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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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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닿는 곳마다 나를 묻히는 것 같았다

메르스 의심 증상으로 역학조사 받은 이문영 기자의 자가격리기… 인도·평택 취재 뒤 발열, 80여 시간 만에 해지 “사망자·격리자 수가 재앙의 크기 설명하지 않아”
등록 2015-06-15 20:27 수정 2020-05-03 09:54
‘메르스 감염의 진원지’로 5월29일 휴원한 평택성모병원 현관 입구에 마스크와 귀 체온계 등이 놓여 있다.

‘메르스 감염의 진원지’로 5월29일 휴원한 평택성모병원 현관 입구에 마스크와 귀 체온계 등이 놓여 있다.

6월7일(일) 김정옥(가명)씨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틀 전 기사(제1065호 표지이야기 ‘휴원 당일까지 메르스 환자인 줄 몰랐다’) 마감 때만 해도 그는 2차 유전자 검사를 받고 있었다. 김정옥씨는 평택성모병원 휴원 당일(5월29일)까지 자신의 호흡곤란이 폐렴 때문인 줄 알았다. 서울의 국가지정격리병원으로 이송된 지 하루 만에 메르스 1차 양성반응을 보였다. 그는 6월2일 기계호흡에 의존하며 중태에 빠졌다. 딸 박경란(가명)씨는 엄마의 확진(6월5일 밤) 사실조차 이틀이 지난 오늘 저녁에야 알았다. 자가격리 상태인 딸이 병원과 질병관리본부에 직접 연락해 확인했다. 나의 전화기로 건너오는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쪼개지고 토막났다. 김정옥씨의 위중은 질병관리본부(비밀주의)와 병원(무책임한 감염관리)이 만든 비극이다. 구멍 난 시스템이 ‘국가적 재난’을 방패 삼을 때 개인의 불행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날벼락’이 된다.

“낙타 탔어요?” “낙타를 봤는데요”
“좀 걱정이 돼서요.” “정 걱정되면 스스로 자가격리 하세요.” 메르스 검사의 장벽은 높았다. 보건소를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사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불안을 떨치러 온 사람들에게 불안을 떨칠 방법은 주어지지 않았다.

6월8일(월) 아침부터 열이 났다. 가벼운 기침이 뒤따랐다. 몸살 초기 증상 같았다. 메르스 사태를 중심으로 편집회의가 진행됐다. 점심을 먹었고, 머리가 뜨끈했다. 오후 회의엔 마스크를 쓰고 들어갔다. “겁나게 왜 그래?”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보다 눈에 보이는 마스크가 동료들을 긴장시켰다. 비가시적인 감염병보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건 시각화된 상징이다. 보건소에 다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6월3일(수) “확진자와 접촉했습니까?” 방역복으로 전신을 감싼 평택보건소 관계자가 물었다. “누가 확진자인지를 모르는데요.” 보건소 관계자가 다시 물었다. “열이 38도 넘어요?” 나는 체온계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평택성모병원(메르스 진원지)과 평택굿모닝병원(6월12일 현재 확진 환자 3명 발생)을 취재(제1065호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자라는 곳 참조)한 뒤 평택보건소에 들렀다. 이틀 동안 20차례 이상 설사를 했다. 메르스 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밀접 접촉자가 아닌 사람을 검사할 여유가 보건소엔 없었다. “빨리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더 위험해요.”

마음에 불안이 남았다. “설사를 계속 해서요.” 문답인지 만담인지가 오갔다. “중동에 다녀오셨어요?” “인도(제1062호 집, 가난과 대결하다 참조)에 갔다왔는데요.” “인도는 메르스 발생 국가가 아닙니다.” “그래도….” 의료진이 거듭 확인했다. “낙타 탔어요?” 나는 궁색해졌다. “낙타를 봤는데요.” 보건소가 재촉했다. “어서 돌아가세요. 확진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 검사만으로도 벅차요.” 미궁이었다. “좀 걱정이 돼서요.” “정 걱정되면 스스로 자가격리 하세요.”

메르스 검사의 장벽은 높았다. 보건소를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사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불안을 떨치러 온 사람들에게 불안을 떨칠 방법은 주어지지 않았다. 시설도 인력도 열악한 컨테이너 검진소에서 의료진은 매뉴얼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매뉴얼은 메르스를 가두는 그물이면서, 메르스를 놓치는 구멍이기도 했다.

