바 있다.
박정희 집권 이후 시련 본격화
이처럼 국가 폭력에 그대로 노출됐던 여호와의 증인 쪽은 1950년부터 2018년 4월까지 누적 병역 거부자 수를 1만9333명으로 집계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을 합치면 3만6798년이라고 주장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자 가족 모임’ 대표를 지낸, 여호와의 증인 장로 홍영일(53)씨는 헌법재판소 결정 뒤 <한겨레21>에 “오래 걸렸지만 너무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도 입영 거부로 1990~92년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다. 아들을 둔 그는 “아들이 올봄에 입영 연기를 했는데 대체복무제가 과연 될까 염려도 있었다. 국제적 인권 표준에 맞는 대체복무제 도입에 정부와 국회가 노력하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기대감을 보였다.
1990년 전후로 비종교적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들도 있긴 했다. 1991년 5월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열사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것을 목격한 전투경찰이던 박석진(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씨는 복무를 거부하며 전투경찰 해체를 요구하는 양심선언을 했고, 이후 수감됐다. 당시 군대와 전투경찰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50여 명의 ‘양심선언’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들의 양심선언이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에 있었다면 한국 사회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공론장으로 끌어올린 것은 2001년 2월15일 발행된 <한겨레21> 제345호에 실린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라는 제목의 2쪽짜리 기사와 같은 해 12월 “불교의 ‘불살생’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폭력과 전쟁을 반대한다”고 선언한 오태양(43·우리미래 비상대책위원장)씨의 병역거부 선언이었다. <한겨레21> 기사가 유령으로 떠돌던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알렸다면, 평화운동가이자 불교 신자이던 오씨의 선언은 비종교적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최초 사례로 역사에 기록된다.
<한겨레21> 기사로 촉발된 공론화
이에 2002년 2월4일 평화인권연대·인권운동사랑방·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단체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정식으로 발족하며 병역거부가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이는 2001년 미국 9·11 테러 이후 고조된 전세계적인 전쟁 위기, 2003년 참여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등과 맞물리며 폭발적인 사회운동으로 전개됐다. 평화·반전·파병반대 운동의 확대 속에 임재성(38·변호사)씨 등 대학생들이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2003년 11월21일, 22살 강철민씨는 100일 휴가 마지막 날 ‘파병반대 병역거부 기자회견’을 열고 현역군인 신분으로 병역을 거부해 감옥에 갔다.
이들의 외침이 계속되자 법원과 정부도 외면할 수 없었다. 판사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재징집이 되지 않는 최소 형량인 실형 1년6개월, 이른바 정찰제 판결을 내렸고 이는 이후 관행으로 굳어졌다. 나아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현행법이 헌법에 비춰 적절한지 법원 내부에서 질문이 터져나왔다. 2002년 1월29일, 박시환 판사(전 대법관·현재 인하대 교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사건 최초로 병역법 제88조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고, 이는 2004년·2011년·2018년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세 차례 판단하는 신호탄이 됐다. 2004년 5월엔 이정렬 판사(현 변호사)가 병역거부자 3명에게 1심 재판에서 사상 처음 무죄를 선고하는 ‘혁명적 변화’까지 일어났다. 이후 하급심의 무죄판결은 최근 급증해 80여 건이 나왔다. 2012년 7월10일 전수안 전 대법관은 “아버지가, 그 아들이, 그 아들의 형과 동생과 다시 그 아들이 자신의 믿는 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징역 1년6월의 형을 사는 사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런 견해들이 다수 의견이 되는 대법원을 보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으면서, 떠납니다”는 퇴임사를 남기기도 했다.
사회 변화 속에 종교적·정치적 신념에 따른 기존 병역거부는 성소수자의 병역거부, 예비군 훈련 거부, 병영문화 공포에 따른 거부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2006년 3월6일 전투경찰로 복무하던 22살 유정민석씨는 “남성성만을 강요하는 군대가 정말 두렵고 공포스럽다”며 기자회견을 열어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감옥행을 택했다. 2009년 이후 병역거부를 사유로 캐나다와 프랑스 등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이도 7명이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병역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며 병역거부와 군사주의 문화의 폐해를 알려온 단체 ‘전쟁없는세상’ 이용석 활동가는 “기존 병역거부자는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하는 ‘신념의 강자’ 같은 이미지였다면, 최근에는 사회운동 경험이 없는 이들이 자신의 섬세함, 나약함을 긍정하면서 개인적 차원으로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상담하는 일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병역거부로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던 그는 “대체복무제를 실제 도입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전쟁없는세상은 앞으로도 합리적이고 인권적인 대체입법이 도입될 때까지 감시와 견제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2000년 이후 여성주의의 연대
병역거부 역사가 남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2000년 이후 한국 병역거부 역사에서 여성주의의 연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병역거부운동과 발을 맞추며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의 문제를 알리는 데 여성단체들도 함께했다. “왜 여성이 병역거부운동을 하냐”는 질문에 무던히도 시달렸던 최정민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는 2000년대 이후 수많은 병역거부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지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군사주의가 많은 부분 징병제도와 그것이 파생한 문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많다.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LGBT(성소수자), 장애인 등 ‘2등 시민’으로 불리는 이들의 다양한 젠더와 정체성이 교차하는 문제이기도 하다”며 “그런 생각에서 병역거부운동을 여성운동이라 생각하면서 활동해왔다”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2012 병역거부 자료전 74년’(전쟁없는세상·평화박물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인권 A to Z’(국제앰네스티)
<양심적 병역거부>(사람생각·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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