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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왜 국민의당을 선택했을까

진보·개혁 이슈 선도 못하고 우클릭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실망감, 정권 교체 열망 품고 야권 몸집 키우기 위한 전략적 선택
등록 2016-05-26 17:09 수정 2020-05-03 04:28
5·18민주화운동을 하루 앞둔 5월17일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운데)가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서 금남로를 향해 걷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5·18민주화운동을 하루 앞둔 5월17일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운데)가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서 금남로를 향해 걷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내가 아주 분노하고 있다. 호남인들의 선택에 대해서다. (중략) 이제 전라도 없이는 민주가 불가능하다는 통념은 박살이 났다. 전라도 신화가 깨진 것이다.”

4·13 국회의원선거 직후인 4월18일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의당에 28석 중 25석을 몰아준 호남에 대한 독설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호남의 신화화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극단적 평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호남 야권 지지층에선 “호남이 고립을 자초했다” “호남이 세속화됐다”는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호남은 왜 국민의당을 선택했을까.

호남 홀대론과 소외론

출발선은 일치했다. 호남에서 독주해온 더불어민주당(더민주)에 대한 실망과 분노다. 직장인 심선미(37·광주 서구)씨는 투표권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3번’을 뽑았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호남이 뭉쳐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어서 더민주를 뽑아줬는데 허구한 날 싸우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침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 ‘더민주보다는 낫겠지’ 하는 기대로 국민의당에 표를 줬다.” 2006년 지방선거 이후 10년 만에 호남에서 ‘2야 경쟁 구도’로 선거가 치러졌고, 더민주의 불통과 무능에 지쳐 있던 유권자들이 대안세력으로 등장한 국민의당으로 대거 옮겨간 것이다.

‘더민주 이탈’ 현상은 20대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났다(그림1 참조). 진보·개혁 이슈에 관심 많은 20대는 박근혜 정권의 비민주적 통치를 저지하지 못한 더민주에 대한 냉소가 깊었다. 대학생 이다솜(24·광주 북구)씨는 “세월호 문제 등에서 더민주는 새누리당에 지더라도 발악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 때 조금 뭔가 했지만,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60대에선 선거 기간 내내 더민주에 대한 호감이 가장 낮았다. ‘호남은 야권의 심장’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이들에겐 지난해 2월 문재인 체제 들어 당직 배분과 공천 과정에서 호남이 지속적으로 차별받았다는 ‘호남홀대론’과 ‘호남소외론’이 뿌리 깊었다.

1987년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 시절부터 민주당 계열 당원으로 활동해온 박재수(60·광주 남구)씨는 이번에 두 표를 모두 국민의당에 줬다.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전까지도) 안철수는 문재인에게 기회를 많이 줬는데 문재인이 끝까지 (사퇴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당을 쪼갰다. 문재인은 국회의원 재보선 때마다 참패했는데도 책임지는 모습을 한 번도 안 보였다.”

특히 선거 막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부각된 더민주의 우클릭 노선은 호남이 ‘정당 일체감’을 잃게 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오승용 전남대 연구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출신 김종인의 영입은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소득 주도 성장론, 햇볕정책 폐기와 대북 강경 노선 등은 정통 야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호남에 받아들여졌다. 더민주가 ‘우리당’이라는 인식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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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고 있다”

더민주에 대한 ‘징벌’이 곧바로 국민의당 ‘지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안철수 대표나 국민의당에 대해서 별다른 메리트를 못 느끼고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국민의당에서) 돌아설 생각도 있다”(심선미), “국민의당이 잘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지켜보다가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이다솜)는 등 조건적·일시적 선호가 다수였다. 이들은 내년 대선 전 더민주-국민의당 합당이나 후보 단일화 경선을 통해 안철수 대표든, 문재인 전 대표든, 박원순 서울시장이든 본선 경쟁력이 높은 후보가 최종 선택돼야 한다고 본다.

황풍년 편집장이 읽은 호남 민심도 이와 비슷하다. “실망스러운 더민주에 제3당이라는 견제 장치를 두는 절묘한 선택이자, 큰 틀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전략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자기 희생적 선택이다. 호남은 이제 더민주나 국민의당을 거의 똑같이 보고 관망하고 있다.” 정권 교체 열망이 높은 호남이 야권을 경쟁시키기 위해 더민주에는 채찍질을 가하고 국민의당은 덩치를 키워주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분석이다.

반면 오승용 연구교수는 “계파 패권 정치에 몰두한 더민주와 대선 후보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문재인을 불신임한 ‘심판투표’로 (국민의당으로의) 지지 정당 교체가 이뤄졌다”고 본다. 다만 그는 “호남을 한 덩어리로 보는 시각을 버려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번 총선에서 고연령, 블루칼라, 농촌 지역 유권자 등 특정 정책에 대해선 진보적이지만 경제 분야에선 보수적인 ‘중도보수’ 유권자들은 국민의당으로 옮겨가고, 전통적 야당 지지층은 더민주에 잔류하는 ‘분화된’ 투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국민의당에 대한 지지 강도와 상관없이 호남엔 공통의 정서가 있었다. 제3당인 국민의당이 특정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새누리당과 정책 연대를 할 수 있지만, 인위적 정계 개편을 위한 정치 연대만은 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한나라당에 연정(연립정부)을 제안했을 때 호남에서 “1990년 3당 합당의 재판”이라는 격앙된 비판이 나왔을 정도로, 호남은 ‘고립’에 대한 우려가 크다.

안철수 대표를 ‘다음 대통령감’으로 높게 평가하는 박재수씨도 “5공 때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 호남을 무시한 새누리당과 어떻게 연정을 할 수 있느냐.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는 호남 민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과감하게 심판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연정설 나오자 국민의당 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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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뒤 호남에서 국민의당이 고전하는 것도 이런 원칙과 연관이 깊다(그림2 참조). “타협과 절충의 정치가 잘 정착된다면 연립정부, 연립정권에 대해서도 국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겠나”(4월24일 이태규 국민의당 전략홍보본부장), “박근혜 대통령이 실정을 인정하면 (새누리당의 국회의장을 지지하는 방법도) 생각해보겠다”(4월28일 박지원 원내대표)는 등 새누리당과의 ‘정치 연대’ 가능성을 내비치는 발언이 나온 뒤 호남에선 더민주와 국민의당 지지율 격차가 5%포인트로 크게 줄어들었다. 오만한 국민의당에 대한 호남의 ‘경고’였다.

심상치 않은 호남 민심을 읽은 안철수 대표는 5월18일 광주에서 “정체성이 다르다. 새누리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선거 결과는 (호남이)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숙제를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며 “정치를 바꾸고, 미래를 준비하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 큰 그릇이 되겠다는 말씀을 꼭 지키겠다”고 몸을 낮췄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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