(다시) 6월8일(월) 주소지 관할 보건소를 찾았다. 평택의 두 병원을 다녀온 사실부터 밝혔다. 반응이 닷새 전과 달랐다. 곧바로 메르스 상담소로 안내됐다. 의사에게 평택·인도 취재 동선과 몸 상태를 설명했다. 체온을 쟀다. 37.5도→36.6도→37.1도→37.5도→37.6도를 오갔다. 의사가 말했다. “열이 있으시네요.”

 

오늘따라 가래가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역학조사서’에 나의 해당 사항을 하나씩 체크했다. 발열, 기침, 오한과 근육통. 의사는 “두 가지 증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했다.

첫째, 메르스. 가능성이 없지 않으므로 검사해볼 필요가 있다. 객담을 채취해서 메르스 1차 검사를 맡겨야 한다. 둘째, 말라리아. 인도 방문력이 있으니 확인해보자. 잠복기가 3~4주이므로 시기상 (5월6~11일 인도 취재) 해당된다. 의사는 덧붙였다. “오늘 집에 돌아가신 뒤부터 자가격리 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검체통을 주며 상담소 옆 화장실로 안내했다. 객담을 3㎖ 이상 받으라고 했다. 오늘따라 가래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너무 바짝 말라 있었다. 깍깍대고 끅끅댔으나 실패했다. 물을 마시고 화장실 들락거리길 몇 차례 반복했다. 목이 아프고 열이 올라 결국 포기했다. 검체통을 가져가 집에서 시도하기로 했다. 객담 채취 뒤 전화하면 보건소에서 방문하겠다고 했다. 보건소 직원이 귀가 방법을 통보했다.

“자가격리 대상이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앰뷸런스로 이동해야 합니다.”

나를 태울 앰뷸런스 기사가 현관문 앞에 대기했다. 내가 ‘메르스 의심자가 됐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났다. 앰뷸런스가 동네에 나타났을 때 이웃 주민들이 보일 동요도 그려졌다. 마음속에서 꿈틀한 것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감염병관리팀 직원이 상황을 조정했다. “아직 검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자가격리 상태도 아니니 일단 마스크 잘 쓰고 택시로 돌아가세요.” ‘메르스 검사’ ‘객담 채취’ ‘자가격리’ 같은 단어들이 발화되자 보건소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그때마다 안도했다.

1시간30분쯤 지나 보건소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른 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행동에 신경이 곤두섰다. 무엇엔가 손이 닿을 때마다 나를 묻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바이러스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예민한 자기검열로 이어졌다. 자발적 통제와 강제적 통치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마트에 들러 며칠 먹을 음식을 샀다. 며칠이 며칠이 될지 가늠되지 않아 신선채소부터 가공식품까지 바구니에 때려넣었다. 현관문을 따고, 현관문을 닫았다. 자가격리가 시작됐다.

열이 조금씩 올랐다. 보건소에서 받아온 체온계를 수없이 귀에 꽂았다. ‘37.9’를 찍던 체온계는 ‘38.3’을 액정에 띄웠다. 양쪽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전에 없던 근육통이 왔다. 정말 메르스면 어쩌나. 생각이 복잡해졌다.

 

앰뷸런스 말고 일반 차량으로 와달라
평택보건소 안에서 관계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어떤 곳을 응시하고 있다.

평택보건소 안에서 관계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어떤 곳을 응시하고 있다.

최근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회사 동료와 지인, 취재원을 머릿속에서 소환해 추렸다. 한 명씩 전화를 걸었다. 농담을 반쯤 섞고 웃음을 버무려 무겁지 않게 미안함을 전했다. 어디선가 술취해 있을 편집장에겐 긴 문자를 썼다. “혹시 모르니 선배가 적절히 공지하셔서 미리 방어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인도 출장 이후 아버지·어머니는 여러 차례 전화해 ‘몸에 이상 없냐’고 물었다. 두 분은 당신들 몸 추스르기도 힘든 상태였다.

보건소에서 준 ‘자가격리 생활수칙’을 읽었다.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생활하기.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 등 접촉하지 않기. 의복 및 침구류는 단독 세탁하고 식기류 등은 별도로 분리 사용….” 모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여서 나는 오늘 가볍다.

한국 사회의 난폭한 시선에 노출돼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구든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소수자가 될 수 있고,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수자로부터 낙인찍힐 수 있다는 사실을, 메르스는 사납게 일깨운다.

