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산업시범공장 지대로 시내 영등포구 구로동에 있는 시유지와 군용지를 주선할 것이니 모범촌락을 건설토록 하라.”(1963년 7월11일 , 재일교포수출상품 전시회에서)
구로공단(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서 움텄다. 노동집약적인 제품을 수출해 경제 발전을 이끌겠다는 목표가 또렷했다.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경북 구미와 울산, 경남 창원 등지에도 공업단지가 차례로 생겨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로공단에 대한 애착은 각별했다. 1965년 기공식과 1967년 제1단지 준공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1968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열린 제1회 무역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왼쪽).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조성된 초기였던 1967년 전경. 한국산업단지공단 제공
구로공단의 운명은 태생부터 철저하게 정권에 종속돼 있었다. 이후로도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의 흥망성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정책이 변할 때마다 따라서 춤을 췄다. “한국 경제의 축약판”(손정순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연구교수)인 구로공단 50년의 역사에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타이밍’을 먹어가며 가발을 만들다가[1964~70년대] 구로공단에는 우선 재일동포를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1967년 1차로 입주 허가를 받은 재일동포 기업체는 4곳뿐이었다. 그러자 국내 업체에도 문을 열어줬다. 다만 수출실적이 있거나 생산제품 전량을 수출하는 중소기업으로 입주 자격을 제한했다. 이런 기준도 하나하나 허물어졌다. 1968년 준공된 제2공단에는 재일동포 기업이 아예 입주하지 않았고, 1969년엔 대기업도 입주할 수 있도록 공단 문턱을 낮췄다. 또 수출기업을 위한 공단이라더니 생산제품의 40%를 국내에서 판매하도록, 수출의무규정을 슬그머니 완화했다.
어쨌든 그 결과, 구로공단은 수출의 전초기지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1971년 수출액 1억달러에서 1980년 18억7천만달러로, 이 기간 중 수출 증가율이 연평균 36.5%에 이르렀다. 국가 전체 수출액의 10%가량(1977년)을 구로공단이 책임질 정도였다. 수출액의 44%가량을 차지한 일등공신은 섬유·봉제업이었다. ‘타이밍’이라는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여공들이 땀 흘려 가발을 만들고 전자제품을 조립한 결과였다. 구로공단 한켠 ‘벌집촌’에 몸을 뉘어야 했던 노동자 수도 1967년 2460여 명에서 점차 늘어나 1978년 11만4천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야말로 구로공단 최대 호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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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6년] 1980년대 중반 이후 구로공단은 낙후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하던 경공업 대신에, 정부가 중화학공업으로 중심축을 옮겨간 영향이 컸다. 단순히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하던 가발업체 등은 설 자리가 없었다. 구로공단의 주력 업종은 서서히 전기·전자 업종(1985년 수출 1위)으로 옮겨갔다. 제조업체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값싼 부지’를 찾아 영남권에 새로 조성된 산업단지로,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과 동남아로 떠났다. 남아 있던 제조업체들은 하청노동자를 쓰거나 공장을 폐쇄했다.
1997년은 특히 중요한 변곡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구로공단은 회색빛 거리가 됐다. 폐업으로 빈 공장이 늘어났고, 30년 이상 된 공단의 노후화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김영삼 정부는 ‘저임금’으로 돌파하지 못하는 위기를 ‘저규제’로 넘고자 했다. 먼저 공단의 산업 지도를 새롭게 짰다. 구로공단을 벤처, 연구·개발(R&D), 정보·지식기반산업 중심의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 구조 개편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구로산업단지 첨단화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제조업만 입주할 수 있도록 돼 있던 산업단지 업종 제한을 연구개발업·사업지원서비스업 등 비제조업까지 넓혔다. 앞서 1996년에는 ‘수도권 공장 총량제’ 대상에서 아파트형 공장(지식산업센터)을 제외하고, 민간 건설업체가 아파트형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시공권을 주는 등 여러 가지 규제를 풀어줬다. 아파트형 공장 건설에 각종 세금을 감면해주는 ‘당근’도 제시했다.
아파트형 공장과 대규모 패션타운[1997년 이후] 구로공단은 외형적으로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굴뚝이 사라진 자리를 아파트형 공장들이 채웠다. 김대중 정부 시절 때마침 부풀어오른 ‘벤처 거품’을 타고서 우후죽순 설립된 중소 정보기술(IT)·벤처기업들이 구로공단으로 몰려왔다. 구로공단의 임대료는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10~20% 수준에 불과했다.
