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토마 피케티 )일까?
피케티가 일컫는 ‘과거’는 이렇다. 자본은 일단 한번 형성되면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돈이 돈을 번다. 노동은 자본이 가져가는 몫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현재’에는 극심한 불평등이 나타난다. 만약 글로벌 자본세 등 민주적인 통제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
현재의 시간은 과거 속에 갇힌다
소비와 문화 트렌드에서 나타나는 ‘과거’도 그렇다. 자본 대신에 ‘추억’이라는 단어를 넣어보자. 추억은 힘이 세다. 특히 현실이 고단할수록, 현실을 위로하고 잊게 만드는 추억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리하여 현재의 시간은 과거 속에 갇힌다. 추억 속에서는 좌절도, 포기도, 분노도 없다. 만약 추억이 현재를 외면하게 하는 장치라면, 미래도 꿈꾸지 않게 만든다. 진정한 자아와 좋은 사회를 열망하는 진정성은 “오직 기억과 무용담 속에 공허하게 빛나거나 아니면 라이프스타일로서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김홍중 )될 뿐이다. 게다가 추억에서도 불평등이 나타난다. 되씹을 추억조차 없거나, 추억도 사치인 이들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영화 에는 전쟁과 가난을 힘들게 버텨온 산업화 세대(덕수·황정민)의 추억이 있고, MBC (이하 ‘토토가’)에는 경제적·문화적 풍요로움을 누린 X세대의 19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녹아 있다. 두 콘텐츠가 문화 뉴스를 장악하는 사이에 경제 쪽에서는 연일 암울한 뉴스가 쏟아져나온다. (‘토토가’에는 등장 못했지만 1990년대 인기 댄스그룹이던 R.ef의 노래 가사를 빗대자면) ‘경제 불황과 추억은 왜 늘 붙어다녀. 무슨 공식이야’쯤 되겠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1월7일 펴낸 보고서에서 ‘경기 둔화’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우리 경제는 생산 관련 지표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등 전반적인 경기가 점차 둔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경기 회복세 미약’(2014년 9월)→ ‘미약한 회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해’(10월)→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태’(11월)→ ‘경제 성장세가 점차 둔화되고 있음을 시사’(12월) 등 KDI 보고서는 점차 비관적인 전망으로 한 발짝씩 이동 중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소비자심리지수는 2013년 9월 이후 최저치인 102(100보다 높을수록 과거보다 경기가 좋다고 판단)를 기록했다. 소비자물가상승률도 26개월째 1%대 행진을 계속하다가 12월 0.8%를 기록해 최저점을 찍었다. 2015년 전체적으로도 물가상승률이 0%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0%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처음이다. 유가 하락의 영향도 있지만 그만큼 소비심리가 위축돼 있다는 뜻이다.
“과거 따듯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꺼내보며 위로받고 싶은 욕구는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더욱 강해진다. 지난 경제위기 때마다 복고가 강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스트레스, 고독, 치열한 경쟁, 실업 등의 경험 탓이다.”(LG경제연구원 ‘90년대와 통한 복고형 감성코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은 1996~97년 가, 세계 금융위기가 덮친 2008~2009년 등 추억과 가족이라는 감성을 건드리는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1~2위를 차지했던 까닭도 비슷한 맥락이다. 에 이어 1970년대 포크음악 열풍을 다룬 영화 , 가족을 위해 피를 팔며 살아야 하는 고단한 남성을 그린 영화 도 1~2월에 잇따라 개봉한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자립을 위해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국 추억을 불러내 날개를 달아주는 건 자본의 힘이다. 유행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소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음소프트의 최재원 이사는 2015년 소비 트렌드로 ‘역주행’을 꼽았다. “막연히 과거를 찾아가는 복고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영화나 문학작품, 소비재 상품을 만드는 자본 입장에서 ‘추억팔이’는 다소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의 레퍼토리가 된 지 오래다. 어떤 추억을, 언제, 어떻게 꺼내 소비하게 할지를 결정하는 칼자루는 자본이 쥔다. CJ E&M은 방송채널인 tvN의 시리즈와 배급 등을 통해 추억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다.
“과거 따듯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꺼내보며 위로받고 싶은 욕구는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더욱 강해진다. 지난 경제위기 때마다 복고가 강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스트레스, 고독, 치열한 경쟁, 실업 등의 경험 탓이다.” -LG경제연구원 보고서
복고 마케팅이 오래됐다지만, 2012년부터 새로운 시대가 추억의 소비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흥미롭다. 먼 과거(1970~80년대)가 아니라 가까운 과거(1990년대)를 호출해냈기 때문이다. 영화 , tvN 드라마 과 가 대표적이다. ‘토토가’도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왜 하필 1990년대일까? 모든 사회에서 경제와 문화 질서는 서로 뒤얽혀 있다. 1995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외환위기로 인해 실업의 공포가 덮치긴 했지만 국민들은 ‘금 모으기’로 힘을 모았다. 비루할지언정 희망과 미래를 함께 꿈꾸던 시절이다. 또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찾아온 자유의 기운이 넘실댔다. ‘아이돌’로 대변되는 연예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10~20대를 보낸 X세대는 그들의 부모와 달리,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색채가 더 강했다. 사회 전체가 생산에서 소비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20년이 지난 현재, X세대는 30~4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문화 콘텐츠의 가장 큰 손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3분기 가구주의 연령대별 소비성향(소득/소비)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40대(77.6%)와 30대(74%)만 전체 연령 평균(72.5%)보다 높았다.
