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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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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보상 선진국 되는 길

전자·보건산업 등 생식 독성에 노출되기 쉬운 노동자에 영향력 클 제주의료원 대법 판결…

산재법 개정 절실
등록 2018-04-03 16:40 수정 2020-05-03 04:28
2013년 6월24일 제주시 아라동 제주의료원 앞에서 병원사업장 여성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제주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제주의료원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유산과 선천성 장애아 출산에 대한 역학조사를 철저히 할 것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6월24일 제주시 아라동 제주의료원 앞에서 병원사업장 여성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제주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제주의료원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유산과 선천성 장애아 출산에 대한 역학조사를 철저히 할 것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산재 신청은…, 제주의료원 판례를 좀 기다려보려고요.”

성희(가명)씨는 삼성반도체에서 10여 년간 일하다 염색체 이상 발달장애아를 낳았다. 교대근무로 반도체칩을 굽고 테스트하는 일을 하며, 종종 화학물질 냄새를 맡곤 했다. 혹시 업무가 아이의 장애와 관련 있지 않을까 의심은 가지만, 산업재해는 신청조차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에 문의해봤지만 “유산이라면 몰라도 (장애아를) 출산한 경우 아예 신청이 안 된다”며 단칼에 거부당해 마음에 상처만 남았다.

의료 분야 여성, 유산 위험도 33% ↑

성희씨는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은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의 법정 투쟁에 관심이 많다. 대법원에서 산재 인정 판결을 내린다면 그도 용기를 내 다시 산재 신청을 할 계획이다. 당장 치료비도 부담이지만 그보다 더 큰 걱정은 아이의 장애가 평생 지속된다는 점이다. 성희씨는 “내가 늙고 없어도 아이를 돌봐주는 시스템을 얻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제주의료원 대법원 판결이 다른 직종에 미칠 파급력을 상상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첨단전자산업, 보건의료산업 등 노동자가 생식 독성에 노출되기 쉬운 분야에 큰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예로 반도체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 자녀에게 선천성 장애가 일반인 자녀보다 1.8배 더 많이 나타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2014년 가 은수미 의원실(새정치민주연합)을 통해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입수해 20살 미만 건강보험 피부양자 전체와 삼성전자·하이닉스에 재직 중인 노동자의 아이들을 비교한 결과다.

앞서 2008년 대만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린징쥔 대만국립대 교수팀이 반도체 회사 8곳에서 일했던 남성 노동자 자녀 5702명의 건강 상태를 추적한 결과, 화학물질 노출 집단의 자녀들이 비노출 집단의 자녀보다 선천성 기형으로 3.3배, 심장 이상으로 4.2배까지 숨질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이 일반 여성보다 더 높은 유산 위험에 노출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강모열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팀이 2017년 4월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간호사와 의사, 방사선 치료사 등 보건의료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유산 위험도가 다른 직종 여성보다 최대 33%나 높게 나타났다.

제주의료원 사건은 ‘산재를 산재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성희씨는 20~30대에 생리불순, 하혈, 유산, 장애아 출산을 겪으면서도 이것이 ‘산재’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내가 몸이 약한가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회사를 다니기 시작해 동료 중에 불임과 유산이 많아도 “원래 그런가보다” 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야 그게 특이한 일임을 깨달았다. 미리 알았다면 그의 인생에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이다.

희귀병, 원인 찾기 어렵고 연구 적어
국내 2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노동자 자녀의 선천성 장애를 최초로 다룬 2014년 11월13일치 <한겨레> 심층 리포트 ‘반도체 아이들의 눈물’.

국내 2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노동자 자녀의 선천성 장애를 최초로 다룬 2014년 11월13일치 <한겨레> 심층 리포트 ‘반도체 아이들의 눈물’.

생식계통 분야 산재 인정은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4년 12월 처음 ‘유산’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제주의료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4명이었다('아이가 죽어야 되는 산재' 기사에 언급된 심장질환아 출산과는 다른 4명). 2017년 3월에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생산직 노동자가 ‘불임’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단단하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대한민국의 기준은 선천성 장애아 출산, 생리불순, 출산 직후 희귀병 발병 등 다양한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훈(가명)씨는 아내와 함께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2009년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2013년 희귀 소아암 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했지만 재발해 조혈모세포 이식을 두 번 받았다. 아이는 수술 과정에서 신경이 끊어져 왼손 집게손가락을 못 쓴다. 정훈씨는 아이의 병이 자신과 아내의 업무(반도체 세정, 식각 공정)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만 산재 신청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2세 질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례가 있냐”고 되물었다. 가망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기엔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크다.