‘구로공단의 부활’(삼성경제연구소, 2007년)이라는 찬사가 쏟아져나왔다. 아파트형 공장은 1998년 이후 107곳이나 건설됐다. 건물 면적으로만 치면 구로공단의 2.5배다. 입주업체 수도 2010년 1만 개를 넘어 현재 1만1911개에 이르고,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만도 16만여 명에 이른다. 입주기업의 81%는 IT·지식산업 관련 업체고, 일반 제조업체는 19%에 불과하다.
금천구 가산동에 위치한 2공단 지역에 마리오아울렛 등 대규모 패션타운이 형성된 것도 1990년대 말부터다. 애초에는 ‘준공업지역’이라서 공장시설의 30%만 판매장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데, 점차 의류업체들은 생산에서 판매 중심으로 사업 형태를 바꿔나갔다. 이를 두고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산업공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지자체와 유통대기업, 부동산업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관광과 판매, 소비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김철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는 비판도 나온다.
케케묵은 ‘굴뚝공단’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로공단은 2000년 이름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고 2004년과 2005년엔 지하철역 간판까지 구로디지털단지역(구로공단역), 가산디지털단지역(가리봉역)으로 갈아달았다. 하지만 단순히 제조업에서 IT로 갈아탔다고 해서 당장 구로공단이 ‘창조경제의 생태단지’로 탈바꿈한 건 아니다. ‘벌집촌’이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었을 뿐, 구로공단의 노동환경과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하다. 2008년 한국산업단지공단이 19개 국가산업단지를 상대평가했더니, 구로공단이 기반 인프라와 사회·문화·복지 지표에서 꼴찌였다. ‘굴뚝 없는 공단’이 됐는데도 난개발로 인해 노동자가 쉴 수 있는 녹지도 제대로 없는 삭막함은 그대로인 것이다.
2011년 ‘선거의 여왕’이 복귀 유세를 했던 곳손정순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정부 주도로 IT 관련 업체를 집적시켜놓았지만 실리콘밸리처럼 업체들 간에 시너지 효과가 나고 혁신으로 이어지진 못하는 게 현재 구로공단의 한계”라고 말한다. 한 업체당 평균 고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할 정도로 영세한 IT 회사가 대부분이다보니, 구로공단 대표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서울 강남이나 경기도 분당으로 뜨려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또 제조업의 영세화·탈생산화를 우려했다. 현재 구로공단에 입주한 업체 가운데 48%는 아예 생산 기능이 없는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첨단산업’이라는 화려함 뒤에는, “소규모로 단순 도급을 따오는 영세한 업체”(한국산업단지공단 서울지역본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계획서’, 2013년)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분양 수익을 높이기 위해 좁은 아파트형 공장에 중소업체를 밀어넣은 결과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은 서울디지털단지를 IT 인력 중심의 ‘창조경제 복합단지’로 조성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구조고도화 사업계획을 2013년 9월 발표했다. 50년 동안 계속 그래왔듯이, 입주 허용 업종을 확대하고 각종 세제 혜택을 늘리는 등의 규제 완화가 고갱이다. 공단 내에 창조산업 지원센터, 문화시설, 호텔 등 각종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도 담고 있다.
서울남부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 박준도 정책기획팀장은 “현재 추진 중인 구로공단 구조고도화 사업계획은 규제 완화와 재개발이 핵심이다.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면서 임대아파트가 아니라, 부동산 투기로 변질될 오피스텔을 짓는 식이다”라고 비판했다. 김영수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구로공단을 비롯한 산업단지는 우리나라 전체 제조업 고용인원의 44%를 차지하는 등 경제적 위상이나 역할이 굉장히 크다. 이 때문에 산업단지를 너무 토지개발 사업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만큼이나 구로공단에 애착이 많다. 2011년 10·26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4년 만에 ‘선거의 여왕’으로 복귀해 선거유세를 지원했던 곳이 바로 구로공단이다. 본격적인 대선 행보의 출발점이었다. 대통령 취임 뒤에도 지난 7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청년 기업인들과 ‘창고 간담회’를 열어 창조경제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만약 2064년 구로공단 100년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순간이 온다면, 박근혜 정부의 발자취는 어떻게 기억될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참고 문헌(안치용 외·2014)
‘수출산업단지의 형성과 변모: 구로공단 1963~1987년’(이상철·2012)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재구조화: 산업생산의 공간에서 소비 및 지대수익의 공간으로’(김철식·2012)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지역의 산업구조 분기와 주변부 서비스업의 확산’(손정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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