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987, 너의 의미

경제민주화, 북핵 개발, 부동산 투기… 1987년이 한국 사회에 남긴 역사적 과제들
등록 2017-06-13 20:05 수정 2020-05-03 04:28
6월 항쟁이 벌어졌던 1987년은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 변곡점 같은 한 해였다. 정치는 민주화됐고 경제는 성장했지만, 현재 한국 사회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당시 사회 모습을 맛깔나게 그려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tvN 제공

6월 항쟁이 벌어졌던 1987년은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 변곡점 같은 한 해였다. 정치는 민주화됐고 경제는 성장했지만, 현재 한국 사회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당시 사회 모습을 맛깔나게 그려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tvN 제공

1987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현장 기록을 모은 의 권두 인사말에서 김성배 한국사진기자협회 회장은 그해를 “마치 작열하는 포화 속에서 격전을 치른 한 해였다”고 표현했다.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1987년은 그해 6월 이한열의 죽음을 지나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으로 귀결됐다. 이미 30년의 시간이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박종철의 죽음,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의 어이없는 해명,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와 이를 단숨에 뒤집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 등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가파른 사건 전개에 미약한 현기증마저 느끼게 된다.

1987년은 한국 사회에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6월 항쟁의 승리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통령직선제’ 쟁취라는 벅찬 승리를 가져왔지만, 그해 겨울 치른 대선의 ‘패배’라는 큰 상처도 남겼다. ‘양김’ 분열 속에 치러진 16년 만의 대통령직선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이는 ‘보통 사람들’ 구호를 내세운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였다. 이 선거로 인해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두 개의 큰 산이던 김영삼(YS)과 김대중(DJ)이 분열했고, 이는 YS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의 일부가 보수 진영에 편입되는 비극(3당 합당)으로 이어졌다. 남겨진 DJ와 호남은 쉽게 고립됐고, 자주 패배했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적 투표 형태가 본격적으로 관찰되기 시작한 것도 그해 대선이었다.

1987년, 격전 치른 한 해

6월 항쟁의 또 다른 비극은 7~9월에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이던 김정남씨는 자신이 참여해온 30여 년간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정리한 저서 (2005)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해 6월 항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주도한 세력들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권력이 마침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각 부분에서 민중운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7년 7월에서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에 옮겨붙으면서 전개됐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일어났다. 그러나 대통령직선제라는 과실에 만족한 ‘넥타이 부대’가 대오를 이탈하면서 노동자는 급격히 고립돼갔다. 1987년 8월22일 대우조선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의 이름은 ‘연세대생 이한열’만큼 동시대인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이때 한국 사회가 이뤄내지 못한 ‘경제민주화’는 87년 체제의 가장 큰 결함이자 미완의 과제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1987년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필연이기도 했다. 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1980년 5.7%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며 허덕대던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불어닥친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 덕에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자료를 보면, 1985년 2465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87년 3512달러, 1988년 4692달러, 1990년 6514달러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5년 새 1인당 GDP가 2.6배나 뛰어오른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일본 서울 특파원을 지낸 우에무라 다카시는 저서 에서 “서울에선 가는 곳마다 파업과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고, 언론의 자유가 진전됐으며, 서울올림픽을 앞둔 거리엔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선했다”고 썼다.

일그러진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다

변화하는 것은 한반도만이 아니었다. 냉전시대 질서도 빠르게 해체되고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을 내세우며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것은 1985년 3월11일이었다.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이었다. 이후 3~4년 동안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공산체제는 차례로 무너져갔다.

노태우 대통령은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냉전 해체’라는 시대사적 변화 속에 적극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이 흐름 속에 남북은 1991년 12월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긴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한국 정부는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단행했다. 1989년 9월 서울에 부임해 1993년 2월까지 근무했던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는 자신의 회고록 에서 “그때 한국엔 대단히 유능한데도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은 노태우 대통령이 있었는데, 그의 남북한 화해 정책은 워싱턴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적었다. 냉전 종식으로 체제 붕괴 위협을 느낀 북한은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

1987년은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욕망’이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했다. ‘3저 호황’이 불러온 놀라운 경제성장은 시중 자금과 유동성을 증가시켜 주가와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수도권 지역 아파트값 폭등이었다.

한국 도시사의 권위자인 고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에서 1987년 대선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때 선거만큼 소란스런 선거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치열한 선거였던 만큼 각종 공약이 남발됐다. 대표적인 것이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내세운 ‘주택 200만 호 건설’ 공약이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 공약 사업의 하나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1989년 4월27일 발표된 경기도 분당과 일산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구체화됐다. 부동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욕망은 이후 평촌·산본·중동 등을 아파트숲으로 바꿔버렸고, 경부선을 축으로 용인과 안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남은 재개발 지구를 갈아엎은 이명박의 뉴타운으로 이어졌다. 영화감독 이창동은 이같은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욕망을 영화 (1997)에서 서글프게 그려냈다.

‘덕선이네’가 이사 간 판교, 지금은

2015년 말 방영돼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tvN)의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덕선의 가족은 정든 ‘쌍문동 10통2반’ 골목과 작별한다. 이삿짐을 나르는 트럭 기사는 덕선의 아버지 성동일에게 묻는다. “어디로 이사 간다고 하셨죠?” “아, 여기서 쪼깐 멀긴 헌데, 판교, 판교로 가요.” “농사지으러 가시나봐요. 거기 아무것도 없지 않나?” 트럭 기사의 썰렁한 반응과 달리 판교는 현재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1987년은 한국 사회의 자랑이었고 상처였으며, 현재 우리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들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