‘산재 보상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서 이처럼 산재 ‘종목’을 넓히는 일은 절반의 공정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엄격한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현재 산재는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입증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제주의료원 사건처럼 비교적 분명한 사건도 이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선천성 장애나 소아 희귀병은 과학적으로 명확한 원인을 찾기 어렵고 그 수가 적어 통계적 분석이 어렵다. 연구 자체가 많지 않다.

공유정옥 경기동부근로자건강센터 부센터장은 산재 인정 방식이 관대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업무 환경과 유산 증가 등 간접적 증거들로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다. 그걸로 어느 정도 개연성이 인정되면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원인과 대책을 연구할 수 있다. 산재 보상 선진국들을 보면 위험 요소를 찾아 노동자를 엄청 꼼꼼히 보호하는데도 산재 인정률이 높다. 그러나 한국은 정반대다. 검찰이 유무죄를 가리는 것처럼 엄격하게 따질 게 아니다.”

임신하고 출산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산재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모든 직군의 여성이 생식계통 산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6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유산과 분만 관련 진료 현황을 분석한 결과,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유산 비율이 2006년 18.7%에서 2015년 24.5%로 높아졌다. 9년 만에 5.8%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교육서비스업, 보건·사회복지사업 등에서 유산 비율이 높았다.

산재법 개정안 17개월째 국회 계류

전업주부 등이 포함된 건강보험 피부양자의 유산 비율과 견주면, 일하는 여성이 유산을 더 많이 겪는다는 사실은 극명히 드러난다. 2015년 20대와 30대 직장가입자의 유산 비율은 각각 29.4%와 26.1%였으나, 같은 연령대 피부양자의 유산 비율은 각각 17.3%와 20.9%였다. 공유정옥 부센터장은 “건강한 청년층과 중년층도 과로사, 스트레스, 위험 업무로 많이 죽는 마당에 그보다 훨씬 민감한 임신이 잘 유지될 리 없다”고 했다.

일각에선 산재 보상 범위를 넓히는 대신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노동자가 문제를 일으킨 회사에 직접 책임을 물으라는 말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근로복지공단과 고용노동부는 제주의료원 사건에 대해 “산재보험법상 보험급여는 근로자에게 지급한다”며 “태아나 출산 후의 자녀에게 보험급여 수급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법조문의 문구로 산재 보상의 테두리를 단단하게 둘러치고 그 바깥은 민사소송으로 가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런 태도는 한편으로 회사와 노동자가 십시일반 모은 산재보험의 재정건전성을 지킨다는 장점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강문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은 “민사가 있으니 산재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바보 같은 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회사 사정이 어떻든 피해자가 최소한의 보장을 받게 하는 사회보험의 취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를 다니는 노동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산재 신청보다 민사소송의 부담이 훨씬 크다. 산재보험에선 제3자인 근로복지공단이 완충작용을 하지만 민사에선 노동자가 회사와 직접 다툼을 벌여야 한다. 민사는 산재보다 보상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고 ‘근로자 과실’ 여부를 따져 보상액수를 깎는다. 또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더욱 엄격하게 따지는 경향이 있어, 이를 입증해야 하는 노동자의 부담이 커진다. 강 사무총장은 “업무상 재해를 당한 노동자는 산재보험에서 먼저 일정 금액을 지급받고, 모자라면 다시 민사소송을 해 추가로 받을 수 있다”며 “노동자 입장에선 무조건 산재가 있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생식 독성 피해와 관련해 산재 보상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기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하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6년 11월17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성노동자가 업무상 유해 요소에 노출돼 태아가 미숙아로 태어나거나 선천성 질병을 가지고 태어날 경우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법안이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 1년5개월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현 정부 들어 태도 확 바꿔

다행히 현 정부 들어 고용노동부가 태도를 확 바꾸었다. 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은 “보험급여의 범위, 지급 요건, 지급 기준 등을 구체화하는 연구 용역을 곧 진행할 예정이고, 올해 10~11월쯤 마무리되면 (박 의원 법안에 대한) 수정안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고용노동부의 방침이 결정되면 그에 따르겠다. 공단 자체의 의견을 밝히긴 적절치 않다”는 뜻을 밝혔다. 제주의료원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을 밝히길 꺼린 채 대법원의 판단을 지켜보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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