현재 35(±7~8)살인 이들은 ‘이케아 세대’라고도 호명된다. “이들은 이케아 가구와 잡화를 주문해 집을 꾸민다. 이케아 제품은 내구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세련되고 감각적이라 스타일링하는 데 경제적이다. 당장 2년(전세 기간) 동안 만족하며 쓸 수 있는 가격 대비 최적의 상품이다. 비싼 것을 사서 오래 쓰기보단 저렴하되 맘에 드는 물건을 사서 적당히 쓴 후에 교체하려는 소비 욕구의 발현이 그 예다. 또 이들은 해외여행과 사회 발전 덕분에 문화적 안목과 취향이 비교적 높다.”(전영수 ) 몇 년 전부터 의류시장을 평정한 유니클로, 자라, H&M 등 SPA(기획·생산·유통·판매를 한 회사가 해서 가격을 낮춘 의류) 브랜드가 인기를 끈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18일 경기도 광명에 문을 연 이케아 1호점은 평일 낮에도 여전히 쇼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핫플레이스’다. 암체어(5만9900원)와 보조테이블(9천원) 등 베스트셀러 제품들은 품절돼 주문해도 2~3주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다.
를 쓴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일본학)는 “합리적인 경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도 현학적인 표현일 수 있다. 젊은 세대가 자립을 위해 고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케아 세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위해 “선배 세대가 자연스레 올라탔던 ‘졸업→취업→연애→결혼→출산’의 행복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하나둘씩 이탈”하고 있다.
왜 20대는 행복하다고 했을까이 가운데서도 소비할 추억조차 없는 20대는 철저하게 소외된다. 영화 에서 20~30대는 철없고 제 잇속만 챙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관객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남진과 나훈아, 앙드레김, 정주영을 모르면 웃을 수가 없다. ‘토토가’에서 역시 S.E.S 슈와 터보 김정남을 모르면 그들이 이야기하다 말고 눈물을 쏟아도 같이 울어줄 수 없다. ‘이케아 세대’의 경계선에서 서성이는 20대는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열정페이(적은 급여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페이(pay)로 여기고 일하라는 비꼼) 등으로 포장될 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이들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경제적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다. 역설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1월7일 발표한 ‘경제적 행복 추이와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67쪽 표 참조)를 보면, 20대의 경제적 행복지수가 48.9로 가장 높았다. 반면 최대 소비층인 40대의 행복지수는 40.9로 가장 낮았다. 지난해 12월 전국의 20살 이상 성인 남녀 812명에게 ‘나는 주변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편이다’ ‘내가 느끼는 체감 물가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등의 설문 항목을 물어봐서 긍정 100점, 부정 0점으로 평균을 낸 점수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전혀 딴판이다. 20대 실업률은 9.1%(2014년 1~11월)로 2000년 이후 가장 높다. 20대 고용률은 60%에 못 미쳐, 5명 중 3명은 취업을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20대는 행복하다고 응답한 걸까?
‘이케아 세대’의 경계선에서 서성이는 20대는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열정페이 등으로 포장될 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이들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경제적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다. 역설적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서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이 많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예컨대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옷을 구입해 입고, 맥도날드에서 식사하고, 가구는 이케아에서 구매한다. (중략) 이처럼 ‘뒤틀린’ 사회구조 내부로부터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기묘한’ 안정감이 나타나고 있다. 내각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의 70.7%가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후루이치 노리토시 )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고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고 위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단어를 빼고 한국을 대입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의 해제를 쓴 오찬호 박사(사회학)는 “영화 의 주인공 세대는 고생을 하면 성과가 따라오는 세대였다. 하지만 지금의 20대에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훈계는 시대착오적이다. 저성장의 시대에 ‘바늘구멍’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취업난 속에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질식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상황은 좋지 않지만 열심히 일해라’는 말은 냉소만 불러온다”고 지적한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열악한 아르바이트라도 인생에 좋은 경험이다”라고 말했다가 거센 역풍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소비생활에서 우회로를 찾는 젊은이들현실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 젊은이들은 소비생활에서 우회로를 찾는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최근 셀카봉, 먹방, 허니버터칩, 비싼 디저트 등 일상생활에서 은근히 소소한 행복을 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대가 소비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 ‘토토가’의 소비자(수용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도 혹시 그래서는 아닐까? 과거와 추억이 과잉 소비되는 저성장의 시대, 미래를 생산할 자는 보이지 않는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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