6월9일(화) 눈을 뜨자마자 가래 채취를 시도했다. 평소 목에서 툭툭 튀어나오던 놈이 정작 필요할 땐 꿈쩍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가래 뱉는 법’을 검색해 따라하기도 했다.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꼭 빨간 선(3㎖)에 맞춰야 하느냐”고 물었다. 담당 직원은 “객담 양이 부족하면 검사 결과가 부정확할 수 있다”고 했다. 긁고 긁어서 규정량을 채웠을 땐 목구멍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가웠다.

오후 1시25분. 보건소에 검체통을 가져가라고 연락하며 부탁했다. 앰뷸런스로 오지 말고 일반 차량으로 와달라. 어느새 내 마음에 낙인의 공포가 자라고 있었다. 메르스 전파자·격리자들을 겨냥한 화살과 비수가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 날아오는 듯했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며 ‘슈퍼 전파자들’이 느꼈을 불안함·두려움·외로움의 분자 몇 개도 내게 착상했다.

아프기보다 쓸쓸한 마음들을 이 땅에서 많이 봐왔다. 새가 조류인플루엔자를 옮기진 않는다. 돼지가 구제역을, 원숭이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박쥐가 에볼라를, 낙타가 메르스를 옮기는 게 아니다. 새와 돼지와 원숭이와 박쥐와 낙타가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진 않는다. 치명적 바이러스일수록 확산의 최대 주범은 인간이다. 인간의 편견과 혐오와 배제는 어떤 바이러스보다 할퀴는 힘이 세다. 한국 사회의 난폭한 시선에 노출돼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구든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소수자가 될 수 있고, ‘함께 살고 있다’ 는 이유만으로 다수자로부터 낙인찍힐 수 있다는 사실을, 메르스는 사납게 일깨운다.

 

동자동서 온 전화, 나갈 수 없어 화가 나다

오후 5시. 보건소 직원이 아이스박스처럼 생긴 작은 플라스틱 가방을 들고 벨을 눌렀다. 마스크 쓴 그를 마스크를 쓰고 맞으며 비닐봉지에 싼 검체통을 문밖으로 건넸다. 보건소 직원은 가방 안 밀폐용기에 검체통을 넣은 뒤 종이상자로 다시 봉했다. 상자엔 ‘Warning’(경고)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나의 검체는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으로 보내졌다. 하루나 이틀 사이에 검사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다.

6월10일(수) 동자동(서울 용산구)에서 전화가 왔다. 1년 탐사취재(‘가난의 경로’)의 현장인 동자동 9-20 건물(제1064호 쪽방에서 난 길은 쪽방으로 통한다 참조)을 집주인이 부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주민 10여 명의 삶터를 단전·단수하고 수도꼭지도 떼갔다고 했다. 갇혀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화가 끓었다.

오늘로 메르스 사망자는 9명, 격리자는 3439명, 감염 여부 검사자는 229명이다. 나는 229명 중 한 명이다. ‘메르스 유증상자’(메르스 증상이 의심돼 보건소 상담 및 검사 진행)이자 검체 채취 역학조사 대상자로 6월8일 ‘보고’됐다. 보건소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

6월11일(목) 오전 9시50분. 휴대전화에 보건소 번호가 떴다. “어젯밤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왔다”고 했다. 추가 이상 증상이 있는지 물었다. 음성 판정에도 의심 증상이 계속되면 한 차례 검사를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어제부터 열이 37도 이하로 떨어졌다. 근육통과 기침도 잦아들었다. 간호사와 한 차례 더 통화한 뒤 오전 11시10분 자가격리 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제 밖으로 나가셔도 됩니다.”

회사와 지인들에게 연락해 “안심해도 된다”고 전했다. ‘어떤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이 시대의 바이러스는 병원균을 넘어 이미 ‘관계망’으로 진화하고 있다.

오늘 박경란씨도 자가격리에서 풀려났다. 그의 엄마는 여전히 ‘불안정 환자’로 분류돼 있다. 면회가 통제된 딸은 엄마를 볼 수 없다. 그는 한 신문에 실린 국가지정격리병원의 음압병실 사진을 보며 울었다. 방역복 차림의 의료진 뒤편으로 한 여성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쓴 채 누워 있었다. “엄마예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하루 하루 쌓이는 사망자·격리자 수가 재앙의 크기를 설명하진 않는다. 통계엔 눈물이 없다.

80여 시간 만에 집 밖으로 나왔다. 매연 섞인 공기가 